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앤 드 부르봉

Marie Anne de Bourbon
마리 앤 드 부르봉
레기티메 드 프랑스
라발리에르 공작 부인
콘티의 공주
Portrait of Marie Anne de Bourbon aged about 24
프랑수아트로이의 초상화, 1690년경
태어난(1666-10-02)2 1666년 10월
프랑스 빈센빈센
죽은1739년 5월 3일(1739-05-03) (72)
프랑스 파리
매장
프랑스 파리 에글리스 생로치
배우자콘티의 왕자 루이 아르망 1세
부르봉
아버지루이 14세
어머니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서명Marie Anne de Bourbon's signature

마리 안느부르봉, 레기티메프랑스 (1666년 10월 2일 ~ 1739년 5월 3일)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그의 정부 루이즈 발리에르의 장녀(fille légitée de france)이다.[1] 그녀는 왕의 총애를 받는 딸이었다. 13살 때 마리 앤은 사촌인 루이 아르망 1세와 콘티 왕자와 결혼했다. 콘티 공주는 1685년 19세의 나이로 미망인이 되었다. 그녀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어머니가 수녀원으로 은퇴한 후 마리 앤은 계속해서 아버지의 궁전에 거주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라발리에르 공작부인이 되어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전기

출생아 및 유아기

Louis-Edouard Rioult의 Marie Anne과 그녀의 남동생 Louis.

1666년 10월 2일 법정이 거주하고 있는 동안 파리 외곽의 샤토 빈센네에서 비밀리에 태어난 마리 안네는 루이 14세의 맏 사생아였다. 몇몇 사람들은 왕의 가장 아름다운 딸로 여겼으며, 그녀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는 그녀의 작은 이복동생인 메인 공작 루이 오귀스트였다. 그녀와 그녀의 남동생 루이 부르봉(버만도 백작)은 장바티스트 콜베르 재무장관의 부인인 콜버트 부인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들은 마담 콜버트가 궁정의 호기심을 피해 키웠다.

이듬해인 1667년 5월 14일 마리 앤은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합법화되었다. 같은 날 그녀의 어머니는 라발리에르 공작부인과 문자특허를 받은 바우주르의 칭호를 받았다. 마리 앤은 어머니의 라 발리에르 타이틀을 계승할 것이다. 젊었을 때 그녀는 마담 몽테스판(Maddemoiselle de Blois)으로 알려졌는데, 후에 그녀의 어린 이복동생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Francoose Marie de Bourbon)에게 부여된 스타일이었다.

결혼

1680년 1월 16일, 마리 안네는 사촌인 루이 아르망 드 부르봉과 콘티 왕자와 생제르맹-엔-레이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첫눈에 그녀와 사랑에 빠졌었다.[citation needed] 그녀의 지참금은 백만 리브였다. 결혼은 당시 스캔들을 일으켰던 루이 14세의 합법적인 딸들 중 한 명과 함께 한 첫 번째 결혼이었다. 처참한 결혼식 밤 후에도 결혼은 불임 상태로 남아 있었고 마리 안네는 남편이 사랑을 잘 못 한다고 공공연하게 진술해 법정을 충격에 빠뜨렸다.

마리 안네 드 콘티는 모로코의 왕 물레이 이스마엘(17세기 프랑스 학교)을 대신해 결혼 제안을 거절했다.

1683년 그녀는 사랑하는 동생 베르만도리스 백작을 잃었고, 그는 그녀와 같은 생일을 보냈다. 이 젊은 백작은 마리 안네의 삼촌 오를레앙 공작의 오랜 연인인 체발리에 로레인과 관련된 동성애 스캔들에 연루되어 법정에서 추방되었다. 모든 소식통으로부터 마리 안네는 오빠의 죽음에 상당히 화가 났고, 동시대의 설명에 따르면 그 젊은이의 부모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1685년 마리 안네는 천연두에 걸려 남편에게 퍼졌다. 비록 그녀가 회복되었지만, 그는 5일 후에 굴복했다. 그가 죽은 후, 그녀는 마담 프린세스 두에리에르, 라 그랑드 프린세스콘티로 불렸다. 그녀는 결코 재혼하지 않았고 심지어 모로코의 술탄이스마일 이븐 샤리프로부터 결혼 제의를 거절했다.

그녀는 콘티 왕자와 결혼한 지 5년 동안 아버지 궁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루이 14세와 마담몽테스판의 장녀인 그녀의 여동생 루이즈 프랑수아즈 부르봉은 1685년 콘데 왕자의 장남이자 왕위 계승자인 부르봉 공작 루이 부르봉과 더욱 중요한 결혼을 했다. 콘티 라인이 콘데에서 내려오면서 후자가 전자에 비해 우선시되었고, 이와 같이 마리 안네는 자신의 7년 후배인 누이에게 우선권을 양보해야 했다. 베르사유에서 너무나 중요한 이 에티켓 문제는 두 사람 사이에 마찰로 이어졌다.

1698년에는 조카인 프랑스의 필리프(Philipe of France) 안주 공작으로부터 청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스페인의 왕이 되어 사보이(Savoy)의 마리 루이즈(Marie Louise)와 그 후 엘리자베스 파르네세(Elisabeth Farnese)와 두 번 결혼하였다.

베르사유에서의 계급 상황은 1692년 마리 안느에게 더욱 짜증나게 되었다. 그 해에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누이 프랑수아즈 마리부르봉샤르트르 공작 필리프 오를레앙스와 결혼했는데, 샤르트르 공작은 프랑스(프랑스의 손자) 쁘띠필름 프랑스(프랑스의 손자) 출신으로 오를레앙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녀의 결혼에서 프랑수아즈 마리는 마리 과 루이즈 프랑수아즈 둘 다보다 우선권을 부여하며 쁘띠필레프랑수아즈로 등극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녀의 자매들이 그녀의 결혼에 대해 받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200만 리브라는 지참금을 받았다. 이러한 발전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성가시게 과시하는 여동생에게 공공연히 적대적인 마리 앤과 루이 프랑수아즈 모두를 크게 짜증나게 했다.

프린세스 두에리에르

콘티의 여러 왕자들이 죽은 후 법정에서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 그들의 과부들은 두에리에르(도저)라는 이름과 과부 시절에 해당하는 번호를 부여받았고, 따라서 그들의 풀스타일은 마담프린세스콘티 '숫자' 두에리에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727년과 1732년 사이에 세 명의 미망인 프린세스 콘티가 있었다.

  • 루이 14세와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의 사생아인 마리 안네 드 부르봉 (1666–1739), 루이 아르망 1세의 아내 데 부르봉 왕자인 드 콘티 왕자는 1685년에 처음으로 과부가 되면서 마담 프린세콘티 프레미에르 두에리에르가 되었다. 제목은 남편의 동생 프랑수아 루이스 콘티 왕자에게 돌아갔다.
  • 콘티 왕자 프랑수아 루이스의 부인인 마리 테레부르봉(1666–1732)은 1709년 남편을 잃은 후 '라 프린세스 콘티 세컨데 두에리에르 부인'이 되었다.
  • 콘티 왕세자 프랑수아 루이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콘티 왕세자 루이 아르망드의 부인 루이즈 엘리자베트부르봉(1693~1775)의 부인이다. 그녀는 무슈두크마담두체스의 딸이었다. 1727년 남편이 사망한 후, 그녀는 마담 프린세콘티 트로이시에메/데르니에르 두에리에르로 알려지게 되었다.

베르사유 직원으로부터 마리 안네는 그녀의 이복동생인 다우핀을 그의 둘째 부인 에밀리에 드 초인에게 소개했다. 그는 첫 부인인 매력 없는 다우핀 마리 빅투아르(1660–1690)의 죽음 이후 그녀와 결혼했다. 어느 날, 마리 앤 빅투아르의 잠자는 폼에 우연히 마주친 마리 앤은 깨어 있는 것만큼 못생긴 잠에 빠져 있다고 논평했고, 이에 다우핀은 깨어나서 "사랑하는 아이라는 이점이 없다"고 반박했다.

1721–1725년에 마리 안느를 돌보게 된 루이 15세의 약혼녀인 인판타 마리빅투아르

1710년 마리 안네의 어머니는 1674년 자비의 루이즈 수녀라는 이름으로 들어갔던 카르멜라이트 수녀원에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마리 앤은 라발리에르라는 칭호를 얻었고 지난 36년 동안 쌓아온 어머니의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1713년 콘티 공주는 파리 생 아우구스틴[2] 후텔 로르게스를 사들였지만 1715년까지 그곳에서 살기를 시작하지 않았고, 1716년에는 샤토 드 쵸이시(Chatau de Chois)가 살았다. 두 재산 모두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1718년, 그녀는 왕관 샹수르마르네에 의해 수여되었는데, 그녀는 나중에 빚을 갚기 위해 그녀의 첫 사촌인 두크 드 라 발리에르에게 주었다. 몇 년 후, 루이 15세정부인 마담퐁파두르에 의해 몇 년 동안 임대되었다.

또한 1713년 마리 안느는 콘티의 왕자 루이 아르망드부르봉의 조카딸 루이즈 엘리사벳 드 부르봉과 동생인 루이즈 프랑수즈의 딸 루이즈 엘리자벳 드 부르봉의 결혼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마리 앤은 심지어 더 나이든 나이에도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매우 친했고, 그녀의 오빠인 그랜드 다우핀매우 잘 지냈는데, 그녀는 그의 나라 소유지인 무돈 성당에서 자주 방문했다. 1711년 그의 죽음으로 그녀는 매우 괴로웠다. 마리 앤이 젊고 매우 가난한 클레르몬트-체스 백작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은 뮤돈에서였다. 그는 법정에 입회하여 마리 안느와의 친밀감 덕을 보았다. 부부는 연애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루이 14세가 연락책(아마 며느리 에밀리에 드 초인으로부터)을 발견했을 때 클레르몽-치스트에게 신속한 유배령이 명령되었다.

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가 사망하자 섭정이 성립되었고, 그녀의 처남 오를레앙 공작은 섭정(1715–1723)으로 명명되었다. 1721년 마리 안느는 루이 15세의 미래의 신부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교육을 책임지게 되었고, 그는 세 살 때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 어린 인판타는 l'Infante-rein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영아의 나이 때문에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린 소녀는 4년 후인 1725년 스페인으로 다시 보내졌는데, 이 사건은 그녀의 아버지 필립 5세와 젊은 루이 15세 사이에 마찰을 일으켰다.[citation needed] 일곱 살 난 인판트린이 떠난 후, 마리 앤은 법정에서 은퇴하고 남은 세월을 그녀의 다양한 사유지에서 보냈다.

마리 안네는 유명한 성경책 루이 세자르 바우메 블랑, 뒤크 발리에르 중 한 세대를 뺀 사촌으로 나중에 재산과 작위를 물려받았다. 두에리에르 왕자는 1739년 5월 3일 파리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파리 생로치 교회에 있는 성모 마리아 예배당에 안장되었다.[3]

조상

참조

  1. ^ RUE NEWVE-Saint-Augustins.마리안느, 필레 레기티메루이 14세 et Meme de Lavalier."
  2. ^ 생 아우구스틴 루
  3. ^ tours.com/churchofsaintroch.html#top 세인트 로치 교회[영구적 데드링크]

원천

마리 앤 드 부르봉
카페티아 왕조의 카데트 지부
출생:1666년 10월 2일 사망: 1739년 5월 3일
프랑스의 귀족
선행자
해당 없음
마드모아젤 데 블루아
1681–1692
성공자
선행자 펜티에르브르 공작 부인
1696–1697
성공자
선행자 에탐페스 공작 부인
1712–1718
성공자
선행자 라발리에르 공작 부인
1680–1698
성공자
선행자 콘티의 공주
1680–1739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