마쓰다이라 시게토미
Matsudaira Shigetomi마쓰다이라 시게토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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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平重富 | |
태어난 | |
죽은 | 1808년 7월 30일 일본 에도 | (59)
국적 | 일본인입니다 |
제목 | 후쿠이 번 다이묘 |
전임자 | 마쓰다이라 하루요시 |
후계자 | 마쓰다이라 나리쓰구 |
배우자 | 도쿠가와 무네노부의 딸 이치히메 |
상위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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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시게토미(松平成, 1748년 12월 25일 ~ 1808년 7월 30일)는 에치젠 성 도쿠가와 막부 에도 시대 후쿠이 번 12대 다이묘였다.[1]후쿠이 번 역대 다이묘 중 가장 긴 41년 동안 후쿠이를 통치했다.
전기
시게토미는 에도에서 도쿠가와 가문의 3소속인 고산쿄의 하나인 히토쓰바시-토쿠가와 가문의 시조 도쿠가와 무네타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어릴 적 이름은 센치요(陳治y)로, 후에 센노스케(仙osukeosuke)가 된다.
1758년 후쿠이 번 마쓰다이라 시게마사가 사망하자 후계자로 추증되어 다이묘가 되었다.1760년 겐푸쿠 의식을 거쳐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이름에서 인물을 받아 마쓰다이라 시게토미가 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재정 개혁을 시도했지만, 폭설, 화재, 폭풍, 홍수, 전염병으로 인한 연속적인 피해는 그의 노력을 좌절시켰고, 도메인의 재정은 계속 악화되었다.시게토미도 히토쓰바시 집안에서 젊었을 때부터 호화로운 생활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수입이 바닥나자 그는 이러한 사치품들을 유지하기 위해 쌀 상인들에게 특별 세금을 부과했다.이는 1768년 후쿠이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면서 쌀값 상승과 국민의 큰 불만을 초래했다.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던 도메인 관리들은 대중의 요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부패한 관리들과 상인들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쇼군가 시게토미의 가까운 친척이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숙부였으므로, 도메인은 중앙정부에 재정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그러나, 텐메이 대 기근은 그 영토를 강타했다.시게토미는 1790년에 도메인 독점을, 1799년에 소금을 만들었다.1799년 아들을 위해 공직생활을 은퇴하였다.또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도메인의 명예 지위를 부활시키면서 궁중 계급은 주니어 4급에서 상급 4급, 하급 4급으로, 예우 직위는 사코네곤쇼조에서 사코네곤추조까지 높였다.
기이 번 도쿠가와 무네노부의 딸과 결혼했다.그의 묘소는 시나가와 도쿄 가이안지와 후쿠이 운소지 씨 종가에 있다.
가족
- 아버지 : 도쿠가와 무네타다
- 어머니:오유쿠노카타
- 아내 : 도쿠가와 무네노부의 딸 이치히메
- 첩:
- 후쿠야마도노
- 오카야마도노
- 손: 이치히메의 마쓰다이라 하루요시
외부 링크
- 에도 300번지의 후쿠이 시 (일본어로)
- 越前前(에치젠 마쓰다이라) ReichsArchiv.jp (일본어로)
메모들
- ^ 버크스, 아르다트 W. (1985)모더니타이저: 유학생, 외국인 직원, 메이지 재팬, 페이지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