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유리

Yury of Moscow
모스크바의 유리

유리 다닐로비치(러시아어: Georgiy Danilovich, 1281년 ~ 1325년 11월 21일)는 모스크바 대공(1303년 ~ 1325년)이자 블라디미르 대공(1318년)이다.

유리는 모스크바의 첫 번째 왕자 다니엘의 장남이었다.그의 첫 공식 행동은 앤드루 3세 대공으로부터 페레슬라블 잘레스키를 방어하는 것이었다.다음해 앤드류가 죽자 유리는 블라디미르 대공의 칭호를 트베르의 미하일과 다투어야 했다.트베리아군이 페레슬라블과 모스크바를 포위하는 동안 미하일은 황금 호드로 갔고, 그곳에서 칸은 그를 러시아 왕자 중 최고 지위로 승진시켰다.

한편, 유리는 랴잔의 콘스탄틴 왕자를 살해하도록 주선했다.이 불운한 통치자는 1302년 유리의 아버지에게 붙잡혀 모스크바에 투옥되었다.랴잔이 그러한 야만성에 충격을 받은 반면, 유리는 랴잔의 핵심 요새인 콜롬나를 모스크바 공국에 합병시켰다.그는 또한 이전에 스몰렌스크 왕자들의 소유였던 모즈하스크를 점령했다.1314년 유리는 수도원 베드로의 지지를 얻어 트베르에 맞서 노브고로드와 동맹을 맺었다.이제 그는 호드에서 트베르의 미하일에 도전할 만큼 강하다고 느꼈다.

1315년 유리는 황금 호드로 가서 그곳에서 2년을 보낸 후 우즈벡 칸과 동맹을 맺었다.유리가 칸의 여동생 콘차카와 결혼하자, 우즈베그 칸은 미하일을 폐위시키고 유리를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임명했다.몽골군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돌아온 유리는 트베르에게 접근했다.하지만 유리의 군대는 패배했고 그의 동생 보리스와 그의 아내는 포로로 잡혔다.그 후 그는 노브고로드로 도망쳐 평화를 요구했다.당시 Tver에 인질로 잡혀있던 그의 아내는 뜻하지 않게 죽었다.유리는 뒤이은 혼란을 틈타 자신이 미하일의 명령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칸에게 알렸다.칸은 두 왕자를 모두 사라이로 불러들여 재판 끝에 미하일을 처형했다.

유리는 1319년에 다른 왕자들과 대중들에게 모두 미움을 받으며 러시아로 돌아왔다.그는 이제 호드에 대한 러시아 공물을 모으는 임무를 맡았다.그러나 미하일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드미트리끔찍한 눈은 여전히 그를 반대했다.1322년, 드미트리는 아버지의 살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사라이로 가서 유리가 호드에 대한 공물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고 칸을 설득했다.유리는 재판을 받기 위해 호드로 소환되었지만, 공식적인 조사가 있기 전에 드미트리에 의해 살해되었다.8개월 후 드미트리도 [1]호드에서 처형되었다.

죽기 직전에 유리는 노브고로드의 군대를 이끌고 스웨덴과 싸웠고 네바 강 어귀에 요새를 세웠다.1323년 오르케호보 조약에 조인한 유리는 동쪽으로 계속 나아가 같은 해 벨리키 우스티우그를 정복했다.

「 」를 참조해 주세요.

레퍼런스

  1. ^ 존 페넬, "호드의 왕자 처형 1308-1339", Forschungen Zur Osteuropaischen Geschichte 38 (1988), 9-19.
직함
선행 모스크바의 왕자
1303–1325
에 의해 성공자
선행 블라드미르 대공
1318–1322
에 의해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