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브리 보질로프
Dobri Bozhilov도브리 보질로프 Добри Божило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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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29대 총리 | |
재직중 1943년 9월 14일 – 1944년 6월 1일 | |
모나크 | 시메온 2세 |
선행자 | 페투르 가브로프스키 (연기) |
성공자 | 이반 이바노프 바그랴노프 |
개인내역 | |
태어난 | 코텔, 동부 루멜리아 | 13 1884년 6월
죽은 | 1945년 2월 1일 불가리아 소피아 | (60세)
정당 | 비당사자 |
Dobri Bozhilov Khadzhiyanakev (Bulgarian: Добри Божилов Хаджиянакиев) (June 13, 1884 – February 1, 1945) was Prime Minister of Bulgaria during World War II.
전기
불가리아의 코텔에서 태어난 보즈힐로프는 1902년 불가리아 국립은행 쿠스텐딜 은행국에서 회계원으로 일하기 전에 스비슈토프의 고등상업학교에 다녔다. 보질로프는 불가리아 국립은행에서 총 36년간 근무했으며, 여러 시기에 총독(1922-1923, 1923-1924, 1931-1932, 1934-1935, 1935-1938, 1944년)을 지냈다.[1]
1938년 11월, 보즈힐로프는 게오르기 교세바노프 총리의 정부에서 재무장관이 되었는데,[2] 보즈힐로프가 1940년 보그단 필로프가 수상이 되었을 때 유지했던 직책이다. 1943년, 차르 보리스 3세가 죽은 후, 필로프는 불가리아의 3대 섭정 중 하나가 되었다. 나치 독일의 열렬한 동맹국이자 섭정들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인 필로프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보즈힐로프(또 다른 친독파) 총리를 임명했다.
수상으로서, 보질로프는 독일인들과 긴밀하게 일했고,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이 맹위를 떨치면서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그가 나치와 충돌한 유일한 주요 쟁점은 불가리아 정부에 자국 유대인들을 추방하여 수용소를 말살하라는 그들의 요구였는데, 보질로프는 이를 거부했다.[3] 축전노력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던 1944년 6월 보질로프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불가리아 국립은행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총독이 되었다. 1944년 9월 소련은 불가리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침공해 공산당의 당파들에게 콘스탄틴 무라비예프 수상을 전복시키고 키몬 게오르기예프 수상을 대신할 기회를 주었다. 보질로프는 이후 조국전선 정부가 제정한 인민재판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는 1945년 2월 재무장관 시절 저지른 전쟁범죄와 각종 비행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그 판결은 1996년 대법원에 의해 취소되었다.
참조
- ^ "Bulgarian National Bank Governors". www.bnb.bg.
- ^ "Ministry of Finance :: Ministers". www.minfin.bg.
- ^ 자세한 내용은 F. B. 채리, 불가리아 유대인 및 최종 해결책을 참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