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행

Mi Heng
미행
禰衡
Mi Heng Qing portait.jpg
미행의 청나라 초상화
태어난173
죽은198 (25세)
기타 이름정핑 (正平)
직업학자
미행
중국어 번체禰衡
중국어 간체祢衡
정핑 시
(이름)
중국어正平

미행[a](c.美行, AD 173년 – 198년)은 중국 고대 문인이자 음악가로, 동한 말기에 살았다. 는 현대까지 살아남은 그의 유일한 작품인 " 온 더 앵무새"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1]

인생

미행은 AD 173년경 산둥성 핑위안군 특공대(平安郡)[2]에서 태어났다. 190년대 초 미행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나라 말기에 일어난 혼돈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 북부를 도망쳤다. 징 성(현재의 후베이 성, 후난 성 포함)에 정착하여 총독인 류비오(劉 liu)의 스탭에 합류하였다. 196년경 미행은 북으로 이동하여 군벌 조조가 쉬(許;현재의 허난성 쉬창)에 세운 황실에 합류하였다.[2] 미행은 저명한 선비 공룽과 친하게 지냈는데, 공룽은 그를 황제로 추천하는 기념비를 써서 시안황제에게 제출했는데, 당시 시황제는 주로 조조의 휘하에서 괴뢰 통치자였다.[2] 미행은 197년 징 성으로 돌아와 1~2년 뒤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미행은 재능 있는 시인이자 재능 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엉뚱한 행동과 불쾌한 농담, 교제를 어렵게 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 쉬웠고, 심지어 그의 제정신을 의심하게 하기도 했다.[3]

196년 경에 쉬에 도착한 공룽은 조조에게 미행(美行)을 높이 평가했는데, 조조는 그를 불러 관중을 불렀다.[2] 그러나 미행은 조조의 생각이 저조하여 참석을 거부했다.[2] 조조는 미행의 거절에 격분했으나 재주라는 평판을 이유로 미행의 처벌을 자제했다.[1] 미행은 재주 있는 드러머로 알려져 있어 조조는 그를 초청하여 연회에 다른 드러머 몇 명과 함께 공연하게 했다. 조조는 북적들이 입을 수 있도록 특별한 의복을 마련했으나 미행은 조조와 다른 고위 하객들 앞에서 공연할 때 제공된 의복을 입지 않고 자신의 옷을 입었다. 수행원이 옷을 제대로 입지 않는다고 꾸짖자 미는 천천히 옷을 벗기고 잠시 동안 알몸으로 조조와 다른 손님들 앞에 서 있다가 북새통들의 옷을 천천히 입고 당황한 기색도 없이 공연을 계속했다.[1][3] 공룽은 미행과 조조의 두 번째 만남을 주선했으나 미행은 그 첫 만남에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공격적이어서 조조는 그를 다시 류비오에게 보내기로 했다.[1]

류비오의 부하들 가운데 미행은 문학적 재능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는 류비오가 우유부단하고 거만한 태도로 류비오의 다른 수행원 대부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1][3] 류비아오는 그를 장샤 특공대(張xia大ery;현재의 신저우 구, 우한 구, 후베이 구)로 보내어 행정관 황주(黃州)를 섬기게 하기 전에 1년 동안 그를 묵인했다.[1] 황주(黃州)의 아들 황이(黃 admired)는 미행(美行)을 크게 흠모했다. 황주 자신도 처음에는 미행의 총명함과 재능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미행은 연회에서 모든 신하들 앞에서 황주에게 모욕을 주었을 때 곤욕을 치렀다.[1][3] 황주는 미응을 미워하는 선임계원이 재빨리 단행한 미응의 처형을 명했다.[3]

작동하다

양나라의 도서목록에는 미행의 수집된 작품 한 권이 2롤(주안)으로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당나라 초기(7세기 초)에는 이미 이 수집품이 없어졌다.[4] 미행의 유일한 생존 작품은 그의 '앵무새 위의 '(잉우푸 鸚賦)로, 아마도 198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 《정예문학선집》(원쉬안 文學)[1]에 수집되어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두 개의 영어 번역이 존재한다.

  • Graham, William T., Jr. (1979), "Mi Heng's 'Rhapsody on a Parrot'",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39 (1): 39–54.
  • Knechtges, David R. (1996), "'Rhapsody on the Parrot', Mi Zhengping", Wen Xuan, or Selections of Refined Literature, Volume 3,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49–57.

메모들

  1. ^ a b 일부 소식통들은 그의 성을 "ni"로 읽는다.

참조

각주

  1. ^ a b c d e f g h 크네히츠(2010), 페이지 672.
  2. ^ a b c d e 크네히츠(2010), 페이지 671.
  3. ^ a b c d e 드 크레스피니(2007년), 페이지 678.
  4. ^ 크네히츠(2010), 페이지 673.

인용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