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예대원군

Jeongye Daewongun
이광
이광
조선왕자
전임자덕흥대군
후계자흥선대군
태어난이광
(1785-03-21)21 1785년 3월 21일
죽은1841년 11월 2일(1841-11-02) (56세)
배우자최부인
염씨부인
이씨부인
이슈회평대군
영평대군
조선 철종
아버지은연왕자
어머니전주이씨 전산공주

정예대원군(한글: 전대大院君, 한자: 全溪大院君, 1785년 3월 21일 ~ 1841년 11월 2일, '내대군 정예')은 조선 철종의 친부(親父)로서 조선 왕조의 일원이었던 인물이다. 개인 이름은 이광(한글:이명; 한자:이명)이었으나, 곽득(한글: ja;; 한자: 李得)이나 해동(漢字:한자: 한자: 海東)[1]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초년기

이광은 1785년 3월 21일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명은 콰이득이었으며, 이후 해동으로, 몇 년 후 광으로 바뀌었다.[clarification needed]

그는 은연세자의 여러 사생아 중 한 명이며, 전산 이씨 가문의 이씨 두 아들 중 둘째 아들이다. 그의 큰오빠는 일찍 죽었다.

그의 합법적인 큰 이복동생은 1779년 조선 정조의 양아들이자 잠시 왕위를 계승한 완풍 황태자로도 알려진 상계왕자였다.

의 아버지 은연태자는 부안임씨 가문의 후궁인 석씨로부터 사도세자의 사생아로, 사도 자신은 조선 영조의 사생아였다. 이로 인해 정예는 정조의 반신(半神)이 되었으나, 생전에 왕족(王族)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1801년 은연세자는 합법적인 아내인 진천송씨(진천송씨)의 상산공주와 며느리인 평산신씨(상계왕자의 부인)의 세례를 받고 로마 가톨릭에 세례를 받은 후 처형되었다. 조선국교성리학이라 상산공주, 은연공주, 신공주 등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광 등 은연세자의 아들 중 일부는 가난한 농민으로 살던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나, 1822년 일가는 순조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았다.[2]

1841년 11월 2일 한성 경행(京行)의 자택에서 정예대군이 5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사인을 알 수 없다.

사후

1841년 8월 노론파는 이광의 장남이자 유일한 합법적인 아들인 이원경을 새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그러나 음모가 발각되어 이원경을 처형하였다. 유일한 생존자는 이광의 두 사생아이경응과 이원범인데 이들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1849년 아들 이원범(李元범은 염씨부인)이라는 첩에게서 태어나 철종으로 조선 군주가 되었다. 대원군이라는 호칭이 정예왕자에게 추서되어 정예 대원군이 되었다.

그의 묘는 원래 아버지 은연왕자의 묘에서 서북쪽으로 서울 은평구 진관읍에 있었으나 여주로 옮겨졌고, 1851년 8월 왕방산 부근 포천읍 선단리로 옮겨졌다.

가족

조상

참조

  1. ^ 전계대원군 신도비,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산11번지 해룡산 임좌, 37° 51′ 52.32″ N, 127° 9′ 17.69″ E
  2. ^ 전계대원군신도비(全溪大院君神道碑) 해석문 (한국어)
  3. ^ 부대부인(한글: 부大夫人, 한자: 府大夫人, 즉 대내공주)으로 승격하여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추가 읽기

  • Byeon Tae-seop (변태섭) (1999). 韓國史通論 (Hanguksa tongnon) (Outline of Korean history), 4th ed. ISBN 89-445-9101-6.
  • 커밍스, 브루스(1997) 한국의 태양 속의 장소: 현대 역사. 뉴욕 ISBN 0-393-04011-9
  • 완양부대부인 묘비 탁본 (한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