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노 야스노리

Fujiwara no Yasunori
「젠켄코우지쓰」의 후지와라노 야스노리

후지와라노 야스노리(藤原 no, 825년 895년 5월 23일)헤이안 시대 초기의 일본 궁중 귀족이자 행정관이었다.그의 아버지는 남후지와라 가문 출신의 후지와라노 사다오였다.맏아들 후지와라노 기요쓰라(藤原 no)가 다이나곤(大門)으로 임명되었다.

경력

855년 야스노리가 지부쇼(지부쇼 4대부사)로 임명되었다.민부쇼(民府sh丞), 효부쇼(孝府sh), 시치부쇼(西部ibu)의 직책을 맡았다.860년 효부노다이조(孝府野大祖)로 임명되었다.

866년 야스노리는 bitch루고쿠시(공식)로 임명되었다.당시 이 지방은 물 부족과 실정으로 몸살을 앓았다.야스노리는 농업을 촉진하는 정책을 통해 가난하고 개선된 정부를 구제했다.이후 비젠성으로 떠나 정부 역량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876년 야스노리는 교토로 복귀하여 에몬노스케(교토의 호위), 게비이시(京都市, 교토시의 평화유지 및 민정), 민부다이유(조세부의 부비서)로 임명되었다.

878년 야스노리가 와 국 고쿠시로 임명되었다.당시 에미시는 데와 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관군을 완패시켰다.야스노리는 통치로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도지사로 임명되었다.야스노리는 데와에 새로 부임한 후 군인들을 배치하고 정부의 예비 쌀 공급을 백성들에게 공급했다.야스노리의 좋은 정부 소식을 듣고 에미시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굴복했다.일본 법원은 야스노리에게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데와 국에 대해서는 관대한 정책이 좋다고 재판부에 조언했다.강요-레벨리온으로 알려진 이 반란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끝났다.

야스노리는 882년 사누키 국 고쿠시에 임명되었고, 다자이노다이니(다자이후 국 부서기)를 임명하였다.우다 천황은 야스노리의 능력을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스노리는 교토로 돌아와 891년 민부교(民府敎, 세무부 서기관)로 승진했다.일흔 살의 나이에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예감이 들었다.히에이 산에 갔다가 넴부츠를 부르다가 죽었다.

역사학자의 평가

9세기 학자 기요쓰라 미요시(吉田信義)가 야스노리의 전기를 썼다.에도 말기사이토 지쿠도는 야수노리가 정계에서 나카토미노카마타리와 대등하고, 기요쓰라 미요시처럼 지적인 사람이며,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못지않은 경량의 인물이라고 개언했다.불행히도 야스노리는 중앙 정부에서 자신을 정치인으로 만들 수 있는 황제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 정치에서만 그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