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라 전투

Battle of Heraclea
헤라클라 전투
피리히 전쟁의 일부
Pyrrhic War Italy en.svg
피리히 전쟁의 전투 장소와 장소
날짜기원전 280년 7월
위치
결과 그리스의 승리
호전성
에피루스
마그나 그라시아
로마 공화국
지휘관과 지도자
피루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레비누스

35,500명

4만 5천 명

  • 로마 중보병 2만 명
  • 연합군 중보병 1만6800명
  • 연합군 경보병 2400명
  • 2400~6000명의 기병[1]
사상자 및 손실
4000–11,000명 사망 7000~15,000명 사망
1800명 캡처

헤라클라 전투는 기원전 280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레비누스의 지휘 아래 로마인들과 에피루스 왕 피루스의 지휘 아래 에피루스, 타렌툼, 투리, 메타폰툼, 헤라클라에서 온 그리스인들의 연합군이 전개되었다. 비록 이 전투는 그리스인들의 승리였고 그들의 사상자는 로마인들보다 낮았지만, 그들은 외국 땅에서 대체하기 어려울 많은 베테랑 병사들을 잃었다.[2]

배경

타렌툼은 그리스의 식민지였으며, 마그나 그라시아의 일부였다. 필로차리스나 아이네이시아스 휘하의 민주파인 타렌툼의 주도파 의원들은 로마에 반대했는데, 로마인들이 타렌툼에 들어가면 그리스인들이 독립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타렌툼의 그리스인들은 제3차 삼니트 전쟁 이후 로마의 확장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기원전 290년 삼니족이 항복한 후 로마인들은 아풀리아루카니아에 많은 식민지를 세웠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식민지는 비너스시아였다. 기원전 282년, 삼네인, 루카니아인, 브루트인, 투리인과의 전투 끝에 로마군은 크로톤, 로크로이, 레기움 등의 이탈리아 그리스 식민지로 들어갔다. 타렌툼 출신 민주당원들은 로마가 갈리아인, 루카니아인, 에트루리아인, 삼니트인, 브루트인과의 전쟁을 끝내자마자 타렌툼으로 들어갈 것을 알고 있었다. 타렌타인족과 관련된 또 다른 사건은 정권을 잡은 투리족의 귀족파가 로마의 수비대를 그들의 도시로 초청했다는 것이다; 모든 마그나 그라시아 식민지의 참조자였던 타렌타인족은 이 사실에 대해 깊이 우려했다.

타렌툼의 두 번째 파벌은 귀족파가 권좌에 복귀하게 될 것이므로 로마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아기스가 이끄는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직접 항복하지 못하고 인구에 인기가 없어졌다. 기원전 282년 가을, 타렌툼은 그들의 디오니소스의 축제를 기념했다. 바다 앞의 극장에서 그들은 타란토 만으로 들어가는 로마의 수비대를 위한 군인과 보급품을 갖춘 로마선 열 척을 보았다. 케치크에 따르면 타렌티네 귀족들은 로마의 지휘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에게 민주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할 것을 요구했고, 이는 귀족들이 항복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한다. 타렌타인은 화가 났는데,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타란토 만으로 항해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고, 로마 함선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해군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배 몇 척이 침몰했고, 한 척이 포획되었다.

타렌타인 족은 로마를 상대로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에피루스 왕 피루스의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타렌툼의 군대와 함대는 투리(Turii)로 이동하여 그곳의 민주주의자들이 귀족들을 추방하는 것을 도왔다. 투리에 배치된 로마 수비대는 철수했다.

로마인들은 외교 사절단을 보내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 포로들을 다시 데려갔으나 협상이 갑자기 끝나 로마는 타렌툼에 선전포고를 했다. 기원전 281년 루키우스 에밀리우스 바불라의 지휘를 받은 로마 군단이 타렌툼에 들어가 약탈했다. 타렌툼은 삼나이트와 살렌타인 증원군과 함께 로마와의 전투에서 패했다. 전투가 끝난 후 그리스인들은 아지스를 선택해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외교회담을 시작했다. 이들 회담은 밀론의 지휘를 받는 이피루스 출신 군인 3000여 명이 이 마을에 진입하면서 결렬되기도 했다. 로마의 집정관은 철수하여 그리스 선박들의 공격으로 손실을 입었다.

피루스는 타렌툼이 그들에게 빚지고 있었기 때문에 돕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일찍이 그가 코르시라 섬을 정복하는 것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로마와 분쟁의 역사를 가진 모든 민족인 삼네인, 루카니아인, 에트루리아인, 움비아인, 브루트리아인, 그리고 일부 일리리아 부족의 도움에 의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원전 285년에 잃었던 마케도니아를 다시 재정비하는 것이었지만, 병사를 모집할 만한 충분한 돈이 없었다. 그는 타렌툼을 도운 다음 시칠리아로 가서 카르타고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이탈리아를 점령한 후에 그는 강한 군대를 조직하고 마케도니아를 사로잡기에 충분한 돈을 갖게 될 것이다.

준비

피루스는 에피루스를 떠나기 전에 동맹을 맺고 프리텐더로부터 마케도니아 왕위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로 병사와 돈을 빌렸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우방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피아푸스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왕도 9,000명의 군인과 50마리의 전쟁 코끼리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한 테살리로부터 기병대를 모집했고, 로도스로부터 궁수들과 슬링거들을 모집했다. 그들의 통치자들이 에피루스와의 전쟁을 피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280년 봄에 피루스는 이탈리아에 손실 없이 상륙했다.

피루스의 이탈리아 도착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8개 군단을 보조 병력과 함께 동원하여 8만여 명의 병사를 동원했다. 그들은 그것을 네 개의 군대로 나누었다.

  • 바불라의 휘하에 있는 한 부대는 삼니파와 루카니아 사람들을 산만하게 하여 피루스의 군대에 합류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비너스시아에 배치되었다.
  • 로마를 확보하기 위해 2군단이 남겨졌다.
  • 집정관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의 지휘를 받는 제3군은 그들과 피루스의 동맹을 피하기 위해 에트루리아인들을 상대로 진군했다.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레비누스의 지휘를 받는 4군단이 타렌툼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또한 루카니아를 약탈했다.

푸블리우스 라에비누스는 그리스 식민지인 칼라브리아에서 피루스를 잘라내어 로마에 대항한 그들의 봉기를 피하려는 의도로 타렌티인들이 세운 도시 헤라클라를 향해 이동했다!

아미스와 전투훈장

이것은 헤라클라에게 가능한 전투 순서다.[3]

에피루스

사령관: 피루스

  • 밀론 지휘 아래 3000명의 하이프시스트
  • 프톨레마이오스가 준 마케도니아 병사 5000명을 포함한 2만 명의 팔랑족, 에피로테스
  • 6,000명의 타렌틴 부담금 호플라이트
  • 테살리안 부대와 타렌틴 기병 1000명을 포함한 기병 4000명
  • 궁수 2000명
  • 로디언 슬링거 500대
  • 20마리의 코끼리들이 탑을 가지고 군대를 가지고 있다.

로마 공화국

로마 공화국의 군대의 처분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4][5]

사령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레비누스

  • 보병: 약 8개 군단을[6][7] 다음과 같이 나눈다.
    • 총 20,000명의 보병에 대해 각각 4,200-5,000명의 보병으로[8][9] 구성된 로마 시민군 4개 [10]군단
    • 연합군 4개 군단: 소사이어티(이탈리아 동맹군, 줄의 날개에 배치) 총 16,800명[1]
    • 브루트, 캄파니아 동맹국: 2400 경보병[1]
  • 기병, 두 가지 다른 설명:
    • 에콰이트 600명(로마 기병)[9]과 연합군 이탈리아 기병 1800명([11]총 2.400명)에 이르는데,[10] 이 중 일부는 진영(캐스트럼) 방어에 배치돼 초기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 다른 출처에서는 기병대를 총 6천 명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하였다.
    • 로마 기병 1200
    • 연합군 기병대 3600
    • 이탈리아 남부 기병 1200(빛 기병)[1]

전투

피루스는 동맹군의 증원군을 기다리는 동안 로마군을 향해 진군하지 않았다. 그는 증원군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자 판도시아와 헤라클라 사이에 있는 시리스 강(현대 신니) 근처의 평야에서 로마인들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피루스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싸움 전에 그는 로마 집정관에 외교관을 파견하여 로마와 이탈리아 남부의 인구 사이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동맹국들이 자신을 법관으로 인정했고 로마인들에게도 같은 인정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로마인들은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들이 캠프를 차린 시리스 강 오른쪽에 있는 평원으로 들어갔다.

피루스가 타렌툼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남겨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피루스는 헤라클라에서 약 25~3만5000명의 병력을 주둔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로마인들이 강을 건너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어 그의 공격을 준비할 시간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시리스의 왼쪽 둑에 자리를 잡았다. 는 강 근처에 약간의 경보병 부대를 세워 로마인들이 건너기 시작한 때를 알려주고, 먼저 기병과 코끼리로 그들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발레리우스 레비누스는 기병, 벨라이트, 스피어멘 등 약 4만2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아주 다른 두 개의 전쟁 거인 즉 로마 군단마케도니아 팔랑스가 충돌한 것은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새벽에 로마인들은 시리스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측면에서는 로마 기병대가 도망칠 수밖에 없는 정찰병과 경보병을 공격했다.

피루스는 로마인들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안 기병대를 이끌고 로마 기병을 공격했다. 펠타스트와 궁수, 중보병 등을 거느린 그의 보병들도 행진을 시작했다. 에피로테 기병대는 성공적으로 로마 전투 대형을 교란시킨 후 철수했다. 피루스의 펠타스트, 슬링거, 궁수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고 사리사를 휘젓는 팔랑스가 공격하기 시작했다. 피루스는 수적인 면에서는 적지만 팔란스는 군단보다 설계상 더 깊었기 때문에 보병대는 길이가 로마인과 거의 맞먹었다.

팔랑손은 일곱 차례 공격을 했으나 군단을 뚫지 못했다. 그것은 이제까지 마주쳤던 그 어떤 적보다 강한 적을 만났었다. 로마인들은 일곱 차례나 공격을 했지만, 팔랑어를 꺾을 수는 없었고, 전투는 공중에 매달렸다. 어느 순간, 전투는 너무 치열해져서 피루스는 전투 중에 쓰러지면 그의 군인들이 실의에 빠져 달아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경호원 중 한 명과 갑옷을 교환했다. 이 경호원은 그 후 살해되었고, 피루스가 쓰러졌다는 소문이 대열로 퍼졌다. 그의 힘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로마인들은 일이 돌아가자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질렀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피루스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맨머리인 채 부하들의 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이 용맹함이 그들의 결의를 강화시켰다. 그리스 라인에서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고, 전투는 계속되었다.

행동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피루스는 지금까지 예비역인 그의 전쟁 코끼리를 배치했다. 로마 기병대는 그의 옆구리를 너무 강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전에 보지 못한 이 이상하고 음침한 생물들을 보고 놀란 말들은 질주하여 로마 군단을 대패시켰다.(그 후 로마인들은 이 첫 번째 만남의 장소 뒤에 코끼리를 루카 보스, '루카니아 소'라고 불렀다.) 그 후 피루스는 흐트러진 군단들 사이에서 자신의 테살리안 기병을 발진시켜 로마군의 패배를 완성시켰다. 로마인들은 강을 건너 다시 쓰러졌고 피루스는 들판을 잡았다.

디오니시우스의 의견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15,000명의 군인을 잃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혔다. 히에로니무스는 7,000명을 말한다. 히에로니무스에 따르면 디오니시우스는 약 1만 1천 명의 병사로 피루스의 손실을 집계했다. 어느 쪽이든, 이것은 그가 로마를 상대로 한 피르릭의 승리 중 가장 이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여파

남이탈리아로부터의 전투 지원군이 피루스와 합류했다. 그와 함께하고 싶었던 레기움의 그리스인들은 이 마을의 통치자로 선포된 데키우스 비벨리우스의 지휘 아래 로마 군인들에게 학살당했다. 그리고 피루스는 로마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캄파니아의 많은 작은 성읍들을 점령하였고, 그의 군대는 라티움을 약탈하였다. 그의 행진은 로마에서 이틀 떨어진 아나그니에서 중단되었는데,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 휘하의 다른 로마 영사군을 만났다. 피루스는 싸울 병사가 충분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했고, 레비누스와 바불라가 아마도 그의 뒤를 따라 행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 그는 물러났고 로마인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참고 항목

메모들

  1. ^ a b c d "Heraclea".
  2. ^ 레지옹 대 팔랑스, 마이크 콜
  3. ^ 조나스, 제프 "초기 충돌: 공화당 로마 vs. 2007년 1월 20일 에피루스의 피루스" AncientBattles.com. 2009년 7월 24일에 검색됨.
  4. ^ 이 자료는 군단 4200명, 군단 300명의 로마 기사단의 이론적 일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5. ^ (영어로) 제프 조나스, 이니셜 클래시: 공화당 로마 vs. 피루스
  6. ^ 피가니올, 페이지 183
  7. ^ 브리치, 페이지 127
  8. ^ 리비(Ab Urbe 양서, 8세, 8세, 14세)는 라틴 전쟁 당시 이 군단은 보병 5000명과 기병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쓰고 있다.
  9. ^ a b 폴리비우스 6세, 20, 8-9
  10. ^ a b P. 코널리, 10-11페이지.
  11. ^ 폴리비우스 6세, 26세, 7세

참조

좌표: 40°13′12″N 16°40′11″e / 40.22,000°N 16.66972°E / 40.22000; 16.66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