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J. 워스
William J. Worth윌리엄 J. 워스 | |
---|---|
출생명 | 윌리엄 젠킨스 워스 |
태어난 | 뉴욕 허드슨 | )1794년 3월 1일
죽은 | 1849년 5월 7일 샌안토니오, 텍사스 주 | (55세)
얼리전스 | 미국 |
서비스/지점 | 미국 육군 |
근속년수 | 1813–1849 |
순위 | 대령 브레벳 메이저 제너럴 |
보유된 명령 | 8 보병 연대 |
전투/와이어 | / 조지 요새 전투 / 몬테레이 전투 |
윌리엄 젠킨스 워스(William Jenkins Worth, 1794년 3월 1일 ~ 1849년 5월 7일)는 1812년 전쟁, 제2차 세미놀 전쟁, 멕시코-미국 전쟁 때의 미군 장교였다.
초기 군생활
워스는 1813년 3월 중위로 임관되어 전쟁 중 윈필드 스콧(당시 준장)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며 그와 친분을 쌓았다.[1] 그는 나중에 그의 아들의 이름을 윈필드 스콧 워스라고 지었다. 그는 나이아가라 선거 운동 중 치페와 룬디 레인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후기 전투에서 허벅지에 있는 그래핀셋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 그는 살아남을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았지만 1년 동안 감금된 후, 비록 그는 여생 동안 절름발이로 남아있겠지만, 소령이라는 계급이 약화된 상태로 나타났다. 또한 워스 소령이 지금 웨스트포인트의 "버글 노트"에 새겨진 그의 가장 유명한 단어인 "버글 노트"를 발표하면서, 모든 생도들은 반드시 마음으로 알아야 할 지식의 책이다. 다음과 같다.
그러나 당직 장교는 아무도 모른다. 편파적이라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부당한 호의의 대상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을 망신시키는 친구들을 비난하는 그는 어떻게 생각될까? 한 곳에서 죄를 눈짓하고 눈감아 주는 그를 보고, 또 다른 데서 벌을 받게 하는 것을 보고, 때로는 사사로운 감정과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융통성 없는 군인과 대조해 보라. 한 사람의 행위는 존경받고 모방될 것이며, 다른 한 사람은 군인과 명예에 대한 풍자로 혐오될 것이다.
— Brevet Major William Jenkins Worth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웨스트포인트 사관생도 특공대장이었으며 새로 창설된 8보병 연대를 지휘하게 되면 1838년 대령 계급에 오르곤 했다. 그는 자신의 전술을 사용하여 플로리다에서 있었던 제2차 세미놀 전쟁을 성공적으로 기소했고 1842년에 브레베트 준장이 되었다. 결국, 그는 전쟁 장관 존 C를 설득했다. 스펜서는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인디언들이 플로리다 남서부의 비공식적 보호구역에 국한되도록 허용했고, 그해 8월 공식적으로 종전선언을 했다.[2]
멕시코-미국 전쟁
멕시코-미국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워스는 텍사스의 자커리 테일러 밑에서 복무하고 있었고 멕시코 도시 마타모로스의 항복을 협상하고 있었다. 그는 그 다음 1846년 9월 몬테레이 전투에서 점령군 제2정규사단을 지휘했고, 이후 그는 소장으로 파견되었다.[3] 1847년 워스는 옛 친구 윈필드 스콧의 군대로 전출되어 1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베라크루즈 공성전에 참가하여 세로 고르도, 콘트레라스, 추루부스코 등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멕시코 시티에서 스콧은 몰리노 델 레이의 멕시코 작품들을 압수할 것을 워스에게 명령했다. 워스와 스콧의 우정은 스콧이 워스의 공격 수정을 허락하지 않자 절정에 달했고, 이 전투로 1사단의 심각한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워스는 크게 실망했다. 워치는 나중에 그의 아들 윈필드 스콧을 윌리엄으로 개명했다. 그는 다음으로 멕시코시티의 산 코스메 게이트에 대항하여 사단을 이끌었다. 미군이 멕시코시티에 진입하자 워스는 직접 국립궁전 지붕에 올라가 성조기로 대체하는 멕시코 국기를 철거했다.
차풀테펙 전투에서의 그의 공로로, 미국 의회는 그에게 명예의 칼을 수여했다.
1847년 워스는 1847년 아즈텍 클럽의 오리지널 회원이 되었고, 신시내티 뉴욕 협회의 명예 회원으로 인정받았다.
전후의 복무와 죽음
1848년 워스는 쿠바의 스페인 식민지 정부의 전복을 주창했던 설탕 재배지 소유주와 귀족들로 구성된 쿠바 프리메이슨 클럽으로 알려진 단체로부터 접근받았다. 아바나 클럽은 대학 교수 암브로시오 호세 곤잘레스를 보내 워스가 쿠바 침공을 주도하도록 간청했다. 워드도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을 안 곤잘레스는 전쟁영웅을 메소닉 비밀 악수로 맞이했고, 이후 그에게 300만 달러를 제안해 쿠바에서 벌어진 스페인과의 멕시코-미국전쟁의 미국 참전용사 5천명의 침략군을 지휘하게 했다. 그 제안을 받아 들일 만도 했지만, 음모가 결론나기 전에 그는 전쟁부에 의해 텍사스로 이송되었다.[4]
그는 1849년 샌안토니오에서 콜레라로 사망했을 때 텍사스 주(州)를 지휘하고 있었다.
워스 스퀘어
워스의 유해는 뉴욕시 맨해튼 자치구 25번가에 있는 5번가와 브로드웨이 사이의 교통섬 워스 스퀘어에 있는 51피트 높이의 화강암 기념비에서 재해석되었다. 워스 기념비는 뉴욕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기념물이다. 이 기념비는 제임스 G. 타우슨이 1857년에 설계하고 지었다.[5] 비석의 중앙 장식 띠에는 워스의 경력에 중요한 전투 장소가 새겨져 있으며, 전면에 워드의 청동 승마 구조물이 붙어 있다. 기념관을 둘러싸고 있는 주철 울타리의 스파이크마다 매실 헬멧이 씌워져 있고, 기념관에는 매실 헬멧 워스를 비추는 모습이 보인다. 미국의 화가 토마스 하트 벤튼은 20대 초반의 뉴욕에서 오벨리스크를 묘사했다. 북쪽 담장은 1940년경 비석 아래에 있는 급수계통 파이프를 수리하는 지상 공공 시설 창고를 수용하기 위해 제거되었다.
레거시
텍사스 주의 포트워스와 레이크워스, 켄터키 주의 일리노이 주의 워스 마을과 워스빌의 마을,[6] 조지아, 미주리, 아이오와 주의 워스 카운티들이 모두 그를 기리기 위해 이름 지어졌다.[7] 플로리다에서는 Lake Worth Launge, Lake Worth Beach의 도시, Palm Beach에 있는 Worth Avenue의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8] 게다가, 뉴욕시의 Lower Manhattan 구역에 있는 Worth Street는 그의 명예를 위해 이름이 지어졌다.
참고 항목
참조
- ^ 아르빈 W. 터너. 텍사스 온라인 안내서 윌리엄 젠킨스
- ^ 마혼: 315–316
- ^ 월리스, 에드워드 S. 윌리엄 젠킨스 워스 장군: 몬테레이의 잊혀진 영웅 댈러스: 1953년 서던 감리교 대학 출판부
- ^ 제퍼스, H. 폴. 미국의 프리메이슨: 비밀 협회의 내부. 뉴욕, 뉴욕: 시타델 프레스, 2006년 ISBN978-0-8065-2836-6
- ^ 고 윌리엄 젠킨스 워스 미국 육군 소장 기념비 건립에 관한 보고서 뉴욕: C.W. 베이커, 프린터, 1857년
- ^ Lewis Collins (1877). History of Kentucky. p. 118. ISBN 9780722249208.
- ^ 에드워드 S. 월리스, 윌리엄 젠킨스 워스 장군과 텍사스, 사우스웨스트 역사 분기별, 1950년 10월 54권.
- ^ Kleinberg, Eliott. "Lake, Town Named After U.S. Army Col. W.J. Worth". Historic Palm Beach Count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7 September 2013. Retrieved 24 September 2013.
추가 읽기
- 마혼, 존 K. 제2차 세미놀 전쟁의 역사, 1835년-1842년 개정판. 게인즈빌: 1985년 플로리다 대학 출판부
- 월리스, 에드워드 S. 몬테레이의 잊혀진 영웅 윌리엄 젠킨스 워스 장군. 댈러스: 1953년 서던 감리교 대학 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