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펑자

Qiu Fengjia
추펑자 (추펑자)

치우펑자 또는 치우펑치아(중국어: 丘逢甲; 핀인: 추팽지( qiji之), 웨이드(Wade-Giles) : 치우펑치아(Ch'iu Pengchia; 1864년 12월 26일 ~ 1912년 2월 25일)는 대만 하카족 애국자, 교육자, 시인이었다.

역사

청나라 때인 1864년 광둥성 자오링(廣東) 출신의 조상으로 대만감수이팅(),水ui) 오랑읍(중국인: :壟壟)에서 태어났다. 아들 치우(치우) 니안타이(대만을 문자 그대로 기억함)와 두 명의 손녀 치잉난(治英南)과 치잉탕(治英tang)이 있었다.

추는 대만의 민병대 설립을 주창하고 조직하였으며, 그 대의를 위해 재산도 매각하였다. 1894년까지 140개의 민병대가 대만에서 총 10만명의 군인을 수용했다. 청나라가 1895년 4월 제1차 중일전쟁 말기에 포모사(대만)와 페스카도레스를 일본에 세습한 데 이어 포모사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총통으로는 탕징성(唐 j城) 대만 청 총통이 임명되었으며, 부총통으로는 추( qi)가, 군통수권자인 류융푸(劉永福)가 임명되었다. 추는 또한 민병대의 지휘관이었다.

탕은 1870년대와 1880년대 초 베트남 북부(톤킨)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는 중국 애국자로 명성을 떨쳤던 류융푸를 의심했다. 류는 대만 남부의 타이난 방어를 위해 파견되었다. 일제는 대만 북부의 킬룽을 공격하여 당나라의 수양 부대를 쉽게 물리쳤다. 탕은 패전 후 재빨리 대만을 탈출했다. 추는 민병대를 이끌고 전투를 계속했으나 아버지로부터 대만을 떠나 다음 번에는 재기할 수 있도록 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계급에 속하는 여성들을 포함한 민병대는 몇 달 동안 저항을 계속했고, 침략한 일본군에 더 적은 사망자를 냈다. 이는 제1차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에 패한 것보다 몇 배나 많은 수치다.

추는 이후 신해혁명에 관여했으며 1911년 중화민국 임시 대통령 선거의 광둥성 대표였다. 그는 후에 쑨양 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대만 타이중(臺灣)에 있는 펑치아 대학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름 지어졌다.

참조

  • Hummel, Arthur W. Sr., ed. (1943). "Ch'iu Fêng-chia" .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 ChinaTaiwan.org [1][permanent dead link]
  • 중국 역사 포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