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눔 전투
Battle of Sentinum센티눔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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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삼나이트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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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로마 공화국 | 삼니움 세논 굴스 | ||||||
지휘관과 지도자 | |||||||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 † | ||||||
힘 | |||||||
ca. 4만 명 4개 군단(18,000-24,000 로마인) ca. 동맹군 2만 명 | ca. 4만[1] 명 | ||||||
사상자 및 손실 | |||||||
8700명 사망 | 2만5000명 사망 8,000명 캡처 |
센티눔 전투는 기원전 295년 센티눔(이탈리아의 마르체 지역의 현대 도시 사소페라토 옆) 근처에서 벌어진 제3차 삼나이트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로, 로마인들은 삼나이트인, 에트루리아인, 움비아인과 세노네 가울의 가공할 연합을 극복했다. 로마인은 부족 연합군(에트루리아인, 움비아인, 세노네스족이 전쟁에서 손을 뗀)을 분열시키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로마인들이 삼니족을 완전히 이길 수 있는 길을 닦았다. 센티눔 전투에 참여한 로마인들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의 지휘를 받았다.
배경
제3차 삼나이트 전쟁은 루카니아에서 온 사절들이 삼나이트인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로마가 개입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첫해 직전과 도중에 로마도 에트루리아인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기원전 297년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이 평화를 위해 소송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 결과 두 로마 영사는 모두 삼니움으로 진군하여 그곳으로 작전을 집중하였다. 퀸투스 파비우스는 트리퍼넘 전투에서 삼니족을 격파했고 푸블리우스 데키우스는 말레벤툼 근처의 아풀리아에서 삼니테 군대를 격파했다. 그 후 두 영사는 4개월 동안 삼니움을 황폐하게 했다. 파비우스도 시메트라(위치 미상)를 붙잡았다.
기원전 296년 퀸투스 파비우스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는 프로콘솔로 만들어졌고 삼니움에서 전쟁을 수행할 군대의 지휘권을 6개월 연장 받았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는 삼니움 군대를 그 영토 밖으로 몰아낼 때까지 삼니움을 황폐화시켰다. 샘나이트군은 거절당한 에트루리아인들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이전의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에트루리아 북쪽으로 향했다. 삼나이트 사령관인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는 에트루스칸의 평의회가 소집될 것을 주장했다. 대부분의 에트루스칸 도시국가들은 합동 전쟁에 찬성했다. 에트루리아 인근의 움브리안 그룹도 가세해 갈릭 용병을 고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2]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에쿠스는 2개 군단과 1만5000명의 연합군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로 출발했다. 다른 집정관 루치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는 이미 2개 군단과 1만 2천명의 아군을 거느리고 삼니움으로 떠난 뒤였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약간의 좌절을 겪었고 그래서 루시우스 볼룸니우스는 에트루리아로 가서 도왔다. 두 영사는 함께 에트루리아인들을 물리쳤고 루치우스 볼룸니우스는 프로콘술선으로의 임명이 만료되려 하자 삼니움으로 돌아왔다.[3] 한편 삼니파는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캄파니아의 로마 영토와 동맹군을 급습했다. 볼룸니우스는 습격대를 격퇴했다. 그러나 에트루리아 인들이 무장하고 있다는 소식 때문에 로마에 경종을 울렸으며, 로마에 대항하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삼니파(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 휘하)와 움비아 인들을 초대했다. 또한 이들 네 민족 사이에 실제 연합이 이루어졌다는 보고와 "거대한 가울의 군대가 있다"는 보고가 뒤따랐다는 보도도 있었다.[4]
로마가 이처럼 대규모의 연합군과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라는 두 최고의 군 지휘관이 다시 영사로 선출되었다(BC 295년). 그들은 에트루리아에서 4개 군단과 연합군 보병과 기병대(캄파니아군 1000명 언급)의 큰 몸집을 가지고 전쟁을 치렀다. 동맹군은 훨씬 더 큰 군대를 주둔시켰다. 루키우스 볼룸니우스의 지휘는 삼니움에서 2개 군단으로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1년간 장기화되었다. 리비는 그가 그렇게 큰 병력을 이끌고 그곳에 간 것은 삼니움에서 로마의 기습에 대응하고 에트루리아로의 병력 배치를 제한하기 위한 기분전환 전략의 일부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마를 보호하기 위해 프롤레타르가 이끄는 예비군 2명이 팔리스칸 지구와 바티칸 언덕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5]
에트루리아인, 삼니트인, 움브리안인은 아펜닌 산맥을 넘어 센티눔으로 다가갔다. 그들의 계획은 샘나이트와 세노네스족이 로마인과 교전하고,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인들이 전투 중에 로마 진영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클루시움 출신의 탈영병들은 퀸투스 파비우스에게 이 계획을 알렸다. 영사는 또 다른 기분전환 전략으로서 팔레리야와 바티칸의 군단에게 클루시움으로 진격하여 영토를 황폐화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에트루리아 인들을 센티눔에서 끌어내어 그들의 땅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리비는 그들의 출발과 함께 두 적군이 너무나 고르게 일치해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안이 참석했더라면 로마인들에게 재앙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언자 그나이우스 풀비우스는 에트루리아인들을 물리쳤다. 페루시아와 클루시움은 최대 3,000명을 잃었다.[6]
전투
양군은 센티눔 평원에 도착했지만 전투를 하기 위해 이틀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들의 군대의 열의를 억제하지 못하고 로마인들이 공격했다. 세노네스 족은 오른쪽에, 삼니 족은 왼쪽에 섰다. 로마 쪽에서는 퀸투스 파비우스가 오른쪽을, 왼쪽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가 지휘했다.
퀸투스 파비우스는 이 전투를 인내의 시험으로 삼고 적군이 깃발을 세우기를 기다리기 위해 방어적으로 싸웠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는 더욱 공격적으로 싸우며 기병전하를 명령했는데, 기병전투는 세논 기병대를 두 번이나 후퇴시켰다. 두 번째 충전을 하는 동안 그들은 적 보병에게 도착했지만, 세논 병거에 의해 역충전되어 대패했다. 데키우스의 보병 대열은 병거와 세논 발에 의해 끊어졌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는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이 용어는 군대 지휘관이 신들에게 기도를 올리고 적진에 몸을 날려 자신의 군대가 매우 궁핍할 때 자신을 효과적으로 희생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의 아버지는 베수비오 전투(기원전 340년)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 이 행동은 퀸투스 파비우스가 돕기 위해 불렀던 두 명의 예비군인이 합류한 로마 좌파를 자극했다.
오른쪽에서 퀸투스 파비우스는 기병대에게 삼나이트 날개를 앞질러 측면으로 공격하라고 말하고 보병들에게 앞으로 밀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른 예비군들을 불러들였다. 삼니 족은 부숴져서 세논 선을 지나 달아났다. Senones는 테스토도(토르토즈) 형태를 형성했다. 그곳에서 남자들은 앞과 위에 방패로 덮인 콤팩트한 형태로 방패를 정렬했다. 퀸투스 파비우스는 500명의 캄파니아 랜서들에게 후방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한 군단의 중간선에 의한 밀림과 다른 기병부대의 공격과 결합될 예정이었다. 한편 퀸투스 파비우스와 나머지 군대는 삼나이트 진영을 폭풍으로 점령하고 후방의 세노네스 진영을 차단했다. 세논은 패배했다. 리비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8,700명의 군인과 그들의 적 2만명을 잃었다.[7]
여파
리비는 일부 작가(작품을 잃어버린 작가)가 전투의 규모를 과장했다고 언급하면서 움브리아인들도 참가하여 적에게 보병 6만 명, 기병 4만 명, 기병 1천 명을 주었으며, 루시우스 볼룸니우스와 그의 두 군단도 전투에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리비는 대신 루시우스 볼룸니우스가 삼니움에서 전선을 잡고 있었고 티페르누스 산 근처에서 삼니테 군대를 격파했다고 말했다. 전투가 끝난 후, 5,000명의 삼니 자손이 센티눔을 떠나 파엘리니 땅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그 지역 주민들이 그들을 공격해서 1,000명의 사람을 죽였다. 퀸투스 파비우스는 푸블리우스 데키우스의 군대를 떠나 에트루리아를 지키고 로마로 가서 승리를 축하했다. 에트루리아에서는 페루시니가 전쟁을 계속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프롤레토르로서 푸블리우스 데키우스의 군단장으로 파견되었고 퀸투스 파비우스는 페루시니에 대항하여 격파하였다. 삼니족은 리리스 강 주변(포미아에와 베시아)과 볼터누스 강을 공격했다. 그들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루치우스 볼룸니우스가 추격했다. 그들은 연합하여 카푸아 근처의 카이티아 근처에서 그들을 물리쳤다.[8]
로마의 승리로 패배한 연합군이 해체되었다. 에트루리아인, 움브리아인, 세논 가울스는 전쟁에서 철수했다. 삼니족은 동맹군을 잃은 것 외에도 많은 사상자를 냈다. 로마인들은 샘나이트와의 다른 전투에서 승리했다. 5년 후 끝난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로마인들은 삼니움을 황폐화시켰고 삼니파는 항복했다.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많은 부분과 남부 이탈리아의 일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참고 사항 및 참조
참고 문헌 목록
리비, 로마의 이탈리아 전쟁: 책 6-10 (옥스포드의 세계 고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2103년 ISBN978-0199564859
스컬라드, H.H. 로마 세계 753-146의 역사.
외부 링크
- 로마사 개요
- "센티눔 전투" 볼드윈 프로젝트에서의 로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