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혼용
Pak Hon-yong박혼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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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 |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
제2차 중앙위원회 | |
재직중 1949년 6월 24일 – 1953년 8월 6일 호가이 섬김 | |
회장 | 김일성 |
내각 부총리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 내각 | |
재직중 1948년 9월 9일 – 1953년 3월 3일 | |
프리미어 | 김일성 |
외무부 장관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 내각 | |
재직중 1948년 9월 9일 – 1953년 3월 3일 | |
프리미어 | 김일성 |
선행자 | 사후 설정됨 |
성공자 | 남일 |
조선중앙위원회 노동당 부위원장 | |
재직중 1946년 11월 24일 – 1949년 6월 30일 이기석 섬김 | |
회장 | 호혼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
재직중 1945년 9월 14일 ~ 1946년 11월 24일 | |
선행자 | 사후 설정됨 |
성공자 | 호혼 |
개인내역 | |
태어난 | 충청남도 예산, 대한제국(현 대한민국) | )28 1900년 5월
죽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 1955년 12월 18일 (55세)
시민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국적 | 한국인입니다 |
배우자 | 주세죽, 정써니엔, 이순금, 윤레나 |
아이들. | 딸: 비비안 파크, 나테사 파크 손: 박병삼 |
상위 항목 | 이학규(어머니) 박현주(아버지) |
교육 | 경성보통고등학교(1919년) |
모교 | 경기고등학교 국제레닌학교 |
한국이름 | |
조선글 | |
한차 | |
수정 로마자 표기법 | 박헌영 |
매쿠네-라이샤워 | 박헌영 |
필명 | |
조선글 | |
한차 | |
수정 로마자 표기법 | 이정, 이춘 |
매쿠네-라이샤워 | 이전, 이춘 |
예의명 | |
조선글 | |
한차 | |
수정 로마자 표기법 | 경정 |
매쿠네-라이샤워 | 덕경 |
박혼용또는 박헌영(한글:박헌영, 한자:朴憲,, 1900년 5월 28일일 1955년[1][원형 참조]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철학자, 공산주의 활동가로 일제 강점기(1910–1945년)조선공산주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별명은 이종(李宗)과 이춘(李春)으로, 예명은 토오레스트(德영)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그는 한국 공산당을 정리하려고 노력해다. 일본 당국이 일당을 단속하자 그는 잠적했다. 광복 후인 1945년 8월 남쪽에 조선공산당을 세웠으나 미국 당국의 압력으로 1948년 4월 북한으로 이주했다. 그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통일 문제를 주제로 한 회의에 참석했다.
기록상으로는 625전쟁에서 김일성과 호흡을 맞췄다.[2] 박헌영은 이승만 대통령의 진압의 위력에 놀랐다. 이승만은 제주항쟁, 문경대학살, 보도연맹 학살처럼 남반부 반대자들을 학살했다. 1955년 한국전 패배로 모든 재산과 사형을 몰수당했다. 소련과 중국이 김일성의 박씨 집행을 만류하려 했지만,[3] 결국 박씨는 미국 간첩이라는 조작된 비난으로 처형당했다.[4]
인생
초년기
박씨는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영해공원 혈통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첩의 사생아였다.
1919년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 경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5] 1919년 3월 3·1운동과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정치 활동
1921년 조선공산당 상하이 지부 이르쿠츠크파에 가입했다. 이때 조선공산청년동맹 서기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박혼용은 1922년 4월 한국에서 체포되어 공산당 조직위원으로 기소되었다. 1924년 석방되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지하
1925년 4월 18일, 박혼용은 조선공산당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의 활동은 비밀스러웠다.
1926년에 그는 법정에 출두했다. 재판 과정에서 광기를 가장하고 대변을 먹었는데, 그 해 11월 무죄가 선고됐다.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 틀어박혔으나 12월 만주를 경유해 탈출해 소련에 도달했다. 그제서야 일본인은 그가 미친 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1940년 귀국하여 국제 레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한국에선 일본 통치에 대한 반발에 적극적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1945년 8월 말 조선공산당(朝鮮公産黨)이 재창당하여 1928년 공식적으로 해산되었고, 박씨는 그 비서가 되었다. 1946년 1월 5일, 그는 국내외 기자회견에서 강대국 모스크바 회의(영국, 미국, 소련)의 결정을 지지하면서, 한국은 이제 '민주 혁명'의 과정에 있다고 발표했다. 모스크바 회의(1945년)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군정부에 의해 탄압받았다.
1946년 9월, 그는 최고조에 달했을 때 25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총파업을 조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6년 12월 조선노동당(朝鮮人民黨)을 조직하였고, 2명의 부위원장 중 한 명이 되었다.
남북 협상과 북한 생활
1948년 4월에는 김구, 김규식과 함께 협상을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1948년 5월, 교섭은 끝났고, 그는 북에 남았다.
1948년 9월 조선노동당 서기직을 지키던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총리 겸 외무상이 되었다.[4]
박혼용씨는 1950년 4월 남북정당이 단합하면서 조선노동당 비서가 됐다. 박씨는 1949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 정치국 부위원장을 지냈다.[4] 박씨는 1953년에 쫓겨나고 체포되기 전까지 북한의 외무부 장관이었다.[4]
한국 전쟁
2002년까지 연달아 공개된 구소련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구체적인 전쟁 계획이 최종적으로 결정될 때까지 항상 함께 행동했다. 김일성과 박헌영도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동안 스탈린으로부터 전쟁 승인을 받았다. 이번 방문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을 만나 구체적인 전쟁계획의 서면지시를 받았다.[6]
체포사망
박혼용은 1953년 8월 3일 김일성에 의한 조선노동당 당원 숙청으로 체포되었다.[4] 1955년 12월 15일,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소식통에 따르면 같은 달에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박씨의 사망 날짜는 불확실하다.[7][8][9]
작동하다
- 현대사회와 우리의 의무
- 기독교의 내면을 본 역사
참고 항목
참조
- ^ de:박혼용
- ^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You bastard, if the war goes wrong, you're responsible, too!]. Chosun ilbo. 6 June 2010. Retrieved 16 June 2019.
- ^ 이바노프, 바실리 이바노비치, 김일성과의 대화각서 : 1956년 4월 19일 윌슨센터 디지털 아카이브
- ^ a b c d e Lankov, Andrei (2013). The Real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pp. 13 to 14. ISBN 978-0-19-996429-1.
- ^ "영해박씨 박헌영". Bakssi Jokbo website. Retrieved 11 April 2006.[데드링크]
- ^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Chosun ilbo. 24 June 2010. Retrieved 16 June 2019.
- ^ Suh, Dae-Sook (1988).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p. 136. ISBN 9780231065733.
- ^ Paige, Glenn D.; Lee, Dong Jun (1963). "The Post-War Politics of Communist Korea". The China Quarterly. 14 (14): 17–29. doi:10.1017/S0305741000020993. JSTOR 651340.
- ^ Deane, Hugh (1996). "Review of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by Bruce Cumings". Science & Society. 60 (2): 252–254. JSTOR 4040356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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