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엔충친
Tien Chung-chin티엔충친 | |
---|---|
田炯錦 | |
![]() 국회의원 티엔(1946년) | |
사법원 총재 | |
재직중 1971년 12월 1일 – 1977년 3월 30일 | |
부통령 | 시잉저우 시 타이옌후이 |
선행자 | 시관성 |
성공자 | 타이옌후이 |
내무부 장관 | |
재직중 1958년 3월 27일 – 1960년 5월 31일 | |
선행자 | 왕데푸 |
성공자 | 롄첸퉁 |
몽골 티베트 문제 위원회 장관 | |
재직중 1960년 5월 30일 – 1963년 12월 14일 | |
선행자 | 이영신 |
성공자 | 궈치차오 |
재직중 1951년 2월 22일 – 1954년 5월 25일 | |
선행자 | 유칭탕 |
성공자 | 류롄케 |
시험부 장관 | |
재직중 1948년 7월 13일 – 1950년 5월 | |
선행자 | 사무실 설립 |
성공자 | 마궈린(연기) 시상관 |
개인내역 | |
태어난 | 1899 중국 칭청 현 |
죽은 | 타이완의 타이베이 | 1977년 3월 30일 (77-78세)
국적 | 중화민국 |
정당 | 궈민탕 |
모교 | 북경대학교 일리노이 대학교 |
티엔충친(티엔충친)은 중국 태생의 정치인이다.그의 정치 경력은 1931년 통제원에 임명되면서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그 후 1946년 [zh 에 선출되었고, 1948년 검시관이 되었다.티엔은 중화민국 정부가 1950년까지 대만으로 후퇴하는 동안 그 역할을 유지했다.1951년 몽골 및 티베트 문제 위원회 장관으로 처음 취임하여 1954년까지 남아 있었다.이후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내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1963년까지 몽골 및 티베트 문제 위원회에 복귀하였다.1977년 사법원 주석직에서 사망하였고, 1971년 이후 사법원 주석직을 수행하였다.
경력
티엔충친은 1899년에 태어났으며 예명 옌칭(중국어::青)[1]으로 알려져 있다.칭청 현 출신으로 북경대학교에 다녔으며, 그곳에서 5월 4일 운동에 참여하였다.1923년 졸업 직후, 티엔은 미국에서 고급 공부를 시작했다.1925년부터 티엔은 워싱턴 대학교에 입학한 뒤 미주리 대학교로 편입한 뒤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티엔은 1930년 동북대학교 교수진에 합류하여 중국으로 돌아왔다.1931년 2월, 티엔은 통제원에 임명되었다.1936년 1월 간쑤 성 교육부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시안 사건 이후 톈은 산시 성 의장으로 추대되었다.그는 1938년에 통제원 연임을 시작했다.[1][2]동시에 티엔은 란저우 대학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2]1946년 11월, 국민투표[1]에 선출되었다.티엔은 간쑤와 산시에 대한 감독도 포함하는 통제원(중화 민국 감찰원)직책을 유지했다.[2]1948년 7월 13일, 티엔은 초대 시험부 장관에 취임했다.[3]
티엔은 1949년에 대만으로 떠났다.[1]1951년부터 1954년까지 몽골과 티베트 문제 위원회를 이끌었다.1958년 티엔은 왕 데푸의 뒤를 이어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하였다.1960년 내무부에서 물러난 티엔은 1963년까지 몽골과 티베트 문제 위원회에서 두 번째로 활동했다.1971년, 시관성의 뒤를 이어 사법원 주석으로 지명되었다.티엔은 1977년 3월 30일 타이베이에서 사망할 때까지 집무실을 지켰다.[2]
참조
- ^ a b c d 左双文,九一八事变后的《国民外交杂志》及其政治主张,史学月刊2007年第3期 Archived 2013-11-10 at the Wayback Machine
- ^ a b c d 田炯锦,华夏经纬网,2003-07-17
- ^ 刘寿林等编,民国职官年表,北京:中华书局,1995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