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부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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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의 출처와 신뢰성에 관하여
[편집]본문 내용 출처
[편집]본문 내용의 출처는 2015년 까지 발행된 언론 기사들과 부활호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한 각종 논문 및 보고서, 부활호에 관한 내용이 언급된 서적, 설계자 이원복 선생님과의 대화 내용 등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내용의 신뢰성
[편집]최근 들어 부활호에 관한 몇몇 언론 기사나 설명 등이 이 항목을 참고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지만 항목에 기여한 사람으로서 노파심이 생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최근까지 여러 방법을 통해서 부활호의 역사를 깊이 있게 알아본 결과, 부활호의 역사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많고, 근거를 갖고 제대로 설명하고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는 허점도 있었던 것입니다. 제 자신이 최대한 많은 자료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사실들은 이런 부분을 거의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 쓰여진 정도가 결코 다가 아니라며 더 알아야 할 것이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다른 저작물을 위해 이 글을 참고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이런 점에 유의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구체적인 의문점
[편집]지금까지 알려진 부활호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의문점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나중에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부활호는 27명의 사람이 만들었음에도 정작 부활호의 개발, 제작, 발굴, 복원은 모두 한두 사람의 입장에서만 기술되고 있다. 따라서 그 입장에서 알 수 없는 부분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았다.
- - 지금까지 증언을 했던 사람들이 틀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한 해석을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증언이나 자료가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여태까지 알려진 부활호의 역사가 소수의 증언에 좌우되다 보니 그들의 입장에서 알 수 없었던 부분이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부활호가 어떤 경위로 대구의 경상공고에서 발굴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원복 선생님께서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1955년 초에 돌아와 보니 부활호가 없어져 있었다고 증언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부활호가 처음 만들어졌던 공군기술학교에는 분명 이원복 선생님 외에도 다른 제작 참여자들이 많이 계셨고, 이들이 모두 미국으로 교육을 받으러 갔다 온 것이 아니라면 분명 누군가는 부활호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에 대한 조사가 일절 없었으므로 제작 이후로 부활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냥 공란이 되고 만 것입니다.
- 제작과정에서의 상세한 일화 등이 알려지지 않았다.
- - 어떤 일이든 간에 그것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크든 작든 여러 에피소드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부활호는 전후 즈음 어려웠던 시절 갖은 고생을 하면서 만든 항공기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단지 언제 제작이 시작되어 언제 완료하고 하는 식의 역사연표같은 무미건조한 설명이 아니라 예를 들면 제작과정에서 난관이 발생했는데 기발한 방식으로 해결했다든지, 사고가 나서 사람이 다쳤다든지, 첫 비행이 성공했을 때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든지 하는 식으로 제작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 말입니다. 만약에 이런 일화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면 향후 부활호의 제작과정을 담은 콘텐츠를 제작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부활호의 역사에서는 이런 부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 부활호가 실질적으로 운용된 것으로 보이는 대구의 한국항공대학(또는 한국항공초급대학)과 거기에서의 운용방식에 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 -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는, 부활호는 대구에 있던 한국항공대학으로 넘어가서 학생들의 훈련용 항공기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학교에 대한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부활호가 정확히 언제 이곳으로 들어왔으며, 정확히 무슨 임무를 띄고 어떤 식으로 교육에 활용되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항공기 개발사(史)에서 개발과정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해당 기체가 실제로 어떻게 운용되었는지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 점 또한 지금까지 알려진 부활호의 역사 중에 가장 약점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 심지어 알려진 몇몇 역사는 출처에 따라 서로 상충되기도 한다.
- - 경상공업고등학교의 전신은 한국항공대학인데, 경상공고의 학교 연혁을 보면 한국항공대학이 설립된 해는 1960년으로 되어 있으나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홈페이지의 부활호 관련 설명(http://www.afa.ac.kr/museum/buhwal.html )에는 부활호가 사라진 해를 1955년으로 적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도대체 어느 쪽이 맞는 말인지 헷갈렸습니다.
위와 같이 부활호의 역사에는 지금도 공백이 굉장히 많으며, 이것들이 모두 밝혀지게 되면 이 문서의 내용 또한 대폭 추가되거나 변경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알아낸 사항 가운데 가장 이슈가 된다고 보는 부분을 적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것은 부활호 제작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이나 운용과 관계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 당대의 기록이나 사진 등의 자료를 통해 실증적으로 확인된 바는 아닙니다. 다만 향후 부활호 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분명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부활호의 제작경위에 대한 여러 다른 주장이 있다. 이를테면 제작을 지시한 김성태 대령이 부활호 제작을 지시한 이유가 비행기 조종에 대한 개인적인 열망 때문이라는 주장과, 부활호가 자체개발 항공기가 아니라 당시 사용하다 추락한 다른 경비행기의 잔해를 개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것들이 사실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부활호 제작을 처음 지시한 것이 정확히 누구인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부활호를 만들게끔 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 알려진 바에 의한 '항공기 개발역량 확립'이나 '기술학교의 실습용'이라는 설명은 사실 정확한 원출처가 불분명하다.) 이를 위해서는 김성태가 정확히 어떤 인물이었는지와, 부활호가 실제로 다른 항공기를 활용해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지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상세한 증언이나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적어도 후자의 경우 당시 공군에서 운용했던 다른 경비행기의 동체를 구성하는 부품이나 그 성분, 설계도상에서 보이는 유사점 및 차이점 등을 비교해 보면 비교적 쉽게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부활호는 대한민국 공군에서 개발 및 제작되었으나, 실질적인 운용은 사실상 대구 한국항공대학(한국항공초급대학)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비행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던 비행사 김영수와 가와니시항공공학교(西川航空工學校) 출신인 김홍준(후에 경상공업고등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이 설립한 학교로 일종의 민간비행교육원 정도의 성격을 지닌 곳으로 보인다. 부활호가 이곳에서 운용되었다는 것은 이 학교의 후신인 경상공업고등학교에서 부활호가 발견되었다는 사실로도 입증이 된다. 증언에 따르면 부활호는 이 학교에서 학생들의 비행교육용으로 활용되었으며 간혹 전단지 살포 등의 목적으로 비행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만약 부활호가 한국항공대학에서 주로 운용된 것이 맞다면, 부활호의 역사는 단지 공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초기 민간항공 및 일반항공 분야까지 아우르는 업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부활호가 한국항공대학에서 실제 비행임무까지 투입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한편 부활호가 제작 이후 공군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에 관해서는 관련자들의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부정기적으로 비행을 했다는 증언도 있는 한편, 시험비행 이외의 비행은 전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한 가지 거의 확실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활호가 적어도 공군에서는 조종사 훈련용이나 기타 공식적인 임무를 위해 활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입증하고 새로운 사항들을 더 밝혀내기 위해서는 부활호가 공군에서 어떻게 운용되고 관리되었는가에 관한 자료와 더 많은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하루라도 빨리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 부활호가 제작 직후 교통부에 인가를 받았다는 증언이 있으나, 국토교통부에 문의한 결과 자료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 인가가 이루어졌음에도 자료가 남지 않은 것인지 인가받은 사실이 없는 것인지는 계속 밝혀내야 할 부분이다. 또한 그 이후인 1962년에 항공법이 제정되면서 한국에서 운용되던 민간항공기들이 등록절차를 거쳤으므로 만약 부활호가 이 무렵까지도 비행을 하고 있었다면 정식 등록 내지는 그를 위한 감항검사 등과 관련된 자료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발견되지는 않았다. 이 부분은 부활호가 민간항공기로서 실제로 비행한 적이 있었는가를 입증할 수 있으므로 중요하다.
- 부활호가 한국항공대학에 넘겨진 시기가 1962년 공군기술학교가 김해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이후라는 증언이 있다. 현재로서 의문이 되는 부분은 대통령에게 휘호까지 하사받고 관련자에게 훈장까지 수여했을 정도의 항공기가 도대체 무슨 경위로 교통부에서 세웠던 항공대학교가 아닌 일개 민간비행학교로 옮겨졌느냐이나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실마리도 없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 사항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사항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Metalslug200 (토론) 2015년 10월 25일 (일) 14:47 (KST)
실종 당시와 관련된 부분
[편집]부활호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 가운데 가장 헷갈리는 부분인데, 최대한 공신력 있는 자료를 참고하려고 노력했으나 연도 등에 있어서 헷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경상공업고등학교 홈페이지에 따르면 학교법인 일용학원이 설립된 날짜가 1960년 1월 7일, 한국항공대학이 설립된 날짜가 1960년 1월 10일, 한국항공초급대학이 설립된 날짜가 1963년 1월 29일, 한국항공초급대학이 폐교된 날짜가 1966년 2월 28일, 경상공업고등학교가 설립 개교한 날짜가 1967년 3월 2일로 나옵니다. 그러나 경상공업고등학교에 전시된 설립자 일용 김흥준 선생의 흉상 설명에 보면 1921년 5월 8일생인 선생이 "34세에 교육에 뜻을 세워 학교법인 일용학원을 설립하여 한국항공대학을 설립하게 하니 …(중략)… 44세에는 한국항공초급대학을 설립하여 …(중략)… 47세에는 경상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후략)"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설명대로라면 1954년에 한국항공대학이, 1964년에 한국항공초급대학이, 1967년에 경상공업고등학교가 세워졌다는 것인데, 한국항공대학과 한국항공초급대학의 설립연도에 관한 설명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
또한 일부 인터넷 뉴스기사는 공군김해기지가 1955년에 부활호를 한국항공대학에 기증하였다고 쓰고 있으나 일부 기사는 1960년에 기증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원복 선생님이 미국에서 교육을 이수한 직후인 1955년에 고국에 돌아오셨고 부활호가 없어진 것을 알고 수소문하셨다고 하기 때문에 1960년에 부활호가 기증되었다는 것은 정황상 맞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경상공고의 홈페이지에 한국항공대학의 설립연도를 1960년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결국 이원복 선생님이 귀국하신 날짜, 한국항공대학과 한국항공초급대학, 경상공업고등학교의 설립 날짜, 부활호가 김해기지에서 경상공고 자리로 옮기게 된 날짜를 정확하게 알아내야 합니다.
더불어 어떤 기사에서 한국항공대학(또는 한국항공초급대학)에서 부활호를 학생들의 훈련기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이 학교에 항공운항이나 조종과 관련된 학과가 있었는지도 검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이 학교에 관해 알려진 사항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
부활호가 정확히 어떤 계기, 어떤 과정을 거쳐 창고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런 사항까지 문서화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며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Metalslug200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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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
[편집]- 부활호의 진정한 개발 동기는 무엇인가?
부활호 개발 총책임을 담당하셨던 故 이원복 선생님께서는 일관되게 부활호의 개발동기는 기술학교장 김성태 대령의 지시에 의해서였으며, 그러한 지시를 내리게 된 원인은 만주군 출신으로 비행기 조종이 가능함에도 당시 공군에서 조종사로 활약할 수 없었던 현실에 자신이 직접 비행기를 조종해보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증언하였음. 하지만 제3자들의 증언에서는 이원복 선생님이 부활호 개발 이전부터 항공기 개발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발언이 있었음. 부활호 개발동기를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기록을 발굴하여 분석할 필요가 있음
- 부활호의 정확한 개발 시작 시점은 언제인가?
지금까지는 故 이원복 선생님의 기고문을 통해 부활호의 개발이 1953년 6월 28일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처럼 알려져 있음. 하지만 실제로 고인께서 제시한 증거자료에서는 날짜가 동년 7월 28일로 되어 있음. 그런데 부활호 명명식 당시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에서 게재된 기사에서는 7월 하순을, 『제1훈련비행단 부대일지』와 『공군일지』에서는 8월 14일부터라고 적고 있으며 국방과학연구소 김기석이 『국방과 기술』지에 저술한 「우리나라 조병기술 발전사」에서는 1952년 11월부터 시작하였다고 적고 있음. 이런 식으로 사료마다 정확한 개발 시작 시점을 달리 이야기하고 있어, 개발 시작 시점을 확정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자료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하겠음.
- 부활호 개발에 실제로 참여한 서울대학교 조선항공학과 학생들은 누구였는가?
故 이원복 선생님의 증언에 따르면 부활호 개발 당시 자신이 출강하던 서울대학교 조선항공학과 학생들에게 항공기 설계경험을 쌓게 할 목적으로 개발에 참여시켰다고 하나 실제로 누가 어느 정도 참여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음. 고인의 증언대로 실제 서울대 조선항공학과 학생들이 참여한 것이 맞는지, 그렇다면 어느 분야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비율로 참여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음.
- 부활호의 구체적인 개발과정은 어떠하였는가?
현재 부활호의 개발과정에 관한 기록 가운데 발견된 것은 『코메트』 제7호 「또 하나의 건설자 공군기술학교」에 실린 것이 아직까지는 유일함. 하지만 이 기사는 부활호 개발의 막바지 상황에 대해서, 비전문가의 단편적 시각으로 기술한 것이라 부활호 개발의 상세 사항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음. 부활호 개발에 대한 일지와 같은 기록이 발견된다면 좋겠으나 아직까지 그러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음. 따라서 향후에는 그러한 기록을 발견하여서 개발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나 일자별 개발 진척도에 관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음.
- 부활호의 초도비행 일자는 언제인가?
현재 부활호의 초도비행은 故 이원복 선생님의 증언에 의거하여 1953년 10월 11일에 민영락 소령이 조종하고 이원복 소령이 후방석에 동승한 상태에서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음. 하지만 몇몇 다른 부활호 제작요원들은 기술학교장 김성태 대령이 초도비행을 수행했다고 증언하였음. 초도비행을 누가 언제 수행했는지에 대한 증거자료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됨.
- 부활호의 제원에 관한 기록은 확실한가?
현재 알려진 부활호의 제원은 故 이원복 선생님이 생전에 제시한 자료인 KL-1007 Liaison Aircraft Specification에서 비롯하였음. 그러나 이 문서는 수기나 타자기 등으로 작성한 원본이 아니라 컴퓨터로 작성한 뒤 인쇄한 흔적이 남아 있어 진본이 아닐 가능성이 높음. 이 자료의 진본이라 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황임. 또한 일부 기본제원, 특히 주날개 폭의 경우 이 자료에서 명시한 제원과 실제 사진상에서 확인되는 수치가 다른 것이 밝혀졌음. 또한 성능제원의 경우 공군의 기존 L형 항공기보다 더 뛰어난 편임. 그런데 부활호를 시험조종했던 故 민영락 선생님은 부활호의 비행특성이 기존 L형 항공기에 비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증언하였으므로 실제 부활호가 제원표대로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임. 향후에 가능하다면 부활호의 진정한 기본 및 성능제원을 다양한 방식으로 밝혀낼 필요가 있다 하겠음.
- '부활'이라는 통상명칭의 정확한 작명의도는 무엇인가
현재 세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부활이라는 이름이 "대한민국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설이 정설처럼 퍼져 있으나 실제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이름을 지었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밝힌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음. 한편으로는 이 기체의 이름이 기독교 핵심교리인 부활사상을 염두하고 지어진 것이라는 의견도 있어 차후 이승만 대통령이 가졌던 정확한 작명의도에 대해서 고찰하거나 명확한 증거를 찾아낼 필요가 있음.
- 부활호 명명식에서 장교들이 제외된 사병들만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1954년 4월 3일 부활호 명명식 당시 공군총참모장 최용덕 중장의 명의로 내려진 표창장에 딸린 명단에는 기술학교 부교장 김석환 중령을 비롯한 총 27명이 부활호 제작 공로로 표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 그러나 같은 날 같이 수여된 화랑무공훈장은 기술학교의 장교들을 제외한 사병들만 수여받을 수 있었음. 특히 개발을 총괄담당했던 이원복 소령이 수훈하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사항임. 당시 훈장수여의 과정에 대해 점검해서 무엇 때문에 장교들이 수훈에서 제외되었는지를 밝혀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됨.
- 부활호 명명식 이후부터 1960년 민간 이관 사이의 기간동안 부활호는 어떻게 보관되었는가? 부활호는 왜 민간에 이관되었는가?
故 이원복 선생님은 자신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1954년부터 1955년 사이 기간 동안 부활호가 사라졌다고 증언하였음. 하지만 현재 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사료와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자료, 그리고 부활호와 간접적으로 연관된 기술학교 근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부활호는 1960년 10월까지 공군이 보유하고 있다가 민간으로 넘겨졌다고 볼 수 있음. 왜 증언과 기록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는지, 실제로 당시 부활호가 어떤 행적을 거쳤는지, 그리고 1960년 10월 공군기술교육단으로부터 대구 한국항공학교로 이관된 정확한 경위가 무엇인지 밝혀낼 필요가 있음. 이를 밝히는 것은 부활호가 2004년 크게 훼손된 상태로 발견된 것에 대한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밝히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됨. Metalslug200 (토론) 2024년 9월 16일 (월) 17:18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