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에른스트 프룬트
Hermann Ernst Freund헤르만 에른스트 프룬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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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 젠센(1818~20)의 헤르만 에른스트 프룬트 초상화 | |
태어난 | |
죽은 | 1840년 6월 30일 | (53)
휴게소 | 코펜하겐의 어시스턴스 묘지 |
국적 | 덴마크어 |
교육 | 덴마크 왕립 미술원 |
로 알려져 있다. | 조각 |
움직임 | 덴마크 황금시대, 신고전주의 |
헤르만 에른스트 프룬드(Hermann Ernst Freund, 1786년 10월 15일, Uthhlede, Lower Saxony – 1840년 6월 30일, 코펜하겐)는 독일 태생의 덴마크 조각가였다.[1] 그는 특히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인물과 라그나로크 프리제로 기억된다.[2]
전기
독일 브레멘 근처에서 태어난 프룬드는 코펜하겐의 아트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기 전에 스미스 훈련을 받았고, 그는 4개의 은메달과 금메달을 모두 받았다. 졸업 후 로마에서 10년을 보내면서 베르나르트 세베린 잉게만(1820)의 대리석 흉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베르텔 토르발센의 최측근 조수가 되었다. 낭만적 민족주의의 초기 주창자였던 프룬드는 노르딕 신화와 함께 작업한 최초의 덴마크 조각가로 로키(1822년), 오딘(1827년), 토르(1829년) 등 12개의 스타튜트를 만들었는데 모두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2] 코펜하겐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12명의 사도들의 인물에 대한 모델을 준비하면서 성모 교회 장식을 조직했지만 결국 토르발센이 위촉장을 받았다. 그의 걸작인 라그나로크 프리제는 여러 해 동안 그를 점령했으며, 그의 사후 헤르만 빌헬름 비센에 의해 완성되었으나 이후 1884년 크리스천보그 화재로 소실되었다. Statens Museum for Kunst에 Frieze의 일부 석고 주물이 있다.[3] 그의 작품 중 가장 큰 수집품은 코펜하겐의 글리토텍에서 발견될 것이다.[4]
1829년 프룬드는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보낸 시간에 영감을 받아 프룬드는 공식 집인 머티리얼가어드를 폼페이의 스타일로 꾸몄다. 게오르크 힐커, 하인리히 에드델리엔, 콘스탄틴 한센, 크리스틴 쾨브케 등 젊은 작가들이 프룬드의 디자인을 이용해 작품을 완성했다.[4]
갤러리
옌스 페데르센 기념관(Hornsherred, 1833년)

참고 항목
참조
- ^ "Hermann Ernst Freund", Gravsted.dk. (덴마크어로) 2012년 2월 3일 검색됨.
- ^ a b "H.E. Freund", 덴 스토어 단스케. (덴마크어) 2012년 2월 3일 검색됨.
- ^ 옌스 피터 멍크, "헤르만 에른스트 프룬드" 쿤스틴덱스 댄마크 & 바일바흐스 쿤스트네를레키콘 (덴마크어) 2012년 2월 3일 검색됨.
- ^ a b 옌스 피터 멍크, "헤르만 에른스트 프룬드", 쿤스틴덱스 댄마크 & 웨일바흐스 쿤스트네를레키콘. (덴마크어) 2012년 2월 3일 검색됨.
외부 링크
![]() | 위키미디어 커먼즈에는 헤르만 에른스트 프룬드와 관련된 미디어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