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마모리카즈
Numa Morikazu누마모리카즈 | |
---|---|
![]() 누마모리카즈 | |
태어난 | |
죽은 | 1890년 5월 17일 일본 도쿄 | (46세)
직업 | 도쿠가와 육군 장교, 영어 교사, 기자 |
Numa Morikazu( (間 守一, 1843년 12월 2일 ~ 1890년 5월 17일)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정치인이자 언론인이다.[1]
전기
1843년 에도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누마는 어린 나이에 학문에 관여했다. 그는 요코하마에서 제임스 커티스 헵번에게 영어를 배웠고, 이후 나가사키에서 서부 군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866년 영국식 보병전에 관한 원문을 번역하였고, 1867년 쇼군 정예 덴슈타이 부대에서 호헤이-가시라 나미(歩hei頭, 대략 중위와 맞먹는 것)로 임관하였다. 누마는 보신 전쟁에서 도쿠가와 쪽에서 싸웠다.
메이지 유신에 이어 잠시 감옥 생활을 하다가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한 번 한 호의로 석방되었고, 새 메이지 정부에 의해 토사 번 보병전 교관으로 채용되었다. 도쿄에서도 영어를 가르쳤다. 그의 제자 중에는 훗날 학계에서 유명해질 전 아이즈 사무라이의 아들 다카미네 히데오와 시바 시로가 있었다.
누마는 1872년 재무부에 들어갔고, 이후 법무부와 그 외 정부 내 다른 곳에서 일했다. 1873년 도가마 고노와 함께 고슈카이 호리쓰(오메이샤의 전신)를 세웠다. 농민 소요 사태 이후, 누마는 1875년 말 사카타 현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부 정책에 불만을 품은 그는 1879년 겐로인에서 은퇴하고 자유와 국민권익 운동에 힘을 쏟기로 결심했다. 그는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분이라는 신문을 구입했다. 이를 도쿄-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분으로 개편하여, 항상 지지했던 진보 사상의 마우스피스로 사용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국회 설립을 요구하였다. 1881년 이타가키 타이스케와 함께 자유당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이듬해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릭켄 가이신토에 가입하였다. 동시에 188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도쿄 현의회장을 지냈다.
누마는 1890년 47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 항목
메모들
참조
- 얀센, 마리우스 B.(2000년) 근대 일본의 제작.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 출판부 ISBN0674003349/ISBN9780674003347; OCLC 44090600
- 누스바움, 루이 프레데릭, 케테 로스(2005)가 그것이다. 일본 백과사전.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 출판부. ISBN 0-674-01753-6; ISBN 978-0-674-01753-5; OCLC 58053128
- 심스, 리처드 L. (1998년) 바쿠후와 메이지 재팬에 대한 프랑스 정책 1854–1894. 런던: RoutregeCurzon. ISBN 978-1-873410-61-5
- ___________. (2001). 메이지 리노베이션 이후 일본 정치사 뉴욕: Palgrave Macmillan. ISBN 0312239149/ISBN 9780312239145; ISBN 0312239157/ISBN 9780312239152; OCLC 45172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