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구르드 존슨

Sigurd Jonsson
시구르드 존슨
Stjerne of Suðrheim coat of arms.jpg
시구르드 존슨의 국장(현대판 복제)
노르웨이의 섭정
재직중
1448–1449
선행자바이에른의 크리스토퍼
성공자샤를 1세
노르웨이의 섭정
재직중
1439–1442
모나크포메라니아의 에릭
성공자바이에른의 크리스토퍼
개인내역
태어난c. 1390
죽은1452–1454
국적노르웨이의
배우자필리파
아이들.한스 시거슨 (1466년 사망)
부모님
  • 존 마르틴손 (아버지)
  • 아그네스 시거즈도터(어머니)
친척들.아그네스 하콘스닷터(위대한 할머니)
알프 크누트손 (위대한 조카)
직업귀족, 기사, 봉건 영주, 정치가

시구르드 존슨(Sigurd Jonsson, 1390년대 ~ 1452년 12월)은 노르웨이의 귀족이자 기사였으며 15세기 중엽에 두 번의 빈민가 시절 노르웨이의 최고 지도자였다.[1]

배경

시구르드 존슨은 1390년과 1400년 사이에 태어났다.그는 스웨덴 귀족 존 마르틴손(1340–ca)의 아들이었다.1400) 및 아그네스 시거즈도터.아그네스는 노르웨이의 하콘 5세 왕의 증손녀로, 사생아인 아그네스 하콘스다터(1290–1319)와 하브토레 존슨(1275–1320)을 거쳐서였다.시구르드 존슨은 아그네스 하코나르도티르의 두 아들 중 한 명인 시구르드 하브토레손(115~1392)의 손자, 후계자였다.

시구르드가 태어났을 당시 존 마르틴손은 노르웨이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노르웨이 왕국 평의회(riksrådet) 소속이었다.시구르드는 오슬로 동쪽 수드림(현대 쇠룸)에 있는 가족 소유지에서 자랐다.그에게는 캐서린과 잉게보르라는 두 자매와 마그누스라는 형제가 있었지만 그의 형은 성숙기에 이르기 위해 살아남지 못했다.따라서 시구르드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또한 어머니의 친척들로부터 엄청난 토지 소유권을 물려받았다.

옛 노르웨이 왕가의 직계 후손인 시구르드는 노르웨이의 왕위 계승 후보로 거론됐다.시구르드는 포메라니아의 에릭 왕을 섬기고 있는 에베르슈타인의 한스 백작의 딸 필리파와 결혼했으며, 명백히 왕의 친척이었다.

경력

시구르드는 1434년 노르웨이 왕국 평의회(Rigsrsdet)[2]의 일원으로 처음 언급된다.1436년 아문드 시거슨 볼트가 이끄는 농민 반란이 에릭 왕과 신하들에게 반란을 일으켜 오슬로아커스후스 성을 포위하였다.아문트 시거드슨은 외스트폴드의 V vler에서 온 귀족 볼트 가문에 속했다.[3]노르웨이의 귀족들은 에릭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시구르드 존슨은 아문드 시거드슨과 휴전하는 것을 도왔다.1439년 9월, 에릭 왕은 시구르드 존슨에게 드로트테테라는 칭호를 주었고, 그 아래 그는 에릭 왕의 이름으로 노르웨이를 통치하게 되었다.[4]시구르드는 고틀란드비스보그에 있는 왕의 궁정에 있었고 동시에 에릭 왕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고 있었다.[5]

1440년 노르웨이 왕국 평의회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예를 따를 수밖에 없었고, 에릭 왕을 퇴위시켰다.그리하여 시구르드는 새로운 왕이 모색되는 동안 드로트테테처럼 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노르웨이는 덴마크와 스웨덴을 따라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퍼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함으로써 세 나라 사이의 연합을 유지했다.1442년 7월 2일 오슬로에서 크리스토퍼의 대관식이 끝난 후, 시구르드는 드로떼테의 칭호를 포기했다.크리스토퍼 재위 기간 동안 시구르드는 노르웨이 의회의 저명한 위원으로 남아 있었다.그는 1440년부터 1445년까지 아커스후스 요새의 사령관을 지냈으며, 크리스토퍼 왕 통치 기간 동안 노르웨이의 반한반체제 정책의 대표적인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그는 이 시기에 아마도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자였을 것이다.

1448년 1월, 크리스토퍼 왕은 갑자기 죽었다.시구르드는 다시 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같은 해 6월의 편지에서 그는 왕국의 수호자(리켄스 포스탠더레)로 일컬어진다.크리스토퍼 국왕의 서거 후 스웨덴과 덴마크는 다른 왕들을 선출했고, 노르웨이도 자국 국왕을 선출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하콘 5세의 직계 후손인 시구르드 존슨이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그러나 그 자신도 이러한 가능성을 사양하고, 대신 노르웨이의 새 왕으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세보다 무게를 두었다.크리스찬은 1449년 7월 스웨덴 국왕 찰스 8세를 상대로 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했고, 1450년 노르웨이의 왕위에 올랐다.시구르드는 1450년 8월 트론드하임에서 열린 기독교의 대관식과 베르겐에서 열린 노르웨이-대단 연합 조약 체결식에 참석했다.크리스찬 왕의 선출 이후 시구르드의 호칭은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을 법한 호칭인 "왕의 부재에 있는 국가대장"(리케츠 호베데스만 i콩엔스 프라브르)으로 바뀌었다.그는 1452년 12월에 보낸 편지에서 생전 마지막으로 언급되었으며, 아마도 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구르드 존슨이 죽었을 때 그의 외아들 한스 시거드슨은 노르웨이셰틀랜드에 있는 큰 땅을 물려받았다.잉게보르 에게스다터와 약혼한 한스는 1466년 미혼으로 세상을 떠났다.시구르드의 거장 알프 크누트손은 로메리케의 쇠룸 사유지와 순나모에르의 기스케 사유지를 물려받았다.알프 크누트손은 시구르드 존슨의 누이인 캐서린 욘스닷터의 손자였다.알브의 어머니는 아그네스 알브스다터였는데, 그는 캐서린과 알브 하랄드슨의 딸이었다.[6]


시구르드 존슨
출생:1390년대사망: 1452년 12월
섭정 직함
선행자노르웨이의 왕으로서 노르웨이의 섭정
1448–1449
성공자노르웨이의 왕으로서
선행자노르웨이의 왕으로서 노르웨이의 섭정
1439–1442
에릭 3세와 함께
성공자노르웨이의 왕으로서

참고 항목

참조

  1. ^ 에릭 오팔 시구르드 존슨 우디프닝(Norsk biografisk 렉시콘)
  2. ^ 졸업장 노르베기움
  3. ^ 1430년대 반란과의 연관성 (사우헤라드 역사학회)
  4. ^ 졸업장 노르베기움
  5. ^ Magne Njåstad. "Amund Sigurdsson Bolt, Opprørsleder, Biskop, Riksråd". Norsk biografisk leksikon. Retrieved November 25, 2015.
  6. ^ 셰틀랜드의 후기 중세의 귀족 토지소유자(프란스-아른 스티레거스 사이더 옴 노르디스크 아르케올로기)

원천

  • 함레, 라르스 노르스크 역사학 frå omlag år 1400 (Oslo, 196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