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B. 두리아 주니어
Perry B.페리 벨몬트 두리아 주니어 | |
---|---|
제114회 뉴욕주 의회 의장 | |
재직중 1969년 1월 8일 ~ 1974년 12월 31일 | |
주지사 | 넬슨 록펠러 말콤 윌슨 |
선행자 | 모세 M. 와인스타인 |
성공자 | 스탠리 스팅구트 |
뉴욕 주의회 의원 제1지구 출신 | |
재직중 1966년 1월 1일 – 1978년 12월 31일 | |
선행자 | 신구 |
성공자 | 존 L. 베언 |
뉴욕 주의회 의원 서퍽 군 제1지구 출신 | |
재직중 1961년 1월 1일 – 1965년 12월 31일 | |
선행자 | 어빙 L. 프라이스 주니어 |
성공자 | 폐지된 지역 |
개인내역 | |
태어난 | 미국 뉴욕 주 몬탁 | 1921년 10월 18일
죽은 | 2004년 1월 11일 미국 뉴욕 사우샘프턴 | (82)
사망원인 | 교통사고 |
배우자 | 마리 테레스 두리아 |
아이들. | 두 개 |
모교 | 콜게이트 대학교 |
페리 벨몬트 두리아 주니어(Perry Belmont Durya Jr. 1921년 10월 18일 ~ 2004년 1월 11일)는 미국의 정치인이다. 공화당의 두리야는 뉴욕 주의회의 오랜 의원이었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1978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지 못했다.
인생과 경력
듀리야는 1921년 10월 18일 뉴욕 서퍽 카운티 몬탁에서 페리 B의 아들로 태어났다. 두리아 시니어 (1891–1968). 두리아 씨는 해산물을 도매로 하는 사업을 운영했고, 이후 주 상원의원과 주정부 보존 위원이었다. 듀리아 주니어는 이스트 햄튼 고등학교를 다녔고 1942년에 콜게이트 대학을 졸업했다.[1]
미 해군항공운송사업부 조종사로 미 해군 중령 계급에 올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44년 두리아는 엘리자베스 앤 위드와 결혼하여 1947년에 태어난 린 두리아와 페리 B라는 두 아이를 낳았다. 두리아 3세는 1949년에 태어났다. 두리아 부부는 1990년에 이혼했다. Perry Duryea는 Marie Therse Duryea와 결혼했다.[2]
듀리야는 1961년부터 1978년까지 뉴욕 주의회의 공화당 의원이었다. 1965년 12월 13일, 그는 조지 L의 후임으로 소수민족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1966년 회기가 시작될 때 잉걸스.[3] 듀리야는 뉴욕 주의회의 의장이 될 때까지 국회 소수당 지도자로 일했다; 그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고 1974년부터 1978년까지 다시 소수당 지도자로 일했다.[2]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공화당은 의회에서 다수당을 잃었고, 두리아는 뉴욕 의회의 마지막 공화당 의장으로 남아 있다.[citation needed] 듀리야는 1967년 뉴욕 캘버턴에 있는 그루먼 조립공장을 대도시 뉴욕시의 제4대 주요 공항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중단시키기 위해 성공적인 싸움을 하는 등 동부 롱아일랜드의 개발에 대항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듀리야는 1967년 뉴욕주 헌법 협약의 대표자였으며, 1968년 뉴욕주 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다.
두리야는 1973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지만 고소는 취하됐다. 그는 피플 대 피고의 피고였다. 76 Misc.2d 948, 351 N.Y.S.2d 978 (1974년) 두리아는 익명의 자유 발언권에 관한 사례인 44 A.D.2d 663, 354 N.Y.S.2d 129 (1974년)를 나중에 맥킨티레 v 오하이오 선거 위원회 (1995년)에서 인용하여 확인하였다. [2]
1978년 두리야는 뉴욕 주지사의 공화당 후보였으나 현직 휴 캐리에게 졌다.[2]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그는 청소년들에게 특정 폭력 범죄에 대해 성인으로 재판을 받을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캐리가 줄기차게 반대하는 조치였다. 하지만 할렘 출신의 윌리 보스케(15)가 뉴욕시 지하철에서 3명을 살해하고 주립 청소년 시설에서 5년형을 선고받으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러한 관대한 형벌에 대한 격렬한 항의로 캐리는 항로를 되돌리고 13세 이하의 청소년들을 성인으로 재판 받을 수 있는 법을 지지하게 되었다.
롱아일랜드 하푸포게에 있는 뉴욕 주 사무소 건물은 서퍽 카운티 법원 판사 혼의 요청으로 페리 B 두리아 주립 사무소 건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틴 J 케린스.
뉴욕 몬탁에 있는 우체국은 페리 B로 이름이 바뀌었다. 두리아 주니어 우체국
듀리야는 2004년 1월 11일 뉴욕 사우샘프턴의 사우샘프턴 병원에서 교통사고로[2] 사망한 뒤 몬탁의 포트힐 묘지에 안장됐다.
원천
- ^ "Governor Signs Legislation Designating the Perry B. Duryea, Jr. State office Building in Suffolk County". New York State Department of Transportation. October 29, 2003. Retrieved January 22, 2022.
- ^ a b c d e Lueck, Thomas J. (12 January 2004). "Perry Duryea Jr., Former Assembly Speaker, Dies at 82". The New York Times. p. B6. Retrieved July 22, 2020.
- ^ Considine, John L. (December 14, 1965). "Minority Leader Duryea Pledges Aggressive GOP" (PDF). The Citizen–Advertiser. Auburn. United Press International. p. 2. Retrieved July 22, 2020 – via fultonh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