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토 번
Mito Domain미토 번 水戸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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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의 일본 통치하에. | |
1602–1871 | |
자본 | 미토 성 |
역사 | |
• 유형 | 다이묘 |
역사시대 | 에도 시대 |
• 확립됨 | 1602 |
• 설정되지 않음 | 1871 |
오늘의 일부 | 이바라키 현의 일부 |
미토(美都, 미토한)는 에도 시대의 일본령이다. 현대 이바라키 현의 히타치 국과 연관되었다.[1]
한체제에서 미토는 주기적인 지적 조사와 예상 농업 수확량에 기초한 정치적, 경제적 추상화였다.[2] 즉, 영토는 토지 면적이 아닌 고쿠다카 면적으로 규정되었다.[3] 이것은 서양의 봉건주의와는 달랐다.
역사
이 도메인의 수도는 미토 시였다. 1608년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에게 도쿠가와 요리후사를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1871년 한제가 폐지될 때까지 도쿠가와 가문의 미토 지부가 도메인을 지배하였다. 에도 시대에 미토는 일본 사상의 영향력 있는 학파인 미토가쿠가 1854년 이후 대중적 정서가 된 소노죠이("황제, 야만인을 추방하라")의 정치철학을 진전시킨 결과 주로 자연주의의 중심을 대표하였다. 미토의 다이니혼시(大日本詩) 후원으로 이 도메인의 지식주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후, 미토 학자들과 그들의 이념은 메이지 유신에 관계된 많은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에도 시대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데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8년 열한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리후사를 다이묘로 임명하였다. 요리후사는 임명과 함께 도쿠가와 가문의 미토 지부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기이와 오와리의 도쿠가와 지부와 함께 미토 지부는 고산케로 알려진 도쿠가와 세 집 중 한 집을 대표했다.[4]
미토 지부는 다른 두 지부 중 어느 한 지부보다 땅과 부를 적게 가지고 있었지만 에도 시대 내내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 도메인이 에도에서 사실상의 수도에 접근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비공식적으로 미토 다이묘를 '부소군'으로 여겼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 세력에 공헌한 요소였다.[5]
도쿠가와 요리후사의 셋째 아들인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1661년 미토의 제2대 다이묘가 되었다. 미쓰쿠니는 1657년 다이니혼시를 후원함으로써 존경받는 한족으로서의 미토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했다.[6] 그 노력은 지적 사고의 중심지로서 미토의 명성을 시작할 것이다.
미토 학원
미토학교(미토가쿠)는 고립주의, 자연주의,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방하는 일본 사상의 영향력 있는 학교였다. 이 성리학 운동의 기원은 1657년 미츠쿠니가 쇼코칸으로 알려진 역사 단체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데서 비롯된다. 미쓰쿠니는 일본의 역사와 철학을 연구하기 위해 교육받은 학자들을 쇼코칸에 영입했다.[7] 미쓰쿠니는 제국주의 노선에 중점을 둘 일본의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학자들에 의해 다이니혼시 창조를 시작했다.[8] 다이니혼시에 있는 「안날」의 각 장은 특정 황제의 통치에 집중했다.[9] 이 프로젝트는 완성되기까지 250년 이상이 걸렸고, 1906년에 정식으로 출판되었다.[6]
학자들이 다이니혼시를 편찬하는 동안 미토 번은 농업과 경제 문제를 경험했다. 1688년부터 시작된 금융파탄은 미토를 괴롭혔고, 그 영역에서는 불만이 커졌다. 재정적인 문제 외에도 기근과 자연재해가 흔했다. 1709년 불만족 농민들이 도메인 역사상 가장 큰 반란을 일으켰다.[10] 미토에는 천황에 대한 경외심과 반외이념에 대한 미토 초기 학자들의 작품을 수용하는 불만의 시민들이 늘고 있다. 이 작품들은 17세기 동안 민족주의와 황실에 대한 충성의 물결에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무질서한 세월 동안 미토 장학금은 일본에서 유명한 사상 학교로 성장했다. 미쓰쿠니의 지도하에 다이니혼시는 1700년 사망 무렵에 이르러 「안날스」의 73장, 「생물학」의 1백70장으로 대폭 확대되었다.[11] 1720년 미토 선비들이 '안날스'와 '바이오그래피'를 완성하여 바쿠후에게 바쳤다. 이러한 사건들은 미토 초기의 학파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11] 그 후 70년 동안 쇼코칸은 미쓰쿠니의 지도 없이 다이니혼시와 함께 거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 1786년, 타치하라 수이켄은 쇼코칸의 지휘권을 넘겨받아 편찬 작업을 재개했다.[12] 후지타 유코쿠는 타치하라의 뒤를 이어 연구소장이 되었고, 그 시대의 역사에 더욱 집중하는 것을 추진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쇼코칸 내의 두 파벌이 출현하였다. 후지타를 비롯한 타치하라의 다른 반대파들은 아사카 탄파쿠의 「어플라이살」을 없애고, 다이니혼시토 「니혼」이나 「야마토」라는 명칭을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12] 두 파벌간의 투쟁은 결국 1797년 후지타의 가택연금으로 이어졌다.[13] 1807년이 되자 후지타는 다시 정권을 잡았고 타치하라는 연구소를 떠났다.
19세기 미토 사상이 발전하면서 학자들은 반서방 정서와 일본 사회에서 천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토 학자들은 '황제를 부활시키고 야만인을 추방한다'는 의미의 '소노죠이'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수용했다. 학자인 아이자와 세이시사이(Aiza Seishisai)는 일본 최초의 이 철학의 주창자였다. 1825년, 그는 서양의 '바리안'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할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제시한 '새로운 제안서'를 썼다. 그는 자연주의와 서구 세력, 무역, 신념 체계에 대한 반대를 장려했다. 그는 특히 기독교의 맹렬한 반대자였는데, 그의 견해는 일본의 가치를 훼손했다.[14] 세이시사이도 마찬가지로 해외로부터의 서방의 위협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천황의 지지를 주장했다.[15] 세이시사이도 이 작품에서 유교적 도덕, 신토 신화, 기타 철학을 결합한 고쿠타이("국민적 본질") 사상을 발전시켰다. 세이시사이에 따르면 일본 황실은 태양 여신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다른 나라들이 모방할 수 있는 적절한 기준을 마련하도록 되어 있었다.[14] 새로운 제안은 메이지 유신-1869년까지 19세기 내내 일본 민족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미토는 도쿠가와 일본에서의 도덕의 역할에 관한 다른 사상을 강조했다. 저명한 학자인 후지타는 일본 문명은 외부의 위협보다는 내부문제의 결과로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지타 도코, 세이시사이 등 미토 후기 학파의 다른 작가들도 도덕적 리더십의 결여가 일본을 내부로부터 약화시키고 서양인의 침략에 노출시킬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많은 미토 학자들이 경제 붕괴를 걱정했고, 후지타는 특히 미토에서 발생한 많은 재정난이 일본 전역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후지타는 성리학을 근거로 황제가 쇼군에게 국내외의 위험에 맞설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고 추론했다. 후지타와 다른 미토 학자들은 막부가 일본의 방위나 경제적 번영을 보존할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판단했다.[16] 후지타는 바쿠푸가 개혁을 추진하고 다이묘가 개혁을 실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후지타의 사상은 바쿠푸가 중요한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쿠푸 제도에 대한 급진적인 도전을 대변하고 있었다.[17] 후지타는 막부가 그 도메인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약하게 만들었다고 결론지었다.[17]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막부의 쇠퇴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1829년 미토의 다이묘가 되었고, 1850년대와 1860년대에 일본의 민족주의 운동에 중요한 인물로 발전하였다. 나리아키는 일본이 서구에서 은둔하는 것을 가장 급진적으로 옹호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18] 1830년부터 나리아키는 소노죠이를 옹호하고 막부가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황제를 공경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미토 학파의 사상을 소리 높여 지지했다. 전통적으로 쇼군이라는 용어는 "바바리아인의 주 박멸"(이 용어는 그 이전이 아니라면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을 의미한다. 서양인들은 16세기에 도착한 이래로 일본인들에 의해 "바리안"이라고 불렸다. 초대 도쿠가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으로부터 모든 외세를 추방하고, 나머지 나라와 단절시켰다. 네덜란드인들은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는 나가사키에 하나의 무역항을 허락받았다. 이 작은 네덜란드 무역항과는 별도로 일본은 막부가 "바리안"들이 무역을 목적으로 일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할 때까지 폐쇄되어 있었다. 물론 황제를 대신하여 나라에서 '바리안'을 추방하는 것은 쇼군의 의무일 것이다. 나리아키는 일본이 외세와 국내 문제에 맞설 수 없는 것은 막부의 잘못된 경영과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믿었다. 마음속으로 막부는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대신 바쿠푸의 이익에 초점을 맞췄었다. 그는 쇼군이 강하고 번영하는 일본을 만들기 위해 일본의 방어를 강화하고 필요한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나리아키의 막부에 대한 결단과 비판으로 인해 그는 인구의 계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19] 나리아키는 막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황제가 쇼군에게 권력을 위임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인정했다. 나리아키는 막부가 정책을 바꾸기를 바랄 뿐 바쿠푸의 타도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20] 그는 소노죠이의 정치철학이 일본, 막부, 황제, 백성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많은 미토 학자들과 함께 나리아키는 미토의 금전 문제에 대해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리아키씨의 관점에서는, 일본은 사무라이와 소작농들이 경제 상황 하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나리아키는 유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일본이 나약함과 싸우기 위해서는 도덕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기근이나 서구 제국주의가 나라를 위협할 경우 나라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20] 이에 막부에게는 일본의 군사·경제 재건(후코쿠쿄헤이로 인도)과 쇼군에게는 지도해 줄 것을 요구했다.[20] 그러나 막부의 정책은 그 영역에서의 개혁의 장벽을 계속 제공하였다. 몇 년 후인 1836년에 전국적인 기근이 일어나 나리아키가 예언한 대로 봉기가 일본 전역에 퍼졌다.[21] 1840년 중국과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시작되었고, 나리아키의 서양 간섭에 대한 예측도 정당한 관심사로 보였다.[21]
1830년대의 사건 이후, 막부는 나리아키의 개혁 요구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나리아키에게 조기 퇴직을 강요했다. 이 행동은 미토에 있는 나리아키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나리아키의 신념에 동의한 다른 다이묘들을 화나게 했다.[22] 이후 나리아키의 경험과 견해를 존중했기 때문에 아베 마사히로 로쥬는 나리아키를 은퇴에서 꺼내 외교정책 고문으로 삼았다. 또 나리아키 총리가 서구의 일본 개입에 대해 경고하자 아베 총리는 나리아키 총리가 이 문제에 대해 정통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1840년대 내내 서방 국가들은 일본에 서구 상품에 시장을 개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일본에 대한 서방의 압력은 1853년에 절정에 달했고, 매튜 페리 사령관과 블랙 선박이 도착하여 일본의 고립주의에 중대한 도전을 제기하였다. 페리 장관은 미국과의 무역을 위해 일본 항구의 개항을 요구했다. 아베 총리는 서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다이묘들은 미국과 싸우거나 무역에 합의하는 데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베 총리는 가나가와 협약에서 미국의 요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막부가 서방으로부터 일본을 방어하지 못한 것은 즉시 바쿠푸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이에 따라 아베 총리는 행사 후 사임했고, 호타 마사요시가 그를 대신했다.
1858년 호타는 고메이 천황과 만나 서양인이 일본에서 무역할 수 있도록 한 해리스 조약을 제출하고 치외법권을 부여했다. 황제는 조약 지원을 거부했고, 미토 등지의 반외세운동은 이번 행사를 천황의 배후에서 단결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호타가 황제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그들이 황제를 경외하고 '바리안' 서구와 맞서야 한다는 미토 충성파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켰다.
1858년 도쿠가와 이에사다 쇼군 사망으로 쇼군 세습을 둘러싼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동시에 여러 파벌들이 외교정책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면서 도쿠가와 막부의 안정성이 훼손되었다. 잠재적인 쇼군 두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나리아키의 아들인 히토쓰바시 게이키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다이 다이묘들은 이이 나오스케를 막부의 위대한 참의(다이로)로 책봉했다.[23] 이이는 막부의 권력을 다시 세우기 위해 나리아키 지지자들을 처벌하기로 했다. 이이가 일시적으로 질서유지에 성공한 동안, 그가 나리아키 지지자들을 도메인에서 숙청하고 법원인 안세이 숙청으로 젊은 미토 급진주의자들이 1860년(사쿠라다몬 사건)[24] 그를 암살하게 되었다. 막부는 암살에 대응하여 분규개혁의 쇼군 정책을 바꾸고 쇼군 후견인으로 게이키 히토쓰바시를 지목하여 급진파를 진정시켰다.[24]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수십 년 동안 미토 다이묘는 물론 미토 학자들도 개혁 요구와 직접 행동을 통해 바쿠푸를 훼손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막부의 도덕적 타락과 경제적 파멸이나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거듭 비판했다. 미토 사상의 학파도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적이고 친왕적 이념을 제공했는데, 이는 주요 반바쿠후 혁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25] 미토 학자들은 실제로 바쿠푸의 타도를 주장한 적은 없지만, 일본에 대한 대내외적 위협을 강조한 것은 혁명가들의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26] 미토 사상의 학파는 많은 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미토 영역은 학자들의 반외국적 관점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지적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6] 1840년대에 나리아키의 이러한 견해에 대한 지지는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전 세대가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다. 대표적인 혁명가 마키 이즈미는 미토 신앙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7] 미토가쿠는 일본의 반바쿠후 원소가 단결하여 메이지 유신을 이끌도록 고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미토 급진주의자들은 바쿠푸의 타도를 초래한 많은 폭력적인 행동들을 시작했다.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을 시작으로, 민족주의 테러리즘이 일본에 퍼졌다.[27] 미토에서는 반외국의 충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은 후지타 도코의 아들이 연루되었다. 봉기를 분쇄하기 위해 바쿠후와 도메인 군사들이 합세했고, 충신 운동은 일시적으로 추진력을 잃었다.
1864년 무장한 미토 반군이 전투에서 바쿠후와 대치하는 「텐구 반란」이 일어났다. 후지타 고시로가 이끄는 텐구 악단에는 미토 출신의 수천 명의 병력이 포함되어 다른 여러 도메인의 군대를 격파했다.[28] 이후 보수파의 자비를 약속하고 반란군 천 명이 항복하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29] 아이러니하게도 반대파는 게이키 히토쓰바시가 이끌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반란의 지도자들을 속이고 처형했다. 텐구 폭동은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이어진 몇 년 동안 바쿠푸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음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미토군은 복구에 성공하기 전 초기 진압에 많이 관여했다. 미토는 사쓰마나 조슈처럼 전투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미토 이데올로기는 그러나 사쓰마와 조슈의 혁명가들에게 황제를 위해 싸우도록 영향을 주었다.
다이묘 목록
세습 다이묘들은 씨족 우두머리와 도메인의 우두머리였다.
- 다케다 노부요시(1602-1603)
- 기슈 도쿠가와 가문, 1603–1609) (20만 코쿠)[30]
- 도쿠가와 요리노부(1603-1609)
- 도쿠가와 미토 가문, 1609–1871년 (25만 코쿠)[31]
- 요리후사 (1609–[31]1661)
- 미쓰쿠니 (1661–1690)
- 쓰나미(1690–1718)
- 무네타카 (1718–1730)
- 무네모토(1730-1766년)
- 하루모리(1766–1805)
- 하루토시 (1805–1816)[31]
- 나리노부(1816–1829)
- 나리아키 ([31]1829–1844)
- 요시아쓰 (1844–1868)
- 아키타케(1868–1871)
간이집합계수(미토토쿠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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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제1대 도쿠가와 쇼군(1543–1616; r. 1603–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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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요리후사, 제1대 미토 영주 (1609호) (1603–1661; r. 1609–1661)
II. 미토의 제2대 군주 미츠쿠니(168–1701; r. 1661–1690)
- 마쓰다이라 요리시게, 다카마쓰 제1대 성주(1622~1695)
III. 쓰네게, 미토 3대 영주(1656–1718; r. 1690–1718)
- 마쓰다이라 요리토시 (1661년–1687년)
- 다카마쓰 3대 성주 마쓰다이라 요리토요(1680~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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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무네타카, 미토 4대 영주 (1705–1730; r. 1718–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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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무네모토, 미토 5대 영주 (1728–1766; r. 1730–1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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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하루모리, 미토 6대 영주 (1751–1805; r. 1766–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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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하루토시, 미토 7대 영주 (1773–1816; r. 1805–1816)
8세. 나리노부, 미토 8대 영주 (1797–1829; r. 1816–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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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미토 영주 나리아키(1800–1860; r. 1829–1844)
XI. 아키타케, 제11대 미토 영주 겸 가문의 우두머리, 제1대 바이스카운트(1853–1910; r. 1868–1869; 미토 총독: 1869–1871; 제11대 가문의 우두머리: 1868–1883; 비스카운트: 1892). 그에게는 쟁점과 후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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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요시아쓰, 미토 10대 영주(1832–1868; r. 1844–1868)
- 아쓰요시, 12대 가장, 1대 마퀘스(1855–1898; 12대 가장: 1883–1898; 마퀘스: 1884)
- 쿠니유키, 13대 가장, 1대 왕자 (1886–1969; 13대 가장: 1898–1969; 2대 마퀘스: 1898–1929; 1929–1947)
- 쿠니나리, 14대 가장(1912–1986; 14대 가장: 1969–1986)
- 나리마사, 15대 가장(b. 1958; 15대 가장: 1986–현재)
- 나리노리 (b. 1990)
- 나리마사, 15대 가장(b. 1958; 15대 가장: 1986–현재)
- 쿠니나리, 14대 가장(1912–1986; 14대 가장: 1969–1986)
- 쿠니유키, 13대 가장, 1대 왕자 (1886–1969; 13대 가장: 1898–1969; 2대 마퀘스: 1898–1929; 1929–1947)
- 아쓰요시, 12대 가장, 1대 마퀘스(1855–1898; 12대 가장: 1883–1898; 마퀘스: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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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카마쓰 3대 성주 마쓰다이라 요리토요(1680~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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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항목
참조
- ^ a b "히타치 국" JapaneseCastleExplorer.com; 2013년 5월 15일 회수.
- ^ 미사, 제프리 P, 윌리엄 B 하우저. (1987). 일본 역사 속의 바쿠후, 페이지 150.
- ^ 엘리슨, 조지, 바드웰 L. 스미스(1987년). 군벌, 예술가, 평민: 16세기의 일본, 18페이지.
- ^ 미토의 역사
- ^ 코슈만, 2
- ^ a b 코슈만, 2
- ^ a b 코슈만, 34세
- ^ 하루투니안로61번길
- ^ 코슈만, 35세
- ^ 코슈만, 29세
- ^ a b 코슈만, 36세
- ^ a b 코슈만, 40세
- ^ 코슈만로42번길
- ^ a b 하니로67번길
- ^ 한이로66번길
- ^ a b 하루투니안로33번길
- ^ a b 하루투니안로75번길
- ^ 두우스로66번길
- ^ 램버티로98번길
- ^ a b c 사카타로38번길
- ^ a b 사카타로39번길
- ^ 사카타로40번길
- ^ 사카타로42번길
- ^ a b 사카타로43번길
- ^ 코슈만, 3
- ^ 콜스만, 3
- ^ 두우스로71번길
- ^ "충돌", 86
- ^ "충돌", 87년
- ^ 파피노트, 자크 에드먼드 조셉(1906년). 어법사 d'히스토아르 et de géographie du Japon; Papinot, (2003) 63페이지 노빌리아레 뒤 자폰의 "토쿠가와"; 2013년 5월 15일 회수.
- ^ a b c d 파피노트, 노빌리아레 뒤 자폰의 "토쿠가와(미토)"; 2013-5-15.
- ^ 계보(jp)
추가 읽기
- 듀우스, 피터. 현대 일본. 보스턴: Houghton Mifflin Company, 1998.
- 하네, 미키소. 현대 일본: 역사 조사. 볼더: 웨스트뷰 프레스, 2001.
- H.D. 하루투니안 Restore를 향해서. 버클리: 1970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출판부.
- "미토의 역사" 2006년 6월 7일 미토의 도시. 2007년 7월 25일. <https://web.archive.org/web/20070910090322/http://www.city.mito.ibaraki.jp/english/profile/history.htm>.
- 크라크트, 클라우스. Das Kôdôkanki-jutsugi des Fujita Tôko(1806–1855). 아인 베이트랙 줌 정치학 덴켄 데어 스파텐 미토슐레 비즈바덴: 오토 하라소위츠 베를라크, 1975년
- 코슈만, J. 빅터 일본 근현대사의 갈등. 프린스턴: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 1982년.
- 코슈만, J. 빅터 미토 이데올로기.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 출판부, 1987.
- 램버티, 매튜 5세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일본제국기관: 1853–1858. 하버드 아시아학 저널 제32권(1972), 페이지 97–123.
- 사카타, 요시오. 메이지 유신의 정치적 리더십의 동기. 아시아학 저널. 제16권, 제1권 (1956년 11월, 페이지 31-50)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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