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리이

Falerii
산타 마리아 디 팔레리 교회의 삽화.

팔레리이(현재의 프란체라 로마)는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50km(31mi) 떨어진 에트루리아 남부에 있는 도시였으며, 베이(티베르 강 근처의 주요 에트루스카 도시국가)에서 34km(21mi), 고대 플라미니아를 거쳐서 서쪽으로 약 1.5km(0.9mi) 떨어진 도시였다. 그곳은 팔리시족의 주요 도시였는데, 그 언어는 팔리스칸어였으며 라틴계-팔리스칸어군에 속해 있었다. 카페나, 네페트, 수트리움의 마을을 포함하는 아거 팔리스쿠스(팔리스칸 국가)는 몬티 시미니에 가까웠다.

역사

창간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Argive의 기원이었다. 인구인 팔리시족에트루리아인과 다른 민족이었다는 스트라보의 주장은 여기서 발견된 비문의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것들은 라틴어 사투리로 쓰여졌다. 남아 있는 비문의 대부분은 기원전 4세기 후반과 기원전 3세기 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팔리스칸 언어는 "오랫동안 로마인의 팽창뿐만 아니라 에트루스탄 문화의 지배"에서 살아남았다.[1]

로마와의 갈등

기원전 5세기

팔레리이가 로마와 비교적 가까운 관계로 팔리스칸인들은 로마가 자신들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5세기 로마와의 분쟁에서 베이피데나의 에트루스칸 도시들(베이와 가까운 강 건너편 둑에 있었다)을 지원하였다. 리비는 "이 두 주[팔레리와 인근 카페나]가 거리 면에서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그들은 만약 베이가 함락되면 로마가 전쟁을 일으킬 다음 주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고 언급했다.[2] 피데네가 자주 관여했던 로마와 베이의 끝없는 갈등의 역사가 있었다. 로마인들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피데나에 식민지를 두었었다. 기원전 437년 피데네는 반란을 일으켜 로마 정착민들을 공격하고 베이의 편을 들었다. 피데나에 파견된 로마 사절들은 베이의 왕의 명령에 따라 살해되었다. 로마인들은 피데나에 대해 진보했다. 팔리스칸인들은 지원군을 보냈다. 비엔테스와 피데나테족(비이족과 피데나의 주민)은 전쟁을 연장하고 싶었지만 팔리칸족은 투혼을 원했다. 로마인들은 연합 적군을 격파했다.[3] 기원전 436년 로마인들은 베이와 팔레리이의 영토를 급습했지만, 두 도시를 공격하지는 않았다.[4] 기원전 435년 피데나테족은 로마 영토로 건너가 기습하여 베이의 군대를 소집하였다. 팔레리는 전쟁을 재개하고 싶지 않았다.[5] 434년 로마인들은 피데나를 사로잡았다. 이 사람은 베이와 팔레리를 놀라게 했다. 이들은 에트루스칸 리그(에트루스칸 12대 도시 협의회)에 사절단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으나, 에트루스칸 연맹은 베이를 돕기를 거부했다.[6]

기원전 403년 로마와 비이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로마인들은 이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한 기원전 396년까지 계속된 포위를 시작했다. 기원전 402년 팔레리이와 카페나는 맹세로 몸을 묶고 군대를 베이에로 보냈다. 그들은 후방에서 작은 두 로마 진영을 공격했다. 비엔테스는 전선에서 로마의 포위작전을 공격했다. 로마군 지휘관들 간의 단결력이 부족하여 로마군 대패가 일어났고, 더 작은 진영을 사로잡았다. 어떤 로마인은 더 큰 진영으로 도망쳤고 어떤 로마인은 로마로 철수했다.[7]

기원전 4세기

기원전 400년 로마인들은 잃어버린 진영을 탈환하고 팔레리이와 카페나의 영토를 급습했지만 두 도시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기원전 399년 팔레리이와 카페나는 베이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진영에서 출격하여, 군대를 비행에 투입하고 추격하여 많은 부하를 죽였다. 곧이어 카페나 지역을 급습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였다. 그것은 전투의 생존자들에게 떨어졌고 그들을 파괴했다.[8] 기원전 398년 로마인들은 팔레리이와 카페나의 영토를 습격했다. "거대한 약탈물을 운반하여 철이나 불이 파괴할 수 있는 손대지 않은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9] 리비는 기원전 397년 베이와 팔레리이, 카페나에 대한 로마 캠페인을 언급했으나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그는 Vei에서의 캠페인이 우유부단했다고 썼다.[10] 그 해에 에트루스카나 연맹은 "카페나테스와 팔리스칸인들이 에트루리아의 모든 국가가 '베이의 포위망을 격상시키기 위한 공동 결의안'으로 단결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베이가 다른 에트루스탄 도시들과 "너무 중요한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고" 협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요청은 거절되었다. 게다가, "여기는 이제 에트루리아에서 가장 큰 지역에 새로운 정착민들로, 그들은 평화롭지도 않고 전쟁을 할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것은 에트루리아에 가까운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한 가울족에 대한 언급이었을 것이다. 의회는 에트루스칸 사람들이 전쟁에 자원봉사를 하도록 허용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11] 기원전 396년에 두 명의 로마 사령관이 팔레리와 카페나를 상대로 행진했다. 그러나 이들은 가난한 지휘관들로 매복에 빠졌다. 그들 중 한 명은 넘어지고 다른 한 명은 철수했다. 팔리스칸과 카페나테스가 "에트루리아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베이에까지 진격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것은 로마에 공황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로마군이 베이에를 밀치는 일이 벌어졌고, 베이는 포로로 잡혀 파괴되었다.[12] 기원전 395년에 로마인들은 팔레리와 카페나를 상대로 작전을 수행했다. 그들은 도시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골을 황폐화시키고 "농민들에게 그들의 소유물을 빼앗아서, 그 땅에 과일나무 한 그루도 남기지 않고, 생산적인 식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카페나는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팔레리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5.24.1-2

기원전 394년 팔레리와의 전쟁은 마르쿠스 후리우스 카밀루스에게 위임되었다. 그는 들판을 황폐하게 하고 농가를 불태워 팔리칸 사람들을 그들의 마을에서 나오게 하였다. 그들은 마을로부터 겨우 1마일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접근이 어려워서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다. 팔리스칸 포로들의 안내를 받아 카밀루스군은 수용소 근처에서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일을 방해하려던 적군이 대패하고 팔리스칸인들은 다시 도시로 도망쳤다. 카밀루스는 계속해서 그것을 포위했다. 그 마을은 식량이 풍부했고 포위작전은 장기전으로 보였다. 주민들은 평소의 생활을 이어갔고 아들들은 학교에 갔다. 팔리스칸 족은 한 명의 가정교사에게 그들의 아이들을 맡기는 그리스인의 관행을 채택했었다. 이 가정교사는 마을을 배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년들을 매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운동을 시켰다. 처음에 그는 그것들을 도시 성벽 가까이 두었었다. 그리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더 멀리 나갔다. 결국 그는 로마의 전초기지에 이르러 소년들을 적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파예리를 배신하려는 의도를 카밀루스에게 전달하였다. 카밀루스는 그 남자에게 소년들에 의해 옷을 벗기고, 샅샅이 뒤지고, 다시 도시로 몰아가라고 명령했다. 팔리스칸 사람들은 가정교사가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카밀루스의 의에 감탄하고 "그들의 삶과 운명을 그에게 맡긴다"는 사신을 그에게 보냈다. 카밀루스는 그들을 로마로 보냈고 그들은 원로원에 "로마인들은 승리보다 의리를 존중함으로써 자유보다 패배를 사랑하도록 가르쳤고 스스로를 "덕분에 굴복했다"[13]고 말했다. 리비에 따르면 그들은 또한 로마 통치에 충실할 것을 약속했다. 원로원은 그 해의 로마 병사들의 임금을 마을에 지불할 것을 요구한 카밀루스에게 이 일을 맡겼다. 리비의 계정에서 그는 평화를 허락했고, 플루타르크의 계정에서 그는 "모든 팔리스칸인들과 우정을 쌓았다"고 했다. 그 후 그는 로마로 돌아갔다.[14]

기원전 359년 로마와 에트루스탄 도시 국가 타르키니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것은 후자가 에트루리아에 인접한 로마 영토를 약탈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357년, 팔리스칸 사람들은 타르퀴넨스에 가담했고 그들이 데려간 로마 포로들을 팔레리에게 돌려주는 것을 거부했다. 리비는 집정관 그나에우스 만리우스가 거의 이룬 것이 없다고 썼고, 팔리스칸 영토의 수트리움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기원전 356년에 로마인들은 팔리스칸과 타르퀴넨스를 약혼시켰다. 후자의 사제들은 뱀과 횃불을 들고 로마인을 향해 돌진했다. 이것은 성벽으로 도망친 로마 군인들을 실망시켰다. 그들은 장교의 조롱을 받고, 적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격파하고 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에트루리아 인들은 모두 타르키니와 팔레리이가 이끄는 무기를 들고 일어나 티베르 강 어귀에서 로마 소금이 작용하는 곳까지 진격했다. 로마인들은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그들은 들판에서 줄행랑을 치는 약탈자들을 붙잡아 기습적으로 적진의 크기를 매겼다. 적은 로마 영토에서 쫓겨났다.[15] 기원전 365년 또 다른 에트루스카나 도시 카에레가 타르키니에 합류했다. 그것은 패배했고 100년 휴전을 허가했다. 팔리스칸인들은 전쟁에 참여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전쟁의 맹렬한 기세는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군대를 찾을 수 없었고 그들의 땅을 약탈했다.[16] 기원전 351년 로마인들은 타르키니, 팔레리이에 대항하여 그들의 저항이 깨질 때까지 그들의 밭을 황폐화시키는 캠페인을 벌였다. 두 도시 국가는 휴전을 요청했고 40년 휴전이 허가되었다.[17] 기원전 342년 제1차 삼나이트 전쟁(기원전 344년-기원전 342년)에서 로마의 삼나이트족에 대한 승리는 팔레리이에게 로마에 40년 동안의 휴전을 항구적인 평화 조약으로 전환해 줄 것을 요청하게 했다.[18]

기원전 3세기

제3차 삼나이트 전쟁(기원전 298-290년) 1년 동안 에트루스카나 도시국가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봉기했을 때 팔리칸인들은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다. 기원전 298년, 에트루리아 북부의 도시 국가인 볼라테레이와 싸운 후 로마인들은 팔리스칸 영토로 가서 그들의 짐을 팔레리이에 맡기고 적의 영토를 황폐화시켰다. 기원전 297년 팔리스칸 도시 수트리움, 네페테, 팔레리이의 사절들은 로마로 가서 에트루리아의 시 의회가 평화를 위한 소송을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로마에 알렸다. 기원전 295년 로마인들이 삼니트, 에트루리아인, 움비아인, 세논 가울스의 연합군과 맞닥뜨린 센티눔 전투 이전에 로마인들은 팔리스칸 영토에 예비군을 주둔시켰다.[19] 그러나 기원전 293년, 팔리스칸인들은 에트루리아인들과 공동의 명분을 세웠고 로마는 그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은 트로일룸 성을 점령한 다음, 폭풍으로 다섯 개의 강력한 요새를 점령하였다. 팔리스칸인들은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했고, 에트루리아에서 선거운동을 한 집정관의 군대에게 10만 의 청동화와 1년치 월급을 지불한 후 1년간의 휴전을 허가받았다.[20]

카시우스 디오의 작품을 그린 조나라스는 기원전 241년에 로마인들이 팔레리히를 전쟁을 일으켰다고 썼다. 첫 전투에서 로마 중보병대는 패했지만 팔리스칸 기병대는 패했다. 로마인들은 두 번째 전투에서 승리했고, 파이칸스의 무기, 기병, 재화, 노예, 그리고 그들 영토의 반을 차지하였다. 이후 가파른 산 위에 있던 마을이 파괴되고 접근성이 더 좋은 곳에 새로운 마을이 세워졌다.[21] 두 곳의 묘사는 원도시가 오늘날의 시비타 카스텔라나(Civita Castellana)의 터를 차지했고, 팔레리(Palerii)의 폐허는 파브란타로마 시에서 북서쪽으로 5km 떨어진 로마의 도시라는 일반적인 이론과 일치한다.

역사에서 벗어나다

이후 팔레리는 역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아우구스투스 휘하에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주노니아 팔리스코룸은 비문에 의하면, 분명히 갈리에누스(그곳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시대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1033년까지 팔레리의 주교들이 있었는데,[22] 그 때 현재 부지를 지지하는 장소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그것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1064년부터이다.

트레 폰티 네크로폴리스

위치

팔레리 베테레스

기원전 5세기 팔레리 베테레스의 테라코타 안테픽스

원래의 팔레리이 유적지는 가로 1100m, 세로 400m 정도의 고원으로 주변국(140m)보다 높지는 않지만 깊이 60m가 넘는 고개로 분리되어 있으며, 서쪽에야 고원과 연결되었는데, 이 고원은 마당과 도랑으로 튼튼하게 보강되어 있었다. 도시의 나머지 부분은 직사각형 모양의 터프 블록으로 지어진 성벽으로 방어되었고, 그 중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다. 1888년 고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로 스카사토(Lo Scasato)에서 신전의 유적이 발견되었고, 그 외 다른 유적들은 변두리에서 출토되었다.

이것들 중 하나가 주노 퀴리염에 귀속되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이 건물들은 나무로 되어 있었고, 색색의 테라코타 장식이 정교했다. 바위에 바위를 새긴 수많은 무덤들이 마을 사방에서 눈에 띄고, 그 안에서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사원이나 무덤에서 나온 많은 물건들이 로마의 Museo di Villa Giulia에 있다. 남쪽으로 10km 떨어진 칼카타와 북서쪽으로 10km 떨어진 코르치아노에서도 비슷한 발견이 이뤄졌다.

팔레리노비

위치: 42°17′59″N 12°21′34.32″E / 42.29972°N 12.3595333°E / 42.29972; 12.3595333

팔레리 노비 - 포르타 디 지오베

로마 팔레리 노비의 현장은 이제 완전히 버려졌다. 그것은 비아 카시아의 샛길인 비아 안니아(Via Annia)였을지도 모르는 길 위에 놓여 있었다. 이 도로는 네페트를 지나 남쪽으로부터 비아 아메리나(Via Amerina)라는 이름을 가진 반면 북쪽으로 연장되어 있는 것은 분명 비아 아메리나(Via Amerina)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도시의 서킷은 약 2000m이며, 그 모양은 대략 삼각형이며, 성벽은 놀랄 만큼 정교하고 잘 보존된 로마 군사 건축의 표본이다.

팔레리 노비 - 도시 성벽의 잔해

로마의 도시는 비아 안니아 강에서 북서쪽으로 5킬로미터 더 떨어져 있었다.[23] 에트루스카니아 시를 횡단하지 않은 비아플라미아에는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아쿠아비바와 북동쪽으로 약 6km 떨어진 아에쿠움 팔리스쿰 등 두 개의 역이 있었는데, 후자는 조지 데니스에트루스카니아와 동일할 가능성이 높다.[24] 80여 개의 탑이 있었는데, 그 중 50여 개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그 중 8개가 있었던 두 개의 성문도 주목할 만하다. 19세기에 포럼과 극장(벽 바깥에 가로 55미터, 세로 33미터의 원형경기장)이 모두 발굴되었지만 성벽 안에 있는 건물들 중 거의 아무것도 땅 위에 보존되어 있지 않다. 현재 서 있는 거의 유일한 건물은 사보이 출신의 승려들이 지은 12세기 말 S. 마리아 대성당이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실시된 발굴은 비록 건물들이 상당한 파괴를 겪었지만 도시 전체의 계획은 쉽게 회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25]

팔레리 노비 - 극장의 잔해

참조

  1. ^ Gabriël C. L. M. Bakkum (1 December 2008). The Latin Dialect of the Ager Faliscus: 150 Years of Scholarship. Amsterdam University Press. pp. 43–. ISBN 978-90-5629-562-2.
  2. ^ 리비, 로마의 역사, 5.8.5
  3. ^ 리비, 로마의 역사, 4.17.11, 19.6
  4. ^ 리비, 로마의 역사, 4.21.1-2
  5. ^ 리비, 로마의 역사, 4.21.8
  6. ^ 리비, 로마의 역사, 4.23.4-5, 24.1
  7. ^ 리비 로마의 역사, 5.8.4-13
  8. ^ 리비 로마의 역사, 5.12.4-5, 13.8-12
  9. ^ 로마의 역사, 5.14.7
  10. ^ 리비 로마의 역사, 5.16.2, 8
  11. ^ 로마의 역사, 5.17.6-10
  12. ^ 리비 로마의 역사, 5.18.7-12, 19
  13. ^ 플루타르크, 평행 생활, 카밀루스 9-10
  14. ^ 리비, 로마의 역사, 5.27
  15. ^ 리비, 로마의 역사, 7.12.5, 16.2, 7, 17.2-10
  16. ^ 리비, 로마의 역사 19.6, 20.9
  17. ^ 리비, 로마의 역사, 5.22.4-5
  18. ^ 리비, 로마의 역사, 5.38.1
  19. ^ 리비, 로마의 역사, 10.12.3-7, 14.3, 26.15
  20. ^ 리비, 로마의 역사, 10.45.6-8, 26.10-12
  21. ^ 조나라스: 8, 카시우스 디오, 로마 역사, 12권 조각[1]
  22. ^ 로마 가톨릭 교구인 Civita Castellana와 이탈리아로마 가톨릭 교구 목록도 참조하십시오.
  23. ^ Maristella Pandolfini Angeletti (2006). Archeologia in Etruria meridionale: atti delle giornate di studio in ricordo di Mario Moretti : Civita Castellana, 14-15 novembre 2003. L'ERMA di BRETSCHNEIDER. pp. 91–. ISBN 978-88-8265-365-1.
  24. ^ 조지 데니스, 에트루리아의 도시와 공동묘지 (London, 1883년), i. 121.
  25. ^ 노티지 데글리 스카비, 1903년, 14년
  • 이 글에는 현재 공개 도메인에 있는 출판물의 텍스트가 통합되어 있다.

추가 읽기

  • 카를루치, 클라우디아, 마리아 안나 데 루치아 브로리, 사이먼 케이, 마틴 밀레트, 크리스티안 스트럿트, P. W. 나막신, 파올라 모스카티, 레이첼 오피츠. 2007. "팔레리 베테레스(비테보 섬) 비그날레에 있는 팔리스칸 정착지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로마에 있는 영국학교의 논문들 75 : 39–121.
  • 꽃, 해리엇. 1998. "기원전 241년 (160 페이지 이후 색깔로) 팔레리히에서 포착된 새겨진 가슴판의 중요성." 로마 고고학 저널 11장 224절.
  • Hay, Sophie, Paul Johnson, Simon Key, 그리고 Martin Millett. 2010년. "팔레리 노비: 북부 외곽지역에 대한 추가 조사." 로마 대영학교 논문 78장 1~38절 https://www.jstor.org/stable/41725287.
  • 키이, 사이먼, 마틴 밀렛, 사라 파피, 줄리아 로빈슨, 제레미 테일러, 니콜라 테레나토. 2000. "팔레리이 노비: 벽지 지역에 대한 새로운 조사" 로마에 있는 대영학교의 논문 68: 1-93.
  • 라나로, 알레산드로, 네네타 리온, 마틴 밀렛, 리븐 베르돈크, 프랭크 베르므렌. "팔레리이 노비(COMUNE DI Fabrica DI ROMA, 프로빈시아 DI VITERBO, REGNE Lazio)" 로마에 있는 영국학교의 논문 84: 321. 도이:10.1017/S0068246216000234.
  • 타볼리, 자코포, 장 마킨토시 투르파 2014년 "Discovered News: 필라델피아의 팔레리 셀에서 온 팔리스칸 무덤 그룹." Etruscan Studies 17, no. 1:28–62. doi:10.1515/etst-2014-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