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토슬라프 수론자
Svetoslav Suronja스베토슬라프 수론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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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왕 | |
군림하다 | 997–1000 |
전임자 | 스티븐 드르지슬라프 |
후계자 | 크레시미르 3세 고즈슬라프 |
왕조 | 트르피미로비치(스베토슬라비치 지사 설립자) |
아버지 | 스티븐 드르지슬라프 |
종교 | 기독교 |
스베토슬라프 수론자(크로아티아어 발음: [sʋtoslaʋ sǔroɲa])는 997년부터 1000년까지 크로아티아의 왕이었다.트르피미로비치 왕조의 일원이었던 그는 자신의 금지령인 바르다의 도움으로 통치했다.디콘 요한(d. 1009)은 그를 "수린자"(라틴어: "수리냐")라고 불렀는데,[1] 그의 성미 때문인지 크로아티아 역사학에서 "어두운 사람" 또는 "냉정한 사람"이라는 뜻의 "수론자"로 채택되었다.[citation needed]그는 스티븐 드르지슬라프 왕의 장남으로, 이로부터 공작 칭호를 받았으며,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반란
스베토슬라프 대통령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의 형제인 크레시미르 3세와 고지슬라프는 스베토슬라프 대통령이 왕국에 대한 권력 공유를 거부하자 그에 대한 반란을 조직하기 시작했다.이들 형제는 불가리아 황제 사모일에게 비잔틴 제국과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원조를 요청했었다.전쟁에서 비잔틴인들은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온 베니스와 스베토슬라프 수론자의 지지를 받았다.사뮤일은 리볼버들의 초대를 받아들여 998년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 전쟁 중 마지막을 시작한 크로아티아를 공격했다.그는 광란의 질주로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전역을 자다르까지 끌고 갔고 그 후 보스니아를 거쳐 불가리아로 귀국했다.사모일은 자신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반란군 크레시미르와 고즈슬라프에게 주었다.이 새로 얻은 영토와 더 나아가 불가리아 원조를 이용하여 형제는 형 스베토슬라프 수론자를 타도하고 크로아티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베니스와의 전쟁
스베토슬라프의 통치는 달마티아 도시들에게 특히 불쾌했는데, 달마티아 도시들은 때때로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습격당하고 약탈당했기 때문이다.도시들은 999년 가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베네치아가 스스로 도시를 확보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과 협약을 맺도록 장려했다.[2]크로아티아군의 습격을 카수스 벨리(casus belli)로 삼고 베네치아 도게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Orseolo)는 1000년 달마티아에서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캠페인을 벌였다.지난 5월 크로아티아는 크레스, 로신지, 크르크, 랍섬을 도게에게 빼앗겼고, 도게 섬은 결국 자다르에서 접수돼 주인으로 인정받았다.스베토슬라프는 평화를 제의하는 사절을 그 도시에 보냈지만, 도게는 사양하고 그의 캠페인을 더 진행하기로 결정했다.여기서부터 파슈만 섬이 납치되었고, 협상과 함께, 바이오그라드 시가 납치되었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스테판 1세와 스테판 스베토슬라비치의 아버지였다.[3]그의 손자 디미타르 즈보니미르(Dmitar Zvonimir)는 후에 1074년 크로아티아 왕이 되었다.
참고 항목
각주
- ^ Sime Ljubić (1864). Pregled Hrvatske povíesti. Emidija Mohovića. pp. 23–.
- ^ 페르도 시시치, 포비제스트 흐르바타 우비제메 나로드니 블라다라, 1925, 자그레브 ISBN 86-401-0080-2
- ^ 1972년 1526년 이전 크로아티아 역사의 출처인 나다 클라이크
원천
- Intervju - ДИНАСТИЈЕ и владари јужнословенских народа.1989년 6월 16일 특별판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