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선
조운선(漕運船)은 조선 시기 화물을 운반하던 화물선이다. 주로 각지의 세금으로 걷어들인 곡물을 운반하였다.[1] 고려시기부터 이미 조창을 운영하며 쓰인 것으로 보인다.[2] 고려 시기의 곡물 운반선인 초마선(哨馬船)은 1000 석의 곡물을 운반할 수 있는 크기였으며 조선의 조운선 역시 이 정도의 규모를 지녔다.[3] 현재 전해지는 조운선의 제원은 조선 후기의 것으로 18세기에 제작된 《각선도본》의 기록과 인양된 유물을 종합할 때 경하중량 41 톤의 목선으로 쌀 1천 섬을 실었다면 곡물 약 53 톤을 운반할 수 있었고 여기에 각종 항해도구와 선원을 고려하면 재화중량은 96 톤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1]
건조
[편집]조선 초기의 조운선 건조는 국가가 주도하였다. 태종은 즉위 직후 251 척의 조운선을 건조하였고 다시 즉위 14년인 1413년 80 척을 추가로 건조하였다. 이후 세조 시기에도 전라도 변산과 완도에서 100 척의 조운선이 건조되었다.[4]
건조된 조운선은 6년이 되면 수리하고 다시 6년이 되면 개조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며 이에 따르면 선박의 수명은 대략 20년 내외였다.[4] 조선 초기에는 관이 주도하여 건조하였으나 후기에 들어서는 민간에서 건조한 조운선이 많이 이용되었다.[4]
운용
[편집]조선은 수운을 이용하기 용이한 중부 및 남부 지방의 요지에 조창을 세우고 세곡 운반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름에는 창고의 의미가 있지만 실제 창고가 함께 운영된 경우는 적었고 걷어들인 세곡은 되도록 빨리 조운선에 실어 서울로 운송하였다.[4] 대동법 시행 이후 모든 조세를 곡물로 수납하면서 기존의 조운선으로는 물량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간의 조운선인 사선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다.[5]
삼남의 세곡이 모두 조운선을 이용하여 서해를 북상하여 한강 유역인 경강(京江)에 집결하게 됨으로써 이지역은 새로운 상권의 중심지로 떠올라 경강상인이 상권을 주도하게 되었다.[6]
유물
[편집]조선 시기 운용되던 조운선은 이후 모두 폐기되어 온전한 선체를 보전한 것은 없으나 운항중 침몰한 유물들이 발굴되어 있다.[1] 2011년 조운선 복원이 시도되었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