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만 군
Taman Army타만군은 러시아 내전 당시 러시아 남부에서 활동한 적군 내 무장단체였다.1918년 8월 27일부터 1919년 2월까지 존재했다.그 이름은 군대가 형성된 타만 반도에서 유래되었다.
포메이션
타만군은 1918년 8월 27일 타만 반도의 겔렌지크에서 결성되었다.1918년 6월 볼셰비키 편을 선택하고 자신들의 배를 침몰시킨 노보로스시스크 출신 노동자와 흑해함대의 선원을 대부분 포함한 3만여 명의 선원을 헤아렸다.
타만 반도의 볼셰비키족이 고립된 것을 알게 되면서 육군은 결성되었는데, 그 이유는 독일의 개입주의 세력이 크림반도와 로스토프온돈(Rosstov-on-Don)을 빼앗았고, 데니킨 휘하의 백군은 그해 8월 16일 에카테리노다르에서 적군을 진지에서 쫓아냈기 때문이다.
이반 마트베예프는 육군 총사령관에 선출되었고, 그의 부관은 예피판 코브육, 참모장은 G.N. 바투린, 위원 N. K. 기차였다.
타만에서 투랍을 넘어 북캅카스까지 3열 종대로 진군하여 그곳의 적군 대열에 합류하기로 하였다.타만군은 2만5000여 명의 난민들이 대거 합류해 진전과 행동을 크게 방해했다.전술상의 어려움이 컸고 세 개의 칼럼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 번째 기둥은 맨셰비키 그루지야의 군대에 대항하여 길을 확보하는 선봉에 서 있었다.
두 번째 열은 협곡에 있는 하얀 코삭들의 공격을 격퇴했다.
세 번째 기둥은 데니킨의 군대에 대항한 후위대 전투를 이끌었다.
3월
8월 28일 첫 번째 기둥이 아퀴포오시포프카(Arkhipo-Osipovka), 9월 1일 투아프(Tuapse)를 점령하고, 그루지야 보병 사단을 격파하여 무장과 물자를 포획했다.9월 2일, 육군은 카디젠스크 근방의 코카서스의 주요 산맥에 도달했는데, 그곳에서 백인 장군 빅토르 포크로프스키의 군대와 프셰즈카야 근방의 공격을 다시 격퇴했다.
9월 12일 첫 번째 칼럼이 벨로레첸스크를 점령했다.9월 14일 2열과 3열로 재편성된 후 벨로레첸스크 북쪽의 백색 방어선이 공격을 받아 9월 18일 북부 코카서스의 적군 부대가 발견된 돈두코프스카야에 도달했다.
11군단과 병합
타만군은 이반 소로킨이 지휘하는 북캅카스 적군에 추가되었다.그들은 의용군에 맞서 함께 싸웠고 9월 26일 첫 번째 칼럼이 아르마비르를 사로잡았다.
곧 이반 마트베예프 사령관과 이반 소로킨 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마트베예프는 소로킨에 의해 직책에서 강등되었고 10월 8일 피아티고르스크에서 전법재판소에서 총격을 받았다.
타만군의 3개 기단은 2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 1개 여단의 포병대로 재편되었다.10~11월, 타만군은 스타브로폴을 둘러싼 끈질긴 전투에 참가했다.12월 3일, 육군은 RSFSR의 적색 명예혁명 깃발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군의 유해를 제3차 타만 소총 사단으로 개편하였는데, 북카프카스 작전(1918~1919) 중 적군의 상급 부대가 아스트라크한 지역으로 후퇴하여 해체되었다.
지휘관
- 이반 마트베예프 (1918년 8월 27일 ~ 1918년 10월 8일)
- 예피판 코브티우크(12.10.1918 – 1918년 10월 22일)
- M.V. 스미르노프 (1918년 10월 23일 ~ 1918년 12월 13일)
문학에서.
적군 백인들에 의해 포위된 채 탈출한 타만군의 행진은 알렉산더 세라피모비치의 소설 <철의 홍수>(1924년)에서 낭만화되었다.[1][2]
참조
원천
- 대소련 백과사전 타만군의 행진
- G. N. 바투린, 크라스나야 타만스카야 아르미야.크라스노다르, 1940년
- V. T. 수조루코프, XI 아르미야브 보이야즈 나 세베르놈 카브카제 이 니즈네이 볼그.1961년 모스크바.
- V. P. 고로프, 게로이체스키 포조드.모스크바, 1967년 2부.
-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 젤레즈니 포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