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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토론:112.162.12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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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2년 전 (112.162.124.245님) - 주제: 차단 재검토 요청

표제어 변경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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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62.124.245 님께서 기여하신 갈산중학교 문서는 인천광역시 부평구 갈산동에도 갈산중학교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표제어를 갈산중학교 (홍성)으로 변경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Jihs7507 (토론) 2012년 4월 6일 (금) 20:50 (KST)답변

저작권이 있는 문서를 베껴오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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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가 생성한 김경손 (군인) 문서는 [1]를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판단되어 해당 내용을 제거하고, 귀하가 편집한 해당 문서의 판을 모두 삭제 신청하였습니다.

백:저작권을 참고하여 주세요. 저작권이 있는 글 및 사진 등을 가져오는 것은 위키백과의 정책에 위배되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이러한 편집을 반복할 경우 귀하의 계정이 차단될 수 있습니다. --소심자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20:34 (KST)답변

그렇다면 내용이 동일한 세 곳 중 어떤 곳에서 내용을 가져오신 것이 아닌지요. 귀하가 직접 여러가지를 참고하여 편집하셨다고 하기에, 그리고 아무리 위 3가지 사이트가 똑같이 고려사를 출처로 했다고 해도, 문장 구성이나 세부 표현까지 100% 똑같을 수가 있을까요?.--소심자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20:41 (KST)답변
링크해주신 주소는 방문한적이 없고. 김경손 경우는 두산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역대인물정보 세사이트 모두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출처로 인용된 내용인데요 전 백과사전 내용만 본게 아니라 호국인물 선정이나 김경손 장군을 다룬 기사들이나 이거저거 다룬 자료는 모두 참고해서 적었습니다. 베꼈으면 컨트롤 C+V를 했겠지요.--112.162.124.245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20:48 (KST)답변
저는 호국인물 선정 문단에 대해서가 아니라, '생애' 문단에 대해 저작권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귀하가 가장 마지막으로 편집한 판[2][3]를 비교해 보세요. 고려사는 한문이고, 한문은 번역자에 따라 세부적인 표현이나 조사에서는 으레 차이가 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완전히 같습니다. 굳이 네이트 한국학이 아니더라도, 해당 문서(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내용을 사용중인 타 사이트 문서)를 출처로 하는 어떠한 웹 문서를 가져왔다고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 됐던간에, 해당 내용은 엄밀히 '한국학중앙연구원 All rights reserved.'에서 보시는 것처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저작권이 있으므로, 내용을 제거해야 합니다.--소심자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20:52 (KST)답변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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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저작권이 다른 곳에 있는 글을 다시 위키백과에 올리고, 해당 내용 삭제를 위한 틀을 무단으로 제거하는 행위는 엄연한 문서 훼손 행위입니다. 경고입니다.--소심자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20:55 (KST)답변

침착하시고, 잘 살펴보세요. 다른 곳에서 완전히 일치하는 표현의 웹페이지가 발견되고, 또 그에 대한 저작권이 엄연히 다른 기관으로 기재되어있는 이상, 해당 내용은 위키백과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백:저작권을 읽어주세요. 그리고 이것은 위키백과의 질적 향상 및 신뢰도, 위키백과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위키백과가 법적 문제에 휘말리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귀하의 너른 양해 바랍니다.--소심자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21:01 (KST)답변
님의 고견 잘새겨듣겠습니다.--112.162.124.245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21:50 (KST)답변
이해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소심자 (토론) 2012년 4월 17일 (화) 07:27 (KST)답변

죄송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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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되돌리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소심자 (토론) 2012년 4월 18일 (수) 21:00 (KST)답변

이 당시에는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이라는 새로운 청년단체가 이정재 단체 후신 활동을 했는데요. 이정재는 이기붕하고 이천 선거구 마찰로 은퇴하고 임화수가 자리를 이어받고 대한반공청년단에 편입됐는데 4.18 고대생 의거 자료는 유지광이 이끄는 폭력단 이내용은 4.18 의거가 잘 알려지지않았을 초창기때 내용이고 낙화유수 김태련은 장충단 집회방해사건은 자유당 민심이 완전 잃은 시발점이 된 사건인데 밀가루포대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앞뒤가 맞지않는 회고하면서 신빙성이 없는 말만 하던 인물입니다.--112.162.124.245 (토론) 2012년 4월 18일 (수) 21:11 (KST)답변
그렇다면 편집 요약에 그러한 내용을 적어주셔야 다른 사용자들의 내용의 대량 삭제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습니다. 자칫 문서 훼손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귀하의 내용에 대해 일정한 출처도 필요할 듯 합니다.--소심자 (토론) 2012년 4월 19일 (목) 07:11 (KST)답변


원균문서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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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문서에서 대량의 내용을 삭제하셨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61.102.85.45 (토론) 2012년 6월 29일 (금) 01:40 (KST)답변

차단 재검토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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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62.124.245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09:24 (KST)답변

박정희 문서는 사용자:112.162.124.245님께서 기존 문서 내용을 대량으로 훼손하였기에 되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 사용자토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고, 문서 훼손을 거듭하였기에 문서 편집을 제한한 것입니다. -- 리듬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09:33 (KST)답변
여러차례 경고 받은게 아니라 소심자 님과 토론인데요. 그 부분은 저작권 부분이고 해결된 토론입니다. 이유가 되지않습니다. 박정희 문서 해당 내용을 제거한거 안기부 등에게 공산주의자 의혹받은 김대중 문서도 분류에 공산주의자 없기에 원용덕의 당시 위치를 볼 때 삭제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해서 한건데요. 문제가 있다면 의견을 주셔야 하는게 위키백과의 기본 지침이 아닙니까? 토론에는 물론 편집 요약에도 의견 없이 편집 3회만에 거듭된 지적에도 불구하고 훼손이라뇨? 더구나 위키백과:차단에 보면 관리자와 분쟁된 경우 차단할 수 없다고 나와있네요.--112.162.124.245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09:39 (KST)답변
문서 서술에 관하여 저와 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용자:112.162.124.245님께서 박정희 문서를 일부 수정한 정도가 아니라 문서 내용을 대량으로 삭제하였기에 문서 훼손으로 판단하였을 뿐입니다. 문서 훼손이라 판단하여 되돌리기를 했기에 편집 요약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 리듬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09:51 (KST)답변
박정희 문서에 본인이 다른 사용자과 분쟁 발생되지않았는데 편집에 문제가 있으면 토론에 의견을 주셔야죠. 대량 내용이 바뀌면 훼손이라는 사유는 어디에 명시되어 있는거죠? 그리고 리듬 님이 언제 거듭된 지적을 해주셨나요? 해당 편집이 출처 없이 독단으로 한것도 아니고 엄연히 출처를 이용해서 편집했는데 문제가 있으면 토론을 거쳐서 문서가 완성이 되는게 아닙니까? --112.162.124.245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09:55 (KST)답변
문서 관리는 '사용자들 사이의 문서 분쟁'이 발생한 경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도 밝혔듯이 문서 훼손으로 판단했기에 되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언제 '거듭된 지적'이라는 말을 했죠? 앞의 토론글에 밝혔듯이 ‘이곳 사용자토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고’라고 했습니다. 사용자:112.162.124.245님의 말씀처럼 '문제가 있으면 토론을 거쳐서 문서'를 완성해야지, 왜 이렇게 문서 내용을 대량으로 삭제하셨는지요? -- 리듬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10:17 (KST)답변
박정희 공산주의자 의혹은 자료 검색할 때 제5대 대선부터 자료가 나와서 그렇게 편집을 한것이고 삭제는 위에도 언급한거처럼 안기부 등에게 의혹받은 김대중 문서 공산주의자 분류, 원용덕의 당시 위치를 볼 때 문제가 없다는 판단/누군가 의견을 제시할 때 그때 토론을 거치면 될거 같다는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제 편집 차단 사유에 "거듭된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문서를 훼손하였습니다."라고 명시되어 있는데요. 제가 경고받은 부분은 소심자 님에게 저작권 위반 관련으로 해당 토론은 해결된 토론이고 해당 토론과 박정희 문서 편집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보이는데요 연좌제인가요? 연좌제라기에도 분야도 다른데요.--112.162.124.245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10:27 (KST)답변
'편집 차단 사유'에 그렇게 적혀 있나요? 사용자 차단 틀에 적혀 있는 '차단 사유' 외에 제가 추가로 적은 내용인 것 같군요. 님의 글을 읽고, 관리자에게 보이는 '차단 기록' 도 읽어 봤는 데 '문서 훼손'이라는 글만 적혀 있어서 제가 착각했나 보군요. (제가) '거듭된 지적'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토론)에 있는 것처럼 여러 차례 경고가 있었다는 의미였습니다. 사용자:112.162.124.245님의 해당 문서 편집을 다시 읽어 봐도, 문서 훼손으로 볼 여지가 많다고 봅니다. 문서 '도입부'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입당 내용을 삭제하였고(남로당 입당 사실까지 부인하는 것인가요?), '공산주의 활동' 섹션 등 여러 문단을 통채로 들어 냈습니다. 그것은 님의 주장과는 달리 '함께 공동 지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만으로 백과사전을 채우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의견을 제시할 때 그때 토론을 거치면 될거 같다는 판단했다'라고 하셨으니까, 앞으로는 논란이 있는 항목에 대해 토론을 통해 문서 편집을 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이번 차단은 해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또다시 이전과 같은 행동을 보이시면, 문서 편집이 제한될 수 있음을 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리듬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12:12 (KST)답변
"'편집 차단 사유'에 그렇게 적혀 있나요? 사용자 차단 틀에 적혀 있는 '차단 사유' 외에 제가 추가로 적은 내용인 것 같군요. 님의 글을 읽고, 관리자에게 보이는 '차단 기록' 도 읽어 봤는 데 '문서 훼손'이라는 글만 적혀 있어서 제가 착각했나 보군요" 관리자는 신중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습니다. 위에도 재차 언급한 거처럼 문제가 있으면 관리자님이든 어느 사용자이든 의견 제시로 토론을 거쳐서 해결되는게 위키백과의 기본지침인데 독단적으로 편집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어느 사용자와 분쟁이 발생한것도 아닌데 단 편집 3회만에 훼손자로 1주일 차단이 됩니까? 사유도 "거듭된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문서를 훼손하였습니다"라는 부분도 착각이라고 말씀하시니 당황스럽고 유감을 표합니다.--112.162.124.245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14:22 (KST)답변
그리고 이곳에서 말씀하신 공산주의 내용 보면
  1.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에 입당했다.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다음으로 이 이력은 그가 해방 후 남로당원으로서 여수·순천 항명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동료들의 이름을 대고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을 누락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가 자기의 보신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불사할 수 있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임을 알게 해 준다. 뒤에 이어서 내용 결국 이 기록은 그가 제국 군인으로서 친일파였다는 점과 공산주의자로서 이른바 '좌빨'이었다는 점을 은폐한 것이다. 그런데 이 행사의 주체는 행정안전부의 국가기록원이다. 국가기록에 객관성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이미 '기록'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1. 이때 군부내 김창룡 등 숙군사업을 지휘한 사람들이나 백선엽, 원용덕 등 만주군 선배들은 박정희가 좌익 명단을 전부 상부에 보고했고, 군대 측에서 박정희를 데리고 다니며 각 부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했기 때문에 좌익들이 박정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를 살려주기로 마음먹는다. 그 이후, 그는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였다고 한다.[1]
  2.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정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2]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해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사상공세를 하기도 했다.[2]
  3. 분류 동학농민운동 남로당

->박정희 문서 어디에도 동학농민운동 내용도 없네요. 남로당은 말그대로 의혹이고

공산주의자들 문서 내용을 살펴보면 다 중복이고, "이때 군부내 김창룡 등 숙군사업을 지휘한 사람들이나 백선엽, 원용덕 등 만주군 선배들은 박정희가 좌익 명단을 전부 상부에 보고했고, 군대 측에서 박정희를 데리고 다니며 각 부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했기 때문에 좌익들이 박정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를 살려주기로 마음먹는다" 등 원용덕이 5대 대선에서 사상의혹 논란때 원용덕이 윤보선, 송요찬이 주장한 여순사건은 김창룡이 장본인이라고 말하는 등에 반론한 기사를 링크한건데요. 강원룡 부분은 인용 부분을 보면 1963년 자료 링크가 많이 있으니 문제없다고 판단한것이고요. 제가 원용덕 자료 등 출처 함께 사용한건데 문제가 있으면 토론에서 토론을 거치면 되는데 아무런 토론도 분쟁도 겪지않았는데 3회만에 1주일 차단되면서 "거듭된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문서를 훼손하였습니다." 사유로 하면서 이 사유도 착각이라고 하시는것에 이해가 안되네요.--112.162.124.245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14:49 (KST)답변

그리고 브리태니커. 한국역대인물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과사전들도 위처럼 소개되어있지않고 사상의혹 사건이라고 소개되어있기도 하네요. 최소한 브리태니커,한국역대인물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한겨레,오마이뉴스보다는 저명하다고 판단되는데요.--112.162.124.245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14:52 (KST)답변
위키백과:편집은 과감하게 지침문서도 과감하게 편집하면 다른사용자도 마찬가지로 과감하게 편집한다고 명시되어있네요. 그리고 [6],[7],[8] 이런거 위키백과:좋은 뜻으로 보기인가요?

--112.162.124.245 (토론) 2012년 7월 8일 (일) 15:20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