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가루 노부요시

Tsugaru Nobuyoshi
쓰가루 노부요시
津軽信義
Tsugaru Nobuyoshi.jpg
쓰가루 노부요시
태어난(1619-02-15)1619년 2월 15일
죽은1655년 12월 22일 (1655-12-22) (36세)
일본 에도
국적일본인입니다
직업히로사키 번 다이묘 (1631–1655)
전임자쓰가루 노부히라
후계자쓰가루 노부마사
부모님

쓰가루 노부요시(쓰가루 노부요시, 1619년 2월 15일 ~ 1655년 12월 22일)일본 혼슈시 무쓰 성 북부 히로사키 번( 아오모리 현)의 제3대 다이묘였다. 그의 예의 직함은 토사노카미(土士野ami)이고, 궁정 등급은 하급 5급 주니어였다.

전기

쓰가루 노부요시는 히로사키 번 2대 다이묘쓰가루 노부히라의 장남으로 고즈케 국에 위치한 도메인의 엑클라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타츠히메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딸로, 노부히라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도쿠가와 막부와 맞닿아 지위를 확보하자 으로 강등되고 고즈케로 유배되었다. 그는 모친의 죽음으로 1623년 에도 막부로 끌려갔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는 아직 13세였고, 영주에 즉위할 때 동생 쓰가루 노부후사와 함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앞에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후궁의 아들로 지위는 도쿠가와와의 혈연관계로 인해 쓰가루 노부후사를 지지하는 큰 파벌과 노부히라의 관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쓰가루 번(쓰가루 번)의 원로 가신들의 대열이 갈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1634년 후나하시 소도로 알려진 오이에 소도(小道)가 생겨났는데,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도움으로 진압되었을 뿐이며, 1636년 다수의 노부후사 지지자들을 유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647년 쇼호 소도라고 불리던 것에서 문제가 다시 발생하였는데, 노부후사의 나머지 지지자들은 노부요시가 과도한 음주와 여성화를 통한 실정을 주장하며 그의 이복동생을 위해 은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노부요시는 많은 후궁들을 통해 25남 26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새로운 논밭과 관개, 구리와 은광산을 개발함으로써 자신의 영역에서 생산을 늘리는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갔다. 그는 와카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노부요시는 1655년 12월 22일 에도시대 칸다의 씨족 저택에서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묘소는 도쿄세타가야 구 묘주지의 절과 히로사키 시 조쇼지와 호온지의 쓰가루 씨족 절에 있다. 그의 선임 신하들 중 네 이 준시를 범함으로써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노부히라는 장남 쓰가루 노부마사의 뒤를 이었다.

참고 항목

참조

선행자 일본마루 투가루 보탄.svg 히로사키 다이묘 3세
1631–1655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