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이 칸
Adai Khan아다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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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카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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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 왕조 하간 | |||||
군림하다 | 1425–1438 | ||||
대관식 | 1425 | ||||
전임자 | 오이야다이 | ||||
후계자 | 타이순 칸 | ||||
태어난 | 1390 | ||||
죽은 | 1438년(47~48) 에제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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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 보르지긴 | ||||
왕조 | 북원 | ||||
아버지 | 외뤼그 테무르(?) |
아다이(몽골어: ааа; 중국어: 台台)는 1425년부터 1438년까지 군림하던 북원 왕조의 카간이었다. 동몽골의 저명한 수상이 아루그타이에게 충성을 던진 후 아다이는 그의 기치 아래 잠시 대부분의 몽골 부족을 재회했다.
초년기
아다이의 가문 혈통의 기원은 보르지긴 가문 내의 계통결혼으로 인해 카단과 하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몽골 소식통도 아다이는 외뤼그 테무르 칸의 아들이었다고 말한다.[1][2] 아다이의 가문은 몽골 동부의 일족인 코르친(Khorchin)으로, 대칭간 산맥 동쪽의 넨 강 지역에서 유래하였다. 아다이는 카간으로 포고하기도 전에 오이랏족을 물리침으로써 거의 서몽골 영토 통합에 성공했다. 또 다른 징기스칸 시대의 부활 가능성에 놀란 명 왕조는 오이랏족과 서몽골 가문들 사이의 동맹국들에게 지원을 제공했고, 먼저 회복한 다음, 중앙 몽골 가문들에 대항하여 반격작전을 펼침으로써 대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아루크타이 칭상은 카사르 가문과의 의논을 거쳐 아다이를 대원(大元)의 카간(카간)으로 왕위에 세웠다.
군림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다이는 세력을 통합하고 확장할 수 있었고, 결국 1425년 몽골의 중부와 동부를 통합하였다. 그러나 그의 몽골 서부 영토 정복은 오이라트족의 견제를 받았으며, 양쪽 모두 수십 년간 통일을 위한 전쟁을 계속하였다. 아다이는 몽골의 중부와 동부를 통일하는 성공에 편승하여 1425년 몽골 중부와 동부의 지지를 얻어 자신을 카간으로 선포하였는데, 같은 해 서부의 라이벌 칸인 오이야다이도 살해되었다. 아다이와 아루그타이는 오이랏 족을 무찌르고 그 우두머리 몇 명을 죽였다. 오이라트 귀족 아다이를 사로잡은 후, 굴리치의 아내 율제이트 더 미녀와 결혼하였는데, 그는 엘베그 칸(r.1392–1399)의 왕비였으며 바하무의 아들(미래 토한 타이시)을 노예로 삼았다. 아다이칸의 권위는 그를 최고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는 서몽골인들에게 완전히 미치지 못했지만, 서몽골 가문에는 그들 자신의 칸이 없었기 때문에 아다이칸은 적어도 명목상 8년 동안 몽골의 유일한 통치자로 남아 있었다. 엘베그의 딸과 오이라트 타이시 바하무의 미망인 사마의는 칸을 설득하여 현재 토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을 몽골 서부로 풀어주었다. 그러나 1433년 토건이 반란을 일으켰고 마침내 서몽골인들이 다음 신칸으로 타이성 칸(Tayisung Khan)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토그토아 북하(또는 토오토아 부카)를 왕위에 앉혔고, 이로 인해 반 몽골 일족의 지원을 받는 2명의 크한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사양
1422년과 1423년에 아다이 칸은 과거에 얻은 영토를 모두 잃었고, 1430년에는 3번째 오이랏 승리가 자신의 주력을 소실시켰고, 이후 더 이상 효과적인 공세를 펼 수 없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양측은 다음 단계에 대비하기 위해 교착상태를 이용하려 했지만 아다이 칸은 이전의 패배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오이랏족은 곧 다시 공세에 나섰고 1434년 네 번째 결정적인 오이랏 승리에서는 아다이 칸의 주요 고문인 아루크타이 등이 전사했다. 아다이 칸의 몰락이 확실했다.
죽음
1438년 아다이 칸은 자신의 영토가 오이랏과 그 동맹국들에 의해 전복되자 에제네에서 패배하였다. 아다이는 징기스칸의 8백막으로 피난했으나, 무장하지 않은 채 오이랏의 토군 타이시에게 살해당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