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유명한 (기업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명한(柳明韓, 1908년 1월 8일~1951년 6월 8일)은 일제강점기의 기업인으로, 본관은 진주이며, 평안남도 평양부 출신이다. 유한양행과 라초이를 설립한 기업가 유일한의 동생이자, 유한산업(현 유유제약)을 3형제가 공동 설립한 유동한과 유특한의 형이다.

유명한(柳明韓, 1908년 1월 8일 - 1951년 6월 8일)은 일제강점기의 기업가이다. 본관은 진주이며, 평안남도 평양부 출신이다. 유한양행과 라초이를 설립한 기업가 유일한의 13살 아래 동생이자, 유유제약 사장을 역임한 유특한의 11살 위 형이다.

[편집]

가족사와 그의 생애

[편집]

1908년 1월 8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 1861-1934. 8. 28)과 충주 김씨(忠州 金氏) 김확실(金確實, 1873. 5. 22 -1958. 10. 4) 사이의 6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편집]

유기연은 일찍이 외국문물과 개화사상이 널리 퍼져 있던 평양으로 이주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몸소 상투 단발을 단행하는 등 소위 개안인사가 되었다 [출처: 유승흠 저 “유일한 정신의 행로”].

[편집]

평양에 도착하자 주로 중국 상인들과 거래를 하면서 세계적 브랜드인 싱어(Singer) 재봉틀 평양대리점과 견직물 공장 등을 경영하였다. 동시에 그는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참여하며 서북지역 재정 책임도 맡았다. 경술국치 이전부터 유기연은 장녀를 통해 독립자금을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하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바, 1910년 이후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심해지자 가족과 함께 북간도 연길로 망명하였다.

[편집]

유기연은 연길에서도 이동녕 등과 교류하면서 훗날 윤동주 문익환 [출처: 한겨레신문 문동환 인터뷰]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동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명동학교의 중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정재면을 간도 정착 초기부터 지원함으로써 명동학교의 설립 자체에도 큰 공로가 있었다 [출처: 윤병석 “명동촌과 명동학교”, 도올의 “유일한과 명동학교”]. 1915년에는 당시 노령과 만주의 독립운동자들이 중국인들과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 장종휘(張宗輝)에 의해 간도 국자가에 만들어진 만국개량회(萬國改良會)에 최운산, 이동휘, 정재면, 권사용, 유찬희, 하희옥, 정안립, 최빈, 유흥윤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출처: 오마이뉴스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46화]. 이러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그는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편집]

유기연은 당시 조선이 열강들 사이에서 국가 존망의 위협을 받는 것은 국민들이 고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라고 여겨 그의 아들들을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장남인 유일한은 1904년 불과 9세 나이에 미국 네브라스카주로 보냈고, 나머지 자식들도 중국, 일본 등으로 유학을 보냈다.

[편집]

3남인 유명한은 상해로 유학을 떠나 중화민국 국립상해의학원(國立上海醫學院)을 다니다가 중퇴하였고, 유한양행이 중국에 지점을 설치하는데 참여하면서 상하이에 자리잡고 조어인과 결혼하였다. 그의 장남 유승호(柳承昊)는 1935년 상해에서 태어났다.

[편집]

유한양행은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베트남 등으로 사세를 넓혔는데, 중국어에 능통한 유명한은 중국 지점들을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유한양행 총매출의 상당한 부분이 중국 지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다만 1937년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유한양행은 많은 손실을 보며 중국에서 철수하게 되며, 유명한도 그때 귀국하였다.

[편집]

당시 미국을 오가며 판로와 수입로를 직접 개척하던 유일한은 그가 일본의 적성국 미국의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1938년부터 자의가 아닌 망명생활을 하게 되는데, 창업자의 부재 중 유명한은 형을 도와 이사로서 유한양행 경영에 참여하게 되고, 1940년에는 부사장, 1941년에는 2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사장 취임은 미뤄졌지만 처음부터 유일한의 의도는 그의 부재 시 유명한으로 하여금 유한양행을 경영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편집]

그와 동시에 유명한은 현 유유제약의 전신인 유한무역회사(후에 유한산업, 유유산업으로 개명)를 설립하여 간유구 등 비타민 제품들을 생산하였는데, 당시 국내 최초로 당의정 기술을 개발하는 데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대한비타민도 설립 운영하다가 매각하였는데 그 회사는 현재 대웅제약으로 남아있다.

[편집]

1945년 광복 후 유일한이 귀국하면서 재산을 정리 분배하게 되었는데, 유명한은 형제 간의 갈등 없이 유한양행 사장직을 형에게 돌려 드리고, 유일한은 그간 일제치하에서 유한양행을 잘 지켜줘 고맙다는 답례로 유명한으로 하여금 별도 법인인 유한산업의 사장직을 맡게 하고 종로구 신문로에 있던 유한양행 사장 사옥(현재 돈의문 박물관마을내 서울도시건축센터 석조건물로 보전되어 있음)도 넘겨주었다 [출처: “유일한 정신의 행로” 저자 유승흠 증언].

[편집]

이 승계과정에서 유일한이 이승만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한국으로의 귀국이 순조롭지 않을 동안 유명한은 유한양행에 계속 적을 두고 경영에 관여하며 경영권 이전을 도왔으며, 유일한이 귀국 후 자리를 잡는 동안 호텔이 아닌 유명한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편집]

유명한은 해방 후 1948년 제2대 한국제약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더불어 고려문화사(고려인쇄사)도 창립하여 해방 후 출판산업에 한 획을 그었는데, 삼국유사, 삼국지 등을 번역 출간했으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잡지 '민성'과 해방 후 첫 어린이 전문 잡지도 발행하였다.

[편집]

그의 아내 조어인은 국가봉사, 국민문화 향상과 여성지위 향상을 목표로 1949년 2월에 결성된 대한부인회에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간부직을 역임하였으며, 국회의원 박순천의 후원회 회장직도 맡는 등 적극적으로 국가봉사와 여성권익 향상을 위해 일한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편집]

1950년 한국전쟁 발발하자 유명한은 형제 가족들과 노모를 모시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조어인은 혼자 서울에 남아 계속 봉사활동을 하다가 이미 다리가 끊긴 한강을 가까스로 건너던 중 폐렴에 감염되어 어린 5남매를 두고 사망하였다. 피난길에 아내를 잃은 유명한은 다대포에서 자식들을 홀로 부양하며 배로 출퇴근을 하였는데, 세월호 사고 이전 국내 최대의 민간 선박사고로 기록되던 1951년 다대포 조난사고로 인해 그도 향년 43세로 사망하였다.

[편집]

유명한과 우애가 깊었던 유일한은 유명한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크게 상심하였다고 전해지며, 당시 서울고등학교에 재학하다가 졸지에 16살 나이로 고아가 된 유명한의 장자 유승호(柳承昊)를 자신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도록 금전적 지원없이 혼자 미국으로 보내 고학을 하게 하였다. 유승호는 캘리포니아 산호세 대학 졸업 후1957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에 유일한의 비서 및 상무이사로 근무하다가, 1969년 그와 동갑인 유일한의 장자 유일선이 유한양행 부사장직에서 물러날 당시 유일한이 모든 친인척을 다 함께 내보내면서 회사를 떠났다.

[편집]

유일한 사후 유승호는 미국 킴벌리-클라크의 지분이 유한양행보다 더 컸던 (당시 60:40, 현재 70:30) 유한킴벌리에 1974년 최초의 한국인 사장으로 취임하여 회사의 기틀을 잡고 현재까지도 최고수준인 사원복지를 구현했다. 1980년 유승호가 유한킴벌리에서 퇴사한 이후 유한양행과 그 계열사들 안에 유일한의 친인척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유승호는 1995년 60세의 나이로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편집]

유명한 사후에 그가 설립하고 경영했던 유한산업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유기연의 6남 유특한이 유한양행 6대 사장 (1951-1954)에서 물러난 후 인계 받아 결핵치료제 피스짓, 영양제 비타엠 등의 주력상품으로 회사를 키워 1950년대에는 제약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1957년에 유한양행 측에서 회사 명칭 변경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것을 계기로 영원히 유씨가 이어가겠다는 신조로 유유산업으로 사명을 바꾸고, 2008년에는 유특한의 장남 유승필이 유유제약으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편집]

기업인 경력과 친일논란

[편집]

유명한의 경력을 연도별로 정리하자면:

[편집]

1936년 6월 20일 유한양행 주식회사 대주주로 참여

[편집]

1938년 7월 30일 유한양행 이사로 선임

[편집]

1940년 7월 31일 유한양행 부사장으로 선임

[편집]

1941년 2월 28일 유한양행 계열사인 유한무역 주식회사(현 유유제약)의 전무이사 겸 유한상사의 이사로 선임

[편집]

1941년 12월 15일 긴급 이사회를 통해 유한양행 제2대 사장으로 선임

[편집]

1943년 9월 27일 유한제약공업 주식회사 이사장으로 선임

[편집]

1945년 10월 26일 조선약품공업협회 사무부 위원으로 선임

[편집]

1948년 7월-1949년 9월 제2대 한국제약협회 회장 역임

[편집]

1938년에서 1945년 해방까지 유일한이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 유명한의 동생인 유동한과 유특한은 일본 유학 중이어서 경영에 참여할 수 없었고, 섭외 능력이 뛰어나고 또한 유한양행의 상해지점을 일본군이 상해에 진주할 때까지 성공적으로 키우는 등 여러모로 경영능력이 증명된 그가 형을 대신하여 유한양행의 경영을 책임지게 되었다.

[편집]

그의 경력에서 오점으로 남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유일한이 귀국을 못하고 있을 당시 유한양행의 2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형이 귀국할 때까지 유한양행을 경영하던 중 일본제국에 헌금을 했던 기록이다.

[편집]

유한양행은 이미 중국 여러 지역에 지사를 설립하는 등 아시아 전역에서 사세 확장을 하며 민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조선 제1의 민족자본 기업이 되었는데, 그 설립자 유일한이 9세 때부터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미국 시민권자였으며, 또한 1919년 필라델피아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사람이란 이유로 설립자는 주미일본대사관과 영사관에 의해 주미조선인 중 요주의 인물 및 감찰대상이 되고 유한양행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적산으로 규정된 상태였다.

[편집]

특히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비롯된 미국과의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일제의 핍박과 압박은 더욱 거세지고, 유한양행을 위시한 민족자본 기업들에게 감찰을 통한 태평양 전쟁을 위한 공납이 강요되던 시절이었다. 일제 강점기 중 1933년 유한양행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훗날 유한양행 사장, 회장, 유한코락스 대표이사 등을 역임한 홍병규에 따르면 당시 유한양행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존폐의 위기까지 몰렸다고 한다 [출처: 약업신문 2016-03].

[편집]

이런 상황에서 형을 대신해 사장으로 취임한 유명한은 회사의 존망을 위협하는 끊임없는 탄압과 세무조사, 또 극에 달한 전쟁지원금 강요에 못 이기고 비행기 공납 등 전쟁지원금조로 헌금을 기부한 기록이 남아있다. 구체적으로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8월 26일에는 경성부 종로경찰서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방헌금 10,000원을 일본 제국 육군의 무기 구입비로 헌납했고, 이어 1941년 12월 27일에는 '유한 애국기(柳韓 愛國機)' 1대 제작비 53,000원을 일본 제국 육군에 헌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가운데 27,000원은 유한양행 명의로, 10,000원은 각각 본인 명의와 만주유한공사의 명의로, 5,000원은 유한무역의 명의로, 1,000원은 직원 명의로 모금한 것이었다.

[편집]

이는 해방 후 그가 친일 인사로 낙인이 찍히게 된 빌미가 된다. 다만 유명한은 2009년 11월 27일 발간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올라있지 않으며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참조), 부실한 검증과 지나친 정치색으로 객관성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 8일에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오르게 된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 경제 참조).

[편집]

이러한 기부행위는 단편적으로 보면 분명 후세에 비난 받을 소지가 있지만, 전쟁 중인 국가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사업을 하면서 군대를 위한 헌금 강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헌납한 비행기는 전쟁수행용이었지 동족을 상대로 사용된 것이 아니므로 그 기부행위 하나만으로 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것은 과잉해석이라고 할 여지가 있다.

[편집]

당시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헌금을 한 것은 민족기업을 존속시켜 동족의 건강관리의 책임을 지며, 고용을 통한 사원복지를 유지하고, 이익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유한양행의 기업이념을 이루기 위한 일종의 타협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한국 군사독재 시절 기업들이 정권에 의한 헌금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던 상황에 비할 수 있다.

[편집]

동시대에 나치의 탄압으로부터 많은 유태인들의 생명을 구해 존경받는 쉰들러도 엄밀히 따지자면 그의 사업형태는 독일군에 무기를 공급하는 군납 회사였다. 그런 잘못이 있다고 해서 그의 선행이 완전히 상쇄되는 것이 아니듯이, 남을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은 당시 그들이 처한 상황을 감안하여 다각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편집]

유명한은 일제침략이 시작되던 때부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선친을 본받아 민족주의 정신이 투철한 사람으로서, “일본어만 가르치는 학교에는 보낼 수 없다”라며 해방 전에는 그의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교육하여 그의 자녀들은 일제치하에서 유소년기를 보내고도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편집]

2차대전 말기에 유명한이 일제에 대한 헌금을 거부하던 중, 그의 차에 일본 헌병(?) 두 명이 뒷자리 양쪽으로 올라타 유명한을 강제로 연행하려 하자 그의 심복과 같았던 운전기사 XXX씨가 기지를 발휘하여 일부러 충돌 사고를 내고, 그 틈을 타 거구였던 유명한이 그들을 제압하고 탈출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편집]

또한 유명한은 수시로 외국 단파 방송을 청취하며 정확한 전쟁상황을 파악하려 했는데, 일왕이 항복선언을 하기도 전에 전세가 기울었음을 눈치채고 당시 유한양행 본사와 사장 사옥이 있었던 종로구 신문로 일대에 온 가족이 며칠 밤을 새우며 제작한 태극기들을 걸어 놓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해방되는 날까지 고초를 겪었다는 일화도 있다.

[편집]

그런 유명한이 일본군대에 헌금을 한 것은 당시 최대 민족자본 기업이었던 유한양행의 기업활동과 존속을 위해 많은 갈등 끝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끝까지 헌금을 거부했다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유일한이 해방 후 귀국했을 때 유한양행이란 소중한 민족기업이 살아 남아있지도 않았을 것이란 가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편집]

종국에는 기부액수가 비교적 커서 일부 친일명단에 들어가게 된 것인데, 그것도 당시 회사 규모에 비례한 액수를 강요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미국과의 전쟁지원 명목으로 헌금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경찰에 협조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동족을 추적하는 등 적극적 반민족행위를 한 자들과 함께 묶어 유명한을 반민족행위자로 규정 짓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편집]

요약 및 결론

[편집]

유명한은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활동기간이 길지 않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었고, 형 유일한의 업적이 워낙 크고 잘 알려져 있어서 그의 행적은 단순히 형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일본제국에 헌금한 기록이 있는 친일인사라는 한마디로 요약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형의 부재 중 일제의 갖은 핍박과 감시에도 불구하고 유한양행이라는 조선 제1의 민족기업을 해방까지 지켜낸 인물이며, 동시에 유한산업, 고려인쇄사 등 다른 회사들도 창립, 경영한 활발하고 창의적인 기업인이기도 했다.

[편집]

해방 후 귀국한 유일한과 그의 11년 아래 동생인 유특한이 유명한의 창씨개명한 이름을 거론하며 친일 한 자라고 폄하했다는 내용이 일부 매체를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유일한이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놈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 유명한의 창씨개명)라는 놈은 모른다!"라고 말했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내용의 일화는 미담과 선행으로 잘 알려져 있는 유씨 가문을 음해하려는 세력이 가족 간의 갈등을 부각시키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유한양행과 그 계열사에는 유명한의 장자 유승호의 1980년 유한킴벌리 퇴사 이후 유씨 일족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으며, 오히려 유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경영과 이사직 등에서 철저히 배척당하는 전통 아닌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편집]

유명한은 유일한이 귀국하면서 그가 일제강점기동안 지켜낸 유한양행을 형제 간의 아무런 이권 다툼 없이 형에게 온전히 돌려드리고 경영에서 물러난 점잖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동생이 자신의 부재 시 회사를 잘 지켜준 것을 고마워하던 유일한은 끝까지 우애를 지키던 유명한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크게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창씨개명은 당시 식민지로 전락한 땅에서 기업활동을 하며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유명한이 그런 상황에서 유한양행을 어렵게 경영할 당시 일본에서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유학하던 동생 유특한이 나중에 창씨개명을 들먹이며 형을 비난하였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점이다.

[편집]

그의 일본군대에 대한 헌금은 분명 수치스러운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당시 미국과 전쟁을 치르느라 집집마다 쇠붙이까지 걷어갈 정도로 서슬이 시퍼렇던 일제치하에서 헌납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었다면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족기업이었던 유한양행의 생존을 보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편집]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은 후세 사람들은 당시 식민치하에서 어렵게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의 처신을 작금의 잣대를 일괄 적용하여 친일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탄압에 굴한 친일적 행위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반민족행위를 반드시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의 굵고 짧았던 인생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국에서 민족자본기업을 유지해야 했던 기업인들의 갈등을 집약하여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편집]
  • 《유승흠 저 “유일한 정신의 행로” / 한겨레신문 문동환 인터뷰 / 윤병석 “명동촌과 명동학교” / 도올 “유일한과 명동학교” / 오마이뉴스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46화 /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 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