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스티노 스킬라

Agostino Scilla
스킬라가 그린 산 베네데토 다 노르시아.

아고스티노 스킬라(Agostino Scilla, 1629년 8월 10일 ~ 1700년 5월 31일)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 고생물학자, 지질학자, 숫자론자였으며 화석 연구와 과학적 삽화에 있어서 선구자였다. 그의 그림 외에도 그는 고생물학에 관한 초기 원고를 출판했다. 1696년 왕립 협회윌리엄 워튼에 의해 영국 관객들에게 소개된 라바나 스펙타조네 디싱가나타 센소("Vain Tuspensation Undremed by Sense", 1670)이다. 그는 환상적인 성경적 해석과 신학적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화석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증진시킨 최초의 사람이었다.

전기

시칠리아메시나에 있는 공증인의 아들로, 스킬라는 메시나의 안토니오 바르발룽가(Antonio Barbalunga)와 후에 로마의 안드레아 사키(Andrea Sacchi) 밑에서 공부하여 화가가 되었다.[1] 메시나에서는 산도메니코 교회와 누지아타 데'테아티니'의 교회에서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그의 캔버스 중에는 산투르술라 교회를 위해 그려진 산일라리온의 죽음에 대한 묘사도 있다. 시러큐스 성당에 있는 그의 프레스코스는 1657년부터 시작되었다.

스페인 통치에 대항하여 성공하지 못한 반란을 일으킨 후, 1678년 그는 시칠리아에서 추방되었다. 스킬라는 토리노와 로마에서 평생 화가로 일했다. 그는 1695년 로마의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검열관이었다.[2]

그의 제자 중 한 명은 화가 안토니오 마디오나와 플라시도 셀리였다. 아고스티노의 형 지아신토와 지아신토의 아들 사베리오도 화가였다.[3]

작동하다

진리와 투기의 우화적 투쟁을 보여주는 프런트피스(Frontispic)는 수성이 이성의 눈을 가슴에 품고 에치노이드 화석을 들고 더 많은 표본을 가리키고 있는 진실과 투기의 우화적 투쟁을 보여준다.

스킬라는 시칠리아의 언덕에서 발견되는 화석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때로는 식물학자 파올로 보코네와 동행하기도 했다. 의 유일한 저술 과학 작품은 라바나 스펙타지온느 디싱가나타 달센소("Vain Tuspension Undresided by Sense", 1670)[4]이다. 이 책은 메시나에 아카디아 델라 푸치나(1639–1678)를 세운 시칠리아 귀족 돈 카를로 디 그레고리오에게 바쳐졌다. 이 작품에서 Scilla는 화석이 환상적인 기원이거나 신의 믿음의 시험인 것과는 반대로 화석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주장한다. 그는 또한 글로소페트래라고 불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마법의 물체를 상어의 이빨로 정확하게 식별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한 첫 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니콜라스 스테노도 3년 전 비슷한 주장을 했지만 스킬라가 그 작품을 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파비오 콜론나(1616년)는 이 화석이 광물이 아닌 석회, 유기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화석을 불태웠다.[5] 이 책에는 피에트로 산티 바르톨리가 동판을 이용해 새긴 시료에서 그가 그린 화석의 그림 29점이 포함됐다. 이 책은 1696년 왕립 협회의 윌리엄 워튼에 의해 재발견되었고 영어 요약본이 널리 보급되었다. Scilla는 훈련받지 않은 예술가라고 사과했고 Wotton에 의해 예술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스킬라는 그의 훈련이 자연에 대해 조사하고 사물을 더 잘 해석하며 조정 없이 자연을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화가의 눈을 주었다고 주장했다.[6]

스킬라가 그린 상어 이빨과 글로소페트레이

Scilla는 화석이 신이나 신성한 자연이 창조한 동물과 식물의 기발한 모사체인 루수스 나투라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화석을 "자연이 아닌 시간의 조크"라고 불렀다. 아타나시우스 커쳐는 무생물인 자연이 생물을 닮은 그림과 조각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지롤라모 카르다노는 자신의 '사물의 미묘함'(1550년)에서 로마 황제 갈바의 얼굴이 들어간 작품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라는 카르다노의 주장을 일축했다. 스킬라는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1597–1679)과 그의 비서 카시아노포초(1588–1657)의 소유인 로마에서 화석 수집품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스킬라 역시 조반 피에트로 벨로리(1613~1696)의 영향을 받아 탐구하는 화가의 역할을 강의한 바 있다. 벨로리는 카를로 마라타탄토 바스티(1682년)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예술가들이 원의 찌그러짐을 살피고 그들이 묘사하는 나체의 피부 아래에서 해부학을 탐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주제에 깊이 들어가기를 간청했다. 마라타는 스킬라와 함께 사치의 학생이었다. Scilla는 과학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명성을 얻었고 Marcello Malpighi에서 일했다.[6] 스킬라는 고생물학적 삽화로 재구성을 나타내기 위해 점선을 가장 먼저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7] John Ray는 Scilla의 화석 삽화 일부를 사용했다. 스킬라의 화석 수집은 1717년 영국인 의사우드워드(1665-1728)가 인수했다. 이것들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가 세드윅 지구과학 박물관의 소장품들의 핵이 되었다.[8][5][7]

Dorsum Scilla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9]

참고 항목

이탈리아의 화가 목록

참조

  1. ^ Lanzi, Luigi (1853). Translated by Thomas Roscoe (ed.). History of Painting in Italy. Vol. II. London; Googlebooks: Henry Bohn, Publishers. p. 44.
  2. ^ Giuseppe Ghezzi의 5페이지에 실린 로마달라아카다혈증 디디그노에서 센테시모 델안노 1695를 축하한다.
  3. ^ 지오르날레 쉬엔제, 시칠리아 볼륨 3-4에 레터타투라 에다티, 주세페 그로시 카코퍼디(1823), 94-95페이지의 피토리 메시니에 대한 암기.
  4. ^ 아고스티노 스킬라, 라바나 스펙툴라조네 디싱가나타 센소, 마르코 세갈라, 피렌체: 지운티, 1996. 오리지널 에디션은 archive.org에서 이용할 수 있다.
  5. ^ a b Romano, Marco (2014-09-03). "'The vain speculation disillusioned by the sense': the Italian painter Agostino Scilla (1629–1700) called 'The Discoloured', and the correct interpretation of fossils as 'lithified organisms' that once lived in the sea". Historical Biology. 26 (5): 631–651. doi:10.1080/08912963.2013.825257. ISSN 0891-2963. S2CID 129381561.
  6. ^ a b Findlen, Paula (2012). "Agostino Scilla: A Baroque Painter in Pursuit of Science". In Gal, Ofer; Chen-Morris, Raz (eds.). Science in the Age of Baroque. Springer. pp. 119–159. doi:10.1007/978-94-007-4807-1_6. ISBN 978-94-007-4806-4.
  7. ^ a b Findlen, Paula (2018). "Projecting Nature: Agostino Scilla's Seventeenth-Century Fossil Drawings". Endeavour. 42 (2–3): 99–132. doi:10.1016/j.endeavour.2018.07.004. PMID 30121139.
  8. ^ Findlen, Paula (2015). "The Specimen and the Image: John Woodward, Agostino Scilla, and the Depiction of Fossils". Huntington Library Quarterly. 78 (2): 217–261. doi:10.1525/hlq.2015.78.2.217. ISSN 0018-7895. JSTOR 10.1525/hlq.2015.78.2.217.
  9. ^ 로마노, 마르코, 역사생물학(2013년) : '감각으로 환멸을 느낀 허망한 추측: 이탈리아 화가 아고스티노 스킬라(1629~1700년)는 '변색된 것'이라고 불렀고, 화석을 올바른 해석으로 한때 바다에 살았던 '진실화된 유기체'로서 역사생물학: 국제 고생물학저널, DOI: 10.1080/08912963.2013.8257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