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웨프 파인더

Paweł Finder
파웨프 파인더
파웨우(핑커스) 파인더 - 1934년 체포 후 머그잔 촬영

파웨프 파인더(폴란드어 발음: [ˈpavɛw ˈfindɛr], 핑커스 파인더로 태어난 가명: 폴 파인더, 폴 레이노트, 1904년 9월 19일 ~ 1944년 7월 26일)는 1943년부터 1944년까지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 겸 폴란드 노동자당(PPR) 제1서기였다.[1]

초년기

파인더는 비엘리츠있는 부유한 유대인 가게 주인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학교에 있는 동안 잠깐 시오니즘에 대해 추파를 던졌고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그는 비엔나, 멀하우스, 파리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화학 기술자로, 그는 국립 음악원 데스 아트의 연구원이었고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의 조교였다.

공산당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오스트리아 공산당의 당원이었으며, 1924년부터 1928년까지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었으며, 중앙 위원회 기구에서 근무하며 l'Humanité'를 위한 기사를 썼다. 1928년 공산주의 활동으로 프랑스에서 추방당했고 폴란드로 돌아왔다. 그는 장교학교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1934년 체포될 때까지 폴란드 지하공산당(KPP)에서 활동했으며, 실레시아, 우우드, 바르샤바, 크라쿠프 등에서 서기를 지냈으며, 1933년에는 국가사무국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는 1934년에 체포되어 1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 9월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 때 그는 라위츠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소련으로 갔다. 그는 1941년 초 소련이 점령한 비아위스토크에 설립된 지방 당국의 계획 위원회에서 일했고, 그 의장이 되었다. 파인더는 독일군이 침공하자 모스크바로 도망쳐 폴란드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재창립하기 위해 결성된 '이니티브 그룹'의 리더로서 코민테른 훈련학교로 향했다. 1941년 12월 27일 그는 폴란드로 낙하산을 타고 갔다. PPR(마르셀리 노요트코, 볼레스와프 모우예크와 함께)을 결성하고 이끈 트로이카에서 노요트코에 대한 지적, 이념적 지원을 제공했다. 노요트코 살해와 이후 모우예크의 처형 이후인 1943년 1월 그의 뒤를 이어 비서로 취임했다.

파인더는 1943년 12월 14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파위악에 수감되었다. 그는 1944년 7월 바르샤바 게토 유적에서 나치가 피난하고 파위악을 철거하면서 신원과 고문, 총격을 받았다.

그가 딸을 낳았던 그의 첫 아내는 1920년대에 프랑스에서 죽었다.
그의 두 번째 부인 게르트루다 파인더는 KPP 활동가로 전쟁 후 폴란드 보안 기구에서 일했다.

메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