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즈마 미클로스
Miklós Kozma코즈마 미클로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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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내무부 장관 | |
재직중 1935년 3월 4일 – 1937년 2월 3일 | |
선행자 | 페렌크 케레스테스 피셔 |
성공자 | 다라니 칼만 |
서브카르파티아 주지사 리젠트 위원 | |
재직중 1940년 9월 12일 – 1941년 12월 8일 | |
선행자 | 지그몬트 페레니 |
성공자 | 빌모스 팔 톰사니 |
개인내역 | |
태어난 | 헝가리의 나기바랏 | )5 1884년 9월
죽은 | 1941년 12월 8일 헝가리의 웅바르 | (57세)
정당 | 국민통합당, 헝가리 생명당 |
직업 | 정치가 |
비테즈 미클로스 코즈마 데 레벨드(Vitéz Mikloss Kozma de Leveld, 1884년 9월 5일 ~ 1941년 12월 8일)는 헝가리의 정치가로 1935년부터 1937년 사이에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줄라 ö뵈스 내각에서도 잠시 국방장관을 지냈다.그는 루도비카 아카데미에 다녔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그는 시작부터 미클로스 호시의 지지자였다(세제드의 반정부주의자).192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마자르 타비라티 이로다(MTI)의 수장으로 일했다.그는 칼만 다라니 총리의 온건한 정책에 동의하지 않아 내무부 장관직을 사임했다.
고즈마 목사가 급진정치를 계속한 후, 그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였던 룽요스 가르다와 함께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카르파탈자)를 공격하고 싶었으나, 정부는 그를 설득하여 이 계획에서 제외시켰다.룽요스 가르다는 슬로바키아군이 그 지역으로 여과된 후 맞닥뜨렸다.점령 후 카르파탈랴 총독에는 코즈마 미클로스가 임명되었다.그는 헝가리 내 첫 유대인 강제추방을 시작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주변국에서 헝가리로 탈출한 사람들을 포함한 비헝가리 유대인들을 시작으로 했다.이 추방자들 중 많은 수가 곧 카미아네츠-포딜스키 대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참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