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루이스 갈라르돈
Alberto Ruiz-Gallardón알베르토 루이스 갈라르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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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장관 제1공증인왕국 | |
재직중 2011년 12월 22일 – 2014년 9월 23일 | |
수상 | 마리아노 라호이 |
선행자 | 프란시스코 카마뇨 도밍게스 |
성공자 | 소라야 사엔츠 데 산타마리아 (연기) |
마드리드의 시장 | |
재직중 2003년 6월 23일 – 2011년 12월 22일 | |
대리 | 마누엘 코보 |
선행자 | 호세 마리아 알바레스 델 만자노 |
성공자 | 아나 보텔라 세라노 마누엘 코보(중간) |
마드리드 지방 정부의 대통령 | |
재직중 1995년 6월 30일 – 2003년 11월 8일 | |
모나크 | 후안 카를로스 1세 |
선행자 | 호아킨 레기나 |
성공자 | 에스페란자 아귀레 |
하원 의원 | |
재직중 2011년 12월 13일 – 2014년 9월 24일 | |
선거구 | 마드리드 |
상원 의원 | |
재직중 1987년 7월 28일 – 1995년 7월 4일 | |
선거구 | 마드리드 |
마드리드 의회 의원 | |
재직중 1987년 6월 10일 – 2003년 6월 25일 | |
마드리드 시의회 의원 | |
재직중 1983년 5월 23일 – 1987년 6월 10일 | |
재직중 2003년 6월 14일 – 2011년 12월 22일 | |
개인내역 | |
태어난 | 알베르토 루이즈갈라르돈 히메네스 1958년 12월 11일 ) 스페인 마드리드 |
국적 | 스페인어 |
정당 | 국민의당 |
배우자 | 마리아 델 마르 우트레라 |
아이들. | 4 |
거주지 | 스페인 마드리드 |
모교 | 산파블로 CEU 대학교 |
직업 | 검사, 변호사 |
서명 |
알베르토 루이즈갈라르돈 히메네스(Alberto Ruiz-Gallardon Jiménez, 1958년 12월 11일 출생)는 스페인의[1] 정치인이자 전 법무부 장관이다. 그는 2003년에서 2011년 사이에 마드리드의 시장이었다. 보수성향의 국민당(PP)에 충실한 그는 이전에도 여러 지방 및 전국 입법기관에서 주도적인 인물로 활동해왔다. 2011년 12월 루이즈 갈라르돈은 마리아노 라호이의 취임 내각에서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2014년 9월 사임했다.
조기생활과 교육
루이즈 갈라르돈은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호세 마리아 루이스 갈라르돈은 국민당(AP) 지도부의 일원으로 현 국민당의 전신이었다. 예수회 학교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레쿠에르도의 마드리드 중등학교에 다녔고, 이후 유니버시아드 산파블로 CEU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전 프랑코 정권의 장관이었던 호세 우트라 몰리나(José Utrera Molina)의 딸 마리아 델 마르 우트레라와 결혼했다. 그들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다. 알베르토, 호세, 이그나시오, 로드리고.
알베르토 루이스 갈라르돈은 트리니다드 지메네즈 전 스페인 외무장관과 세실리아 아티아스 전 프랑스 영부인의 사촌이다. 그는 작곡가 아이작 알베니즈의 증손자다.
정치생활
변호사로서 루이즈 갈라르돈은 23세에 검사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시험을 치렀다. 그는 그 자리에 올라 28년 만에 2위를 차지했다. 그는 말라가 지방법원에 직책을 맡았고, 그곳에서 당의 법률 자문을 맡을 수 있는 휴가를 받을 때까지 잠시 동안 근무했다.
1983년 5월에 그는 마드리드 시의회에 선출되었다. 1986년 2월, 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 집행위원회에 가입했다. 같은 해 그는 총선에서 팔렌시아 상원의원 후보로 출마하지 못했지만 4명의 후보가 당선된 지역에서 성공적 PSOE 후보에 301표 뒤진 5위로 마쳤다.[2] 그 여파로 당 총장인 호르헤 베르스트린게가 은퇴하고 루이즈 갈라르돈은 당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임시 사무총장이 되었다.
다음 정치적 지위는 1986년 12월 마드리드 AP 지역 지도부가 그를 마드리드 자치 단체 회장 후보로 지명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1987년 2월 AP 제8차 임시국회는 안토니오 에르난데스 만차를 회장으로 임명했다. 루이즈갈라르돈은 임시 총서기직을 떠나 4명의 부대표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루이스 갈라르돈은 1987년 6월 10일 마드리드 의회의 부대표로 선출되었다. 불과 한 달 뒤 마드리드 의회가 지정한 대표단에서 상원의원으로 선출돼 AP의회 그룹 기구의 대변인으로 임명됐다. 1988년 10월 22일 루이즈 갈라르돈은 민주사회센터(스페인)와 의회규칙에 관한 합의를 놓고 만차 의장과 오해가 발생하자 당직을 사퇴했다. 1989년 1월 제9차 당대회에서 만차는 마누엘 프라가에 의해 의장으로 교체되었다. 국민당(PP)으로 재창당했고, 루이즈갈라르돈은 국가집행위원회에 임명돼 갈등규율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1989년 10월 29일 총선에 이어 루이즈 갈라르돈은 마드리드 상원의원을 계속 역임했으며, 이전 입법부와 마찬가지로 상원에서 PP의회 그룹을 이끌었다. 그는 제10대 의회에서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를 당 의장으로 하여 PP의 국가집행위원회에 복귀했다. 그는 또한 분쟁 위원회의 회장직을 유지했다. 1990년 4월, 카소 나세이로의 내사를 지휘했다. 이 조사는 몇몇 당 간부들을 제명하는 결과를 낳았다.
1993년 6월 6일 마드리드 총선에서 그의 당의 상원 후보 중 처음으로, 루이즈 갈라르돈은 다시 한번 상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PP의회 그룹의 대변인으로 계속 일했고, 이후 마드리드 의회에서의 상응하는 직책을 사임했다.
마드리드 공동체 회장
1995년 5월 28일 루이즈 갈라르돈은 PP 티켓을 가지고 마드리드 공동체의 회장에 출마하여 처음으로 의회에서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했다. 그는 한 달 후 마드리드 의회에서 마드리드 공동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루이즈 갈라르돈은 1999년 선거에서 재선에 출마해 다시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지역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루이즈 갈라든은 특히 그의 당의 몇몇 지도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의 겉보기에는 온건한 태도 때문에 높은 인기를 얻었다. 2004년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가 총리 재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밝힌 데 이어 갈라르돈은 주류 언론에서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된 PP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마드리드의 시장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 총리의 격려를 받은 갈라르돈은 2003년 마드리드 시장 선거의 PP 후보가 되었다. 그는 과반수 득표로 입후보에 성공했다 그의 첫 번째 결정 중 하나는 그의 미래 도시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시세를 인상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현지인들이 "파라오"라는 별명을 가진 시장은 M30 고속도로 일부의 지하화, 만자나레스 강둑의 재개발, 쇠퇴하는 역사적 도심 지역의 사실상 젠트리피케이션 추진, 기존 재정법 개혁 등을 담은 마드리드 도시재생 계획을 수립했다. 사실, 2012년 하계 올림픽을 위한 마드리드의 입찰은 전임자인 호세 마리아 알바레스 델 만자노에 의해 계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획의 가장 야심 찬 구성 요소로 간주되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옛 훈련장에 건설중인 4개의 고층 건물과 같은 몇몇 다른 프로젝트들은 그의 도시 계획을 증가시켰다.
2006년 5월, 카르멘 세르베라 남작 부인은 파세오 델 프라도를 개혁하려는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를 공개적으로 벌였는데, 남작 부인은 자신의 공동 경영자인 티센 보네미사(Museo Tyssen-Borenemisza)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2008년 개발
루이즈 갈라르돈은 PP의 차기 지도자로 유력시되어 왔으며, 그의 온건한 견해는 그를 여론 조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만들었으며, 지도자 경쟁에서 마드리드 공동체의 회장인 에스페란자 아귀레르를 격파했다. 2008년 총선을 앞둔 시기에 루이즈 갈라르돈은 PP의 마드리드(스페인 의회 선거구) 의회 명단에 이름을 올리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시장으로서, 당 내규가 10만 명이 넘는 도시들의 시장들을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금지했기 때문에, 그가 그 명단에 포함된 것은 예외적인 조치였을 것이다. 이번 조치는 아귀레르가 국가부대표에 출마하기 위해 마드리드 대통령직에서 사임할 의사를 밝힌 것에 의해 승인되지 않았다(지역 국회의원들은 코르테스 제너럴레스(Cortes Generales)에서 제외된다). 2008년 1월 15일, 미스터 라조이(PPP의 리더)는 갈라르돈은 총선거를 위한 PP 목록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아귀레 부인은 갈라르돈 씨와의 치열한 내전에서 승리했었다. 루이즈 갈라르돈은 이 발표에 이어 다음 날 대응을 누그러뜨렸지만 정계 은퇴 의사를 내비쳤고 2008년 3월 총선 이후 자신의 정치적 미래에 대해 "반성하겠다"고 밝혔다.[3]
3기. 시장 및 부시장
알베르토 루이즈 갈라르돈은 2011년 지방선거에서 다시 마드리드 시의회에서 57석 중 31석의 절대다수를 차지해 그때까지 스포츠 담당 국무장관을 지냈던 사회주의 후보 제이미 리사베츠키를 물리쳤다. 아이유는 5석에서 6석으로 대표성을 늘렸고 PSOE는 18석 중 3석을 잃었고 5석을 차지한 UPYD는 사상 처음으로 마드리드 시의회 의원이 됐다.
루이즈 갈라르돈은 2011년 스페인 총선에서 마드리드 의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자리를 차지한 아버지를 기리는 공로로 4위를 택하며 국민의당 후보 4위에 올랐다. 루이즈 갈라르돈과 함께, 그 목록의 다른 18명의 회원들은 스페인 하원의원대회에서 의석을 얻었다.
법무부 장관
2011년 12월 21일, 그는 마리아노 라호이로부터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2011년 11월 20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PP의 첫 번째 정부의 일부를 구성했다. 장관으로 임명된 바로 그날, 2011년 12월 22일, 그는 마드리드 시장직을 떠나, 임시 시장인 마누엘 코보에 의해 교체되었다. 2011년 11월 27일, 31표를 얻은 의회 총회는 아나 보텔라를 후임으로 선출했다.[4]
그는 법무부 장관으로 처음 국회에 출석하면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시한에 근거한 법률인 이전 사파테로 정부가 승인한 낙태죄에 대해 가톨릭과 국민당(특히 g와 관련해)이 크게 비판한 개혁 의사를 밝혔다.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으로 낙태를 할 수 있는 16-18세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단체들은 1985년 법안으로 복귀했다. 이 법에 의해 여성은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이유를 불러야 했다.[5]
그는 또한 사법부 총회의 발성이라고 불리는 12명의 판사들이 선출된 방식을 바꾸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1995년 판사들의 낡은 직선제로 되돌아갔다(전 PP 정부 시절인 2001년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가 이끄는 이전 PP 정부 시절 약간의 수정안이 통과되면서, 법관대표회의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12명의 판사들이 선출된 방식을 바꾸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법관 협회가 제출한 31명의 후보자 명단에서 법원이 선거를 확립한 PSOE는 12명의 성악가들이 판사들의 만연하고 보수적인 치안 판사 전문 협회로만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5]
루이즈 갈라르돈은 2004년 전 사회주의 정부가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해 도입한 동성결혼법에 대해 가톨릭교회와 국민당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추진된 시위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법정이 통과되자마자 국민의당의 상고심에 대한 재판소.[5]
2012년 5월 30일, 정부는 법무부가 개발한 초안 법률의 승인을 발표하는데, 이 초안에 따라 법정 수수료가 50에서 750유로 인상될 것이다. 정부에 따르면, 그것의 목적은 법원의 포화상태를 완화하는 동시에, 법적 원조의 비용을 부담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수단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갈등을 법원에 도달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당에 따르면, 이번 인상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사법행정에 대한 접근을 제한한다고 한다. 사법기관의 부담을 줄이는 것은 물론 절차 연장만을 추구하는 행위를 줄이기 위해 '2차 사례' 영역에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따라서, 민사 및 행정 문제에서의 호소는 500유로까지 상승하고, 그 같은 분야의 매칭 프로세스는 600유로에서 1200유로까지 증가한다. 노동법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무료였던 상고심과 소송사건에 대해서는 각각 500유로와 700유로의 혐의가 적용될 예정이다.
법관총회의 호세 마누엘 베니테스 의원이 공금 유용 의혹으로 카를로스 디바르 대통령(푸에르토 바누스와 호텔 여행에 약 6000유로를 썼을 것, 부인하지 않았지만 공식적 성격이라고 주장)을 제기한 고소장에 대해 루이즈 갈라르돈은 결국 기각했다. 아이유(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PSOE도 가입)가 제기한 중의원 전 디바르 출두 청원에 반대하면서 CGDG 대통령이 의회에 가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의회가 사법부의 정부 기구에 대한 정치적 통제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사법부 구성원의 책임은 사법부 자체의 총회 내에서만 요구되어야 한다.[6]
2012년 11월 갈라르돈은 카탈루냐 경찰 4명에 대해 "사면권은 정부의 힘"이라며 정부의 사면을 정당화했다. 이 4명의 경찰관은 이전에 시민을 고문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각각 징역 4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2014년 9월 23일 그는 법무부 장관직을 사임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결정은 논란이 되고 있는 낙태에 관한 법안이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로부터 부결된 후 나왔다. 그는 또한 하원의원직에도 자리를 양보했다. 빈 자리는 발렌티나 마르티네스 페로가 차지했다.[7]
레조 케이스
2018년 4월 26일 마드리드 커뮤니티에서 PP 지도자들이 연루된 비리 사건인 케이스 레조(Case Lezo)에 연루돼 판사에게 귀책 처분을 받았다.[8] 그로부터 1년 뒤인 2019년 5월 30일 8명의 자문위원과 함께 면직됐고, 이 역시 조사를 받고 있었다.[9]
참고 항목
참조
- ^ "Gallardón sobre el indulto a los 'mossos': "Tiene todas las condiciones favorables"". El Pais. 29 November 2012. Retrieved 17 May 2013.
- ^ 2010년 3월 24일 웨이백 머신에 보관된 스페인 상원의원 선거 결과
- ^ (스페인어) Gallardon renunsara a la politica tras ser excluido por Rajoy de las listas del 9-M, El Mundo, 16-1-2008
- ^ (스페인어) Los 31 votos del PP le bastan a Ana Botella para ser Alcaldesa de Madrid.
- ^ a b c Ediciones El País (5 February 2012). "Rajoy juega a la contrarreforma". EL PAÍS.
- ^ "El Gobierno dispara las tasas judiciales para los recursos en civil y social". El País. 30 March 2012.
- ^ elEconomista.es (14 October 2014). "Valentina martínez ferro ya es diputada en sustitución de gallardón - EcoDiario.es". ecodiario.eleconomista.es (in Spanish). Retrieved 9 October 2019.
- ^ 엘쥬는 알베르토 루이즈 갈라르돈 콤모에서 엘 '카소 레조'를 조사한다. (스페인어)
- ^ 알베르토 루이즈 갈라르돈 데 알베르토 델 '카소 레조' 레반타 라 임푸타시온 (스페인어)
- (스페인어) Pilares Ministos – Quuén es Quuén en la politica - Alberto Ruiz-Gallardon in the Wayback Machine(2004년 10월 27일) (현재 폐기된 tematicos.universia.e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