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제단
Altar of Victory승리의 제단(라틴어: 아라 빅토리애)는 로마 원로원 의원(큐리아)에 위치했으며, 승리 여신의 금상을 소장하고 있었다. 이 제단은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나머지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
역사
이 동상은 기원전 272년 피리히 전쟁 중에 잡혔으며[by whom?] 원래 나이키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날개가 달린 여신을 묘사했는데,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월계관을 드리우기 위해 내려간다.
현대 역사학자는 제단과 동상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반성한다.
- 이 승리의 제단에서는 원로원 의원들이 분향을 하고, 매년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며, 그들의 선서를 하고, 각각의 새로운 황제의 즉위 서약을 했다. 따라서 그 조각상은 로마 국가와 로마 종교 사이의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 중 하나가 되었고 또한 로마의 위대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그녀의 희망을 생생하게 일깨워 주었다.[2]
제거
제단은 357년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큐리아에서 제거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의 전통 종교를 고수하기 위해 개종한 후 유일한 황제였던 율리우스 황제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 제단은 382년에 그라티안에 의해 다시 제거되었다.
그라티안의 사후 384년 로마의 종교적 전통을 보존하고자 했던 원로원 의원 겸 로마 총독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시마코스(Quintus Aurelius Symmacus)가 새로운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제단 복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3] 밀라노의 황실에서는 젊은 황제가 그 요청을 부인했다. 밀라노의 앰브로즈 주교는 성공적으로 발렌티니안을 설득하여 제단 보존 요청을 거절했다.[4] 그러나 토론에 참여하긴 했지만 제단을 철거한 결의안의 주역은 아니었다.[5]
제단을 복원해 달라는 더 이상의 탄원서는 391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칙령에 의해 제국에서 실천된 유일한 종교임을 확실히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왜곡되었다. 밀라노의 파울리누스는 암브로스의 삶에서 이 제단은 유제니우스가 단명 통치 기간(392–394)에 복원했다고 말했다.
클라우디안은 403년에 글을 쓰면서 (제단이 아니라면) 동상이 당시 상원에 있었다고 언급했다.[6] 셰리단은 "일부에서는 제거와 복원이 승리의 제단과 승리의 여신상을 모두 지칭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른 사람들은 그 동상이 그 자리에서 제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제단이 제거되었을 때 불상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고대의 저자들에게는 아무런 진술이 없으며 이 점에 대한 확신은 도달할 수 없다."[7]
셰리단은 또 코덱스 테오도시아누스 16세, 10세, 19세 등을 인용해 "이교도의 동상에 대항하는 408년의 법칙에 의해 마침내 제단과 승리의 동상의 운명이 봉합됐다"고 제안한다.[8]
메모들
참고 문헌 목록
- Sheridan, James J. (1966). "The Altar of Victory - Paganism's Last Battle". L'Antiquité Classique. 35 (1): 186–206. doi:10.3406/antiq.1966.1466.
- 리처드 클라인: 시마코스. 아이네 트라기슈 게스탈트 데 아우스게헨덴 하이덴툼스 다름슈타트(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Impulse der Forschung, 밴드 2]) 1971년 ISBN 3-534-04928-4.
- Richard Klein: The Streit um den Victoriaaltar. Die dritte Antelio des Symmacus and die Briefe 17, 18, 57 des Mailénder Bischofs Ambrosius. 다름슈타트 (WBG [텍사스수르 포르스충 밴드 7]) 1972, ISBN 3-534-0516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