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아난다기리

Satyananda Giri
사티아난다기리
Satyananda lotus position.jpg
연화자세의 사티아난다 스와미
개인적인
태어난
마나모한 마줌더

(1896-11-17)17 1896년 11월
비크람푸르, 벵골, 영국령 인도
죽은1971년 8월 2일 (1971-08-02) (74세)
종교힌두교
국적인디언
부모님모히니 모한 마금다르(아버지)
타라바시니 데비 (어머니)
종교 경력
구루육테스와르 기리

Satyananda Giri (Bengali: স্বামী সত্যানন্দ গিরি) (17 November 1896 – 2 August 1971), is the monastic name of Manamohan Mazumder, an Indian monk and a chief monastic disciple of Kriya Yoga guru Swami Sri Yukteswar Giri. 그는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와 친하게 지냈고 형제였다. 말년의 수도원 생활에서 그는 인도 동부의 여러 요가 훈련 기관의 리더로 활동했다.

초년

아차리아 스와미 사티아난다 기리 마하라지(가명 마나모한 마금더)는 1896년 11월 17일 현재 방글라데시, 비크람포레의 몰카 나가르에서 모히니모한 마금더와 타라바시니 데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후에 그의 아버지 모히니모한은 캘커타 정부 예술대학에서 공부했고 가족은 캘커타로 이사했다. 모히니모한은 캘커타 농아학교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그 결과 마줌더 가문은 학교 구내에 살곤 했다.

학교 맞은편에는 파라마한사 요가난다(가명 무쿤다 랄 고시)가 부모와 함께 살던 가르파로가 있다. 사티아난다는 11살 때 요가난다를 만났고 요가난다는 14살이었다. 그들은 소년 시절 가장 친한 친구, 형제 제자들, 동료들이었다.

Mohinimohan had seven children; Satyananda was the eldest then there was: Nripendramohan Mazumder (Mukul), Khirodmohan Mazumder, Saileshmohan Mazumder (Suddhananda Giri), Nalinimohan Mazumder (Nanimohan, a journalist), Gopimohan Mazumder, the youngest son and Sarjubala, the only daughter (disciple of Swami Abhedananda who was the disciple of Ramakr이슈나).

사티아난다는 캘커타 미트라 학원에서 공부했고, 푸리에 살면서 배운 벵골어, 산스크리트어, 힌디, 영어, 오리야를 구루 스와미 스리 유테스워 기리와 함께 알고 있었다.

그는 캘커타 대학에서 철학을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 후 스와미 기사단의 기리 지부에 들어갔는데, 그 중 그의 구루 스리 유테스워도 한몫했다. 그의 학교 급우 중 한 명과 좋은 친구 한 명은 라히리 마하사야의 총각 손자 아난다 모한 라히리였다. 그들은 후에 요가난다의 란치 학교에서 함께 일했다.

요가 선생님

사티아난다는 인도스와미 스리 유테스워 기리(Swami Sri Yukteswar Giri)와 파라마한사 요가난다(Paramahansa Yogananda)의 가장 앞서는 제자였다. 요가난다는 인도 벵골의 작은 나라 사이트 디히카에서 7명의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18년 마닌드라 찬드라 낭디 경이 이 학교에 자금을 지원했고, 인도 란치로 옮겨졌다. 요가난다는 그 학교를 브라흐마차랴 비달라야라고 불렀다. 사티아난다는 요가난다가 시작한 란치 브라흐마차랴 학교에 입학했고 그의 절친한 친구인 디란다와 사티아난다는 이를 지지했다.[1]

1920년에 요가난다는 미국으로 크리야 요가를 전파하기 위해 떠났고, 그 후 요가난다는 1922년에 도와주기 위해 디란다를 불렀다. 요가난다의 요청에 따라 사티아난다는 교장과 장관이 되어 1922년부터 1942년까지 학교를 운영했다.

이 학교의 이사로 재직하는 동안, 마하라자의 재산은 파산했다. 그는 예전처럼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요가난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했고 이에 따라 사티아난다는 그에게 편지를 썼지만, 그는 미국에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사티아난다는 전 기간(20년)의 월급을 기부하고 란치 학파를 구했다. 종종 그는 란치를 자신의 핏줄로 만든 기관이라고 불렀다.

유키테스와르 기리는 1919년 함께 살던 자신의 푸리 카라 아슈람에서 사티아난다를 훈련시켰고, 이후 그를 '동양의 지도자'로 임명했다. 또 자신의 푸리 카라 아슈람에서 사티아난다를 푸리 카라 아슈람의 '아슈람 스와미'(은둔자의 수도사)로 임명했다.

사티아난다는 푸리의 카라 아슈람(1919191921년), 란치(1922년 1941년), 세바야탄(1943년~1971년)의 암자에서 살았다. 그는 인도와 해외에서 3천 명이 넘는 신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세 제자는 브라하마차리 요가다나다(사망 후), 구와하티의 마나벤드라(아삼), 칼리안 센굽타(현재는 캘커타 고등법원에서 개업하고 있다.

참고 문헌 목록

그는 벵골어로 다음과 같은 전기를 썼다.

  1. 요기라즈 스리 시야마 차란 라히리 마하사야
  2. 항사 스와미 케발라난다 마하라지
  3. 스와미 유테스와르 기리(재발견 – 스미티코나),
  4. 요가난다 상가 (내가 보고 이해한 바와 같이 파라한사 요가난다)
  5. 디비아지반 (Bengali 버전 그의 구루의 책자 The Holy Science)

참조

  1. ^ Yogananda, Paramahansa (1946). Autobiography of a Yogi. Yogoda Satsanga of India.
  • 사티아난다 스와미 요기 전기. 제2판. 산스크리트 고전, 2002년. ISBN 1-877854-26-3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