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당

Workers' Party of Korea
조선노동당
조선로동당
약어WPK
총무김정은
프레시디움
설립된1949년 6월 24일; 74년 전(1949-06-24)
합병
본사정부청사 1호, 평양직할시 중구역
신문노동신문
유스윙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어린이 날개한국어린이연합
무장 날개한국인의 군대
준군사비행단노동자-농부 적위대
한국 전선반제국주의 민족민주전선
회원가입(2021년)Increase ~6,500,000
이데올로기
정치적 입장극좌파[B]
국민적 소속통일을 위한 민주전선
국제적 제휴IMCWP
빨간.
노래"조선노동당 만세"
상황북한의 집권당, 국가보안법에 의해 대한민국에서 불법화됨
최고인민회의
607 / 687
당기

^A:B.R.마이어스, 마이클 세스, 서대숙은 당의 공식 입장에도 불구하고 조선노동당의 이념은 공산주의와 거의 공통점이 없다고 주장합니다.[1][2][3]
^B:B.R.마이어스조선족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조선노동당을 극우파라고 표현합니다.[1]
조선노동당
북한이름
조선 ŭ조선로동
한차朝鮮勞動
한국 이름
한글북한노동
한자北韓勞動

조선노동당([a]WPK)은 흔히 북한으로 알려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일한 집권당입니다. 1949년 북한 노동당남한 노동당의 통합으로 탄생한 WPK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활동 정당입니다. 북한의 군대인 한국인의 군대도 통제하고 있습니다. WPK는 최고인민회의에서 대표되는 가장 큰 정당이며, 통일을 위한 민주전선을 구성하는 두 개의 다른 법적 정당들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수 정당들은 WPK에[4] 전적으로 복종하며, WPK의 "선도적 역할"을 그들의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WPK는 국가보안법에 따라 대한민국(대한민국)에서 금지되어 있으며 유엔, 유럽연합, 호주,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습니다.[5]

공식적으로 WPK는 김일성-김정일주의가 이끄는 공산당으로 김일성김정일의 사상을 종합한 것입니다.[6][7] 주체사상은 대중의 노력으로 민족의 독립과 발전을 도모하는 김일성의 이념입니다. 주체는 원래 마르크스주의의 한국적 해석으로 제시되었지만,– 레닌주의, 당은 이제 그것을 자유로운 철학으로 제시합니다. WPK는 집권 김씨 일가를 정치사상의 궁극적 원천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2012년에 열린 제4차 당 대회에서는 김일성-김정일주의가 "당의 유일한 지도 사상"이라고 당규를 개정했습니다.[8] 국방위원장으로 집권한 김정일 정권에서 공산당은 선군정치, 즉 선군정치에 유리하게 당과 국가 문서에서 꾸준히 제거되었습니다. 노동자 계급이 아닌 군대가 정치권력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김정은은 2021년에 이 입장을 뒤집고 선군을 당의 정치 방식인[9] '인민 우선 정치'로 교체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당의 의지를 재확인했습니다.[6][7]

WPK는 김용주와 김정일이 구상한 단일사상체계에 따라 조직됩니다. WPK의 최고 기관은 공식적으로 당 대회이지만, 김정은의 당 대표 재임 이전에는 대회가 거의 열리지 않았습니다. 1980년에서 2016년 사이에는 의회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WPK는 다른 공산당과 조직적으로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제도화가 훨씬 덜 되어 있고 비공식 정치가 평소보다 더 큰 역할을 합니다. 중앙위원회, 사무국, 중앙군사위원회(CMC), 정치국, 정치국 주석과 같은 기관들은 당규에 의해 공식적으로 부여된 것보다 훨씬 적은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정은현재 WPK 총서기를 맡고 있는 당 대표입니다.

역사

건국과 초기 (1945년 ~ 1953년)

1945년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한국(NKB-CPK)이 설립되었고,[10] 초대 위원장은 김용봄이 맡았습니다.[11] 그러나 NKB-CPK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박혼용이 위원장을 맡은 CPK 중앙위원회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12] 두 달 후, NKB 제3차 총회에서 김용봄은 김일성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행사는 아마도 소련에 의해 조직되었을 것입니다.[13] 북한국은 1946년 봄 김일성이 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북한의 공산당이 되었습니다.[14] 1946년 7월 22일, 북한의 소련 당국은 북한 공산당이 이끄는 인민 전선통일 민주 민족 전선을 설립했습니다.[15] 북한의 공산당은 곧 중국 출신의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정당인 신인민당과 통합되었습니다.[15] 1946년 7월 28일 양당의 특별위원회가 합병을 비준했고, 다음날 공식화되었습니다.[16] 한 달 후(1946년 8월 28일 ~ 8월 30일), 창당대회를 열어 북한 노동당(WPNK)을 창당했습니다.[16] 대회는 김일성이 부위원장으로 임명된 가운데 신민당 김투봉 전 대표를 초대 WPNK 위원장으로 선출했습니다.[16] 그러나 김일성은 당의 공식적인 서열 강등에도 불구하고 당의 지도자로 남아 있었습니다.[17]

1948년 평양에서 박혼용과 함께 김일성(왼쪽)

의회가 끝난 후 전국적으로 당의 통제력이 높아졌습니다.[18] 1948년 3월 27일부터 30일까지 WPNK는 제2차 총회를 소집했습니다.[19] 김투봉이 여전히 당의 공식 수장으로 있는 동안 김일성은 주요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습니다.[20] 그는 북한이 독재국가라고 믿었던 한국과 대조적으로 "민주주의의 기지"라고 주장했습니다.[20] 1948년 4월 28일 최고인민회의 특별회의는 WPNK 간부들이 제안하고 작성한 헌법을 승인했고, 이로써 북한은 공식적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하게 되었습니다.[21] 그것은 독립된 북한의 설립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정부 아래 통일된 한국을 요구한 것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는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 될 것입니다.[22] 김일성은 새 국가의 정부 수반으로 임명되었고, 김투봉은 입법부를 이끌었습니다.[23] 1년 후인 1949년 6월 24일, WPNK와 남한 노동당이 통합되면서 조선노동당이 탄생했습니다.[24]

김일성은 한국의 군사적 통일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역할은 박혼용이 이끄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25] 김일성과 소련 지도자 조셉 스탈린 사이의 몇 번의 회담 후,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남한을 침략했고, 따라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26]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으로 북한은 거의 붕괴될 뻔했지만, 분쟁에 대한 중국의 개입으로 북한을 구했습니다.[26] 전쟁은 김일성과 WPK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낳았습니다.[27] 이 무렵 초기 WPK 정치의 주요 단층선이 생성되었습니다. 국내파(일본 통치 기간 동안 한국에 남아있던 WPK 간부들), 소련파(소련 출신 한국인들), 옌안파(중국 출신 한국인들), 게릴라파(김일성 개인파) 등 4개의 파벌이 형성되었습니다.[27] 하지만 김일성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입지를 더 강화할 수 없을 것입니다.[27]

김일성의 권력 공고화(1953~1980)

일본 점령 해방 후인 1945년 9월 평양에서 김일성의 첫 대중 연설을 그린 선전 모자이크.

스탈린의 후계자 니키타 흐루쇼프탈스탈린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WPK와 소련 공산당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28] 중국 공산당과 CPSU 사이의 이념적 갈등인 중-소 갈등 동안 김일성은 두 사회주의 초강대국 사이에서 공작을 벌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WPK에 미치는 영향력을 약화시켰습니다.[28] 1962년까지 김일성과 WPK는 이념 투쟁에서 CPSU보다 중국 공산당을 선호했고, "몇 년 동안 북한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모든 중요한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습니다."[28] 이 시기의 WPK와 CPSU의 주된 갈등은 김일성이 스탈린주의의 폄훼, 집단지도부의 창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계의 평화공존론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28] 김일성은 평화공존이 항복과 같은 의미라고 믿었고, 북한의 탈스탈린화가 WPK에 대한 그의 무한한 권력을 사실상 끝낼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28] CPSU와 WPK의 관계가 소원해진 결과는 소련이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는 것입니다.[29] 한편 중국은 원조를 늘리지 않으려 했고, 그 결과 북한의 여러 산업들이 재앙 직전에 이르렀습니다.[29] 마오쩌둥얼마 지나지 않아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는데, 이 사건은 WPK에 의해 "좌파적 기회주의"라고 비판되었고, "영구적 혁명트로츠키주의 이론"의 발현이었습니다.[29] CPSU와 CCP 간의 관계는 1960년대 동안 안정화되었고, WPK는 중소 분쟁에서 중립을 유지할 것을 분명히 [29]함으로써 모든 수준에서 국가 자결권을 목표로 하는 주체 프로그램을 1966년에 시작했습니다. 이는 다시 WPK에서 김일성의 입지를 강화시켰습니다.[29]

1960년대를 기점으로 김일성의 인성 숭배는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습니다.[30] 1972년 4월 15일 그의 생일이 국가의 주요 공휴일이 되고 전국적으로 그의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할 때까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보다 크지 않았습니다.[30] 김씨는 WPK와 국영 출판물에서 "위대한 지도자", "국가의 태양", "철의 전승 장군", "전능한 공화국의 원수"로 알려졌습니다. 공식적인 선전물은 "지도자에 대한 불타는 충성심"이 모든 한국인의 주요 특징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30]

김일성과 그의 게릴라파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중국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을 실망스럽게도 반대파들의 WPK를 숙청했습니다.[27] 국내파는 (1953-55년) 가장 먼저 갔습니다. 1957-58년 옌안파, 1957-62년 숙청에서 소련 조선족(인민군 지도부에 불성실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31] 역사학자 안드레이 란코프(Andrei Lankov)에 따르면, "김일성은 더 이상 단순히 '1940년대 후반의 경우처럼 동등한 사람들 중에서 첫 번째'가 아니라 북한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습니다."[32] 김일성은 WPK 야당을 숙청한 후 김씨 가문과 게릴라파의 족벌주의와 세습으로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습니다.[33] 1980년대 후반부터 "북한 고위 관리들의 높은 (그리고 증가하는) 비율은 고위 관리들의 아들이었습니다."[33] 김일성은 1960년대부터 가족을 권력의 자리에 앉혔습니다.[34] 1990년대 초반까지 강송산(행정협의회장 겸 WPK 사무국 위원), 박송철(부사장), 황장엽, 김청린(WPK 사무국 위원) 등 집안 사람들에 의해 다수의 전국적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김용선(WPK 국제부장 겸 WPK 사무국 위원), 강희원(WPK 평양시위원회 서기 겸 행정원 부총리), 김탈현(외교통상부 장관), 김찬주(농무부 장관 겸 행정회의 부의장), 양형섭(사회과학원 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의장).[34] 이들은 오로지 김씨 가문과의 인연 때문에 임명된 인물로, 김씨 가문이 WPK와 국가를 지배하는 한 직책을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34] 김 위원장이 족벌주의(자신과 게릴라파)를 지지한 이유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당 관료들이 자신과 아들의 통치를 위협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34]

김일성이 자신의 동생인 김용주가 후계자가 될 것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 외국 관측통들에 의해 처음으로 일반적으로 믿어졌습니다.[35] 김용주가 남북조정위원회 공동위원장이 될 때까지 점차 권한이 커졌습니다.[35] 1972년 말부터 제6차 WPK 대회까지 김용주는 정권에서 점점 더 외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6차 대회에서 정치국과 중앙위원직을 상실했고,[35] 김일성이 1966년부터 김정일을 손질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확인됐습니다.[35] 1974년부터 제6차 대회까지 김정일은 북한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권력자였습니다.[35] 그의 선발은 그의 아버지가 왕조를 만들거나 북한을 봉건 국가로 만들었다고 비난 받으면서 비판을 받았습니다.[36]

김정일 통치 (1980년 ~ 2011년)

김정일이 당규를 지키는 척하지 않고 WPK를 이끌었지만 집권 말기인 3차 대회에서 다시 활성화됐습니다.

지난 6차 대회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임명된 것이 확실시되면서 권력은 김씨 가문에 더욱 집중됐습니다.[37] WPK 관계자들은 그의 후계자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1981년부터 그는 투어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37] 1982년,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웅이 되었고, 주체사상썼습니다.[37] 외국 관측통들은 김정일의 임명이 젊은 세대의 참여를 증가시킬 것이라고 믿었지만, '주체사상'에서 그는 그의 지도력이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의 시작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38] WPK는 부분적으로 WPK와 국가의 최고위층의 노인정 때문에 국내외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도력이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39]

1995년에 세워진 평양 당 창건 기념비.

1995년 2월 25일 오진우가 사망하면서 김정일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프레지덴셜리움(정치국과 중앙위원회가 개회하지 않을 때 WPK의 최고위 기관)의 생존 위원이 되었습니다.[40] 1993년부터 2010년까지 WPK 중앙군사위원회(CMC, 군사문제에 관한 최고 당기관)의 위원 명단은 공표되지 않았지만, 1995년 동안 군 서열에는 뚜렷한 움직임의 징후가 있었습니다.[41] 김정일은 WPK 창립 50주년을 맞아 옛 근위병과 젊은 관리들을 달래기 위해 CMC(및 군 지도부 전반)의 개편을 시작했습니다.[41] 그는 WPK 중앙위원회나 정부를 개편하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 동안 WPK 중앙위원회의 회원 자격에 대한 변경은 대부분 WPK 중앙위원들이 자연적인 원인으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42]

1995년부터 김정일은 WPK와 국가보다 군부를 더 선호했습니다.[42] 경제 위기와 최소 50만 명이 사망한 기근이 겹치면서 국가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43] 김 위원장은 구조개혁을 권고하는 대신 WPK의 경제에 대한 통제력 부족을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중앙 차원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 지방 및 지방 지부들을 비난했습니다.[44] 그는 김일성대 50주년 기념사에서 "중앙위원회 지시에 충성하는 것은 당 조직과 노동자 때문이 아니라 내 권위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44] 김정일은 아버지가 경제는 피하라고 했다며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낫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연설 후, WPK의 경제 통제 책임은 행정위원회(중앙정부)에 주어졌습니다.[44] 1996년 말에 김정일은 WPK와 중앙 정부 둘 다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군에 통제권을 이양하기 시작했습니다.[45] 이후 1998년 헌법 개정으로 북한의 최고 국가 권력은 WPK가 아닌 군부의 지도부로 향했습니다.[46]

1997년 7월 8일, 김일성에 대한 3년간의 애도 기간이 끝났습니다.[47] 그해 10월 8일 김정일은 새로 설치된 조선노동당 총비서실에 임명되었습니다.[47] 김정일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임명된 이유에 대해 외국 전문가들의 상당한 논의가 있었습니다.[47] 분명한 WPK 규정 위반으로 김정일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선출되기보다는 제6차 중앙위원회와 CMC의 공동 발표에서 WPK 총서기로 임명되었습니다.[47] 김정일이 (새로운 WPK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해) 임명 직후에 의회를 소집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47] WPK는 2010년 제3차 회의까지 조직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을 것입니다.[47] 그때까지 김정일은 독재자로서 통치했습니다;[47]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WPK 기관들에서만 사망한 관리들을 대신할 새로운 구성원들과 지도자들이 임명되었습니다.[47] 1998년 9월 5일 소집된 제10차 최고인민회의북한 헌법을 개정했습니다.[48] 개정된 헌법은 이전에 군을 감독하는 책임이 있던 국방위원회를 최고 국가 기관으로 만들었습니다.[49] 비록 새 헌법이 내각과 NDC에게 WPK 관계자들로부터 더 많은 독립을 주었지만, 그것이 당을 약화시키지는 않았습니다.[50] 김정일은 WPK 총서기로 남아 조직지도부(OGD)와 다른 기관들을 통제했습니다.[50] 중앙 WPK 지도부 구성은 2010년까지 단 한 번의 획도 갱신되지 않았지만 WPK는 대중 조직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유지했습니다.[51]

2010년 6월 26일, 정치국은 "강성대국과 주체 발전을 가져오는 데 중대한 변화에 직면한 당의 혁명적 발전의 요구를 반영해야 한다"는 공식적인 설명과 함께 [51]제3차 회의 대표단을 소환한다고 발표했습니다.[51] 이 회의는 9월 28일에 열렸으며, 당규를 개정하고 중앙위원회, 사무국, 정치국, 대통령 및 기타 기관의 위원을 선출(해임)했습니다.[51] 김정은이 후계자로 확정되었고, 리용호 원수와 김경희 장군(김정일의 여동생)이 그의 권력 공고화를 돕기 위해 한국 한국인 군대와 WPK의 주요 직책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듬해인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했습니다.[54]

김정은 집권 (2011년 ~ 현재)

김정은은 2011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당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 엘리트들은 김정은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고, 12월 19일 아버지의 사망에 대한 공식 보도가 발표되면서 국가를 책임지는 것으로 선언되었습니다.[55] 2011년 12월 26일, 노동신문은 그를 당과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했습니다.[56] 2011년 10월 (김정일이 총서기가 된 기념일) 김정일에 의해 그 자리에 지명된 후, 12월 30일 정치국 회의는 그를 공식적으로 한국인 군대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정치국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조선노동당 최고지도자의 비공식 직책에 임명되었습니다.[58]

정치국은 18일 김정일의 70주년을 축하한 뒤 "김정일의 신성한 혁명생활과 위업을 모든 시대에 걸쳐 찬양하고 주체사상을 이룩하기 위해 2012년 4월 중순으로 예정된 제4차 당 대회(김일성 탄생 100주년 즈음)를 발표했습니다. 김정은을 중심으로 결집된 선군 혁명 명분.[59] 김정은은 2012년 7월 공화국 원수로 진급했습니다.[60] 4월 11일 제4차 당 대회에서 김정일은 영원한 총서기로 선포되었고 김정은은 새로 만들어진 조선노동당 제1비서 겸 주석직에 선출되었습니다. 회의는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당의 유일한 지도사상"이라고 당규를 개정했습니다.[61][8] 2013년 12월 장성택 숙청과 함께 수십 년 만에 열린 당내 투쟁을 경험했습니다.[62]

김정은 체제에서 당은 다소 부활하는 모습을 보였고, 만남도 잦아졌습니다. 44년의 공백 끝에 두 번의 회의가 있었고, 2010년과 2016년 사이에 회의가 있었습니다.[63] 2015년 10월 10일 당의 70주년을 기념하여 거대한 군사 퍼레이드를 펼친 후, 정치국은 36년의 공백을 깨고 2016년 5월 6일 제7차 대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대회는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김정은에게 기존의 제1비서실을 대체하는 새로운 위원장 직함을 부여했습니다.[64] 2021년 1월, 제8차 WPK 대회가 소집되어 김정은에게 총비서 직함이 주어졌고, 의장 직함이 대체되었습니다.[65] 의회는 또한 의회와 정치국 모두에서 군사 대표단의 수가 감소하면서 군에 대한 WPK 통제의 강화와 군대의 힘의 감소를 표시했습니다.[66] 2021년 6월 조용원[67] 또는 김톡훈 북한 국무위원장이 자리를 채울 것이라는 관측과 함께 당이 '제1비서'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68] 김정은은 2021년부터 WPK 내에서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용어를 부활시키기 시작했고, 이 이념은 다시 당규에 쓰여졌습니다.[6][69] 그는 또한 당규에서 점점 더 송운을 "국민 우선 정치"로 교체했습니다.[9]

이데올로기

WPK는 좌파적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으며,[1] 통상적으로 국제공산당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약간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70] 2011년 결의 "김일성 동지의 탄생 100주년을 세계 인류의 대정치 축제로 공동으로 기념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79명의 참석자 중 30명이 서명했습니다.[71] WPK는 또한 자신을 세계적인 좌파와 사회주의 운동의 일부로 보고 있습니다; 냉전 기간 동안, WPK와 북한은 "혁명을 수출"하는 정책을 취했고, 세계적인 좌익 게릴라들을 도왔습니다. 게다가, 당의 규칙들은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민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되는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나아가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인 원칙들"을 지지한다고 말합니다.–레닌주의"[9] 그러나 브라이언 레이놀즈 마이어스(Brian Reynolds Myers), 재스퍼 베커(Jasper Becker), 서대숙(Sea-So Dae-Sook)은 WPK의 이념이 외국인 혐오, 인종차별, 민족주의라고 주장합니다.[1][72][73]

주체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레닌주의

주체라는 용어는 김일성의 연설(1955년 발표)에서 처음 사용되었지만, 일관된 이념으로서의 주체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발전했습니다.[74] 스탈린주의와 유사하게 중앙당 지도부를 옹호하는 비공식적(후에 공식화된) 이데올로기 체제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75] 1972년경까지 주체는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고 불렸습니다.레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오늘날의 레닌주의", 김일성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칭송받았습니다.[75] 그러나, 주체는 1976년까지 별개의 이념이 되었고, 김정일은 그것을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이념, 내용과 구조"라고 불렀습니다.[75]

제5차 대회에서 주체는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되었습니다.– 레닌주의.[76] 1970년대에 두각을 나타내었고, 1980년 제6차 대회에서 WPK의 유일한 이념으로 인정받았습니다.[76] 후 10년 동안 주체는 실용적인 이념에서 순수한 이념으로 변화했습니다.[76] 주체사상은 1982년 김정일의 이름으로 출간됐습니다.[77] 연구에 따르면 주체는 김일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한국 혁명의 지도 사상을 대표하며 우리는 주체 사상에 대해 사회 전체를 모형화해야 하는 명예로운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77] 김정일은 작품에서 주체는 단순히 마르크스주의를 창조적으로 응용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레닌주의, 그러나 "인류사 발전의 새로운 시대"[77] WPK의 기본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전제와의 결별은 "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행진하자"는 기사에서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레닌주의와 주체사상".[78]

주체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79] 일부 학자들은 그것이 그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거의 없다고 주장합니다.[80] 정책은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적 근거 없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념으로부터 구체적인 영향을 식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80] 주체와 민족주의를 연결하는 것이 더 쉽다는 분석도 있지만, 독특한 형태의 민족주의는 아닙니다. 비록 WPK가 사회주의 애국주의라고 주장하지만,[80] 일부 분석가들은 그들의 사회주의 애국심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더 비슷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사회주의 애국심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족주의라는 것입니다.[81] 주체는 북한 문제에 대한 외국의 점령, 관여 및 영향력(중국과 소련의 primarily)에 대한 반응으로 발전했으며 "외국 지배 하에서 겪었던 박탈감에 대한 한국인의 정상적이고 건강한 반응"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응에는 마르크스주의자나 레닌주의자 특유의 것이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라고 표현한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자칭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82] WPK와 북한 지도부는 그들의 정책이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또는 공산주의인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주체는 "한국인", 나머지는 "외국인"으로 정의됩니다.[83]

기본원칙

당신은 나에게 주체사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끝이 없습니다. 우리 당의 모든 정책과 노선은 주체사상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것들은 이 사상을 구현합니다.

— Kim Il Sung, when asked by a Japanese interviewer to define Juche[84]

주체 북한에 대한 일차적인 목표는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독립입니다.[85] 김일성은 1967년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주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85]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의 정치적 독립(차주)을 공고히 하고, 완전한 통일과 독립을 보장할 수 있는 독립적인 국민경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하여 자주, 자생, 자주의 노선을 모든 일관성을 가지고 시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당의 주체사상을 모든 분야에서 훌륭하게 구현하여 조국의 안보를 우리의 힘(차위)으로 확실하게 수호할 수 있도록 조국의 번영(차위)과 국방력을 증대시키고 있습니다."[86]

주자학 정치적 독립의 원리, 즉 주자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입니다.[87] 주체는 모든 국가가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국가 간의 평등과 상호 존중을 강조합니다.[87] 실질적으로 자결권과 평등한 주권에 대한 신념은 북한을 "은둔의 왕국"으로 인식시켰습니다.[87] WPK의 해석에 따르면, 외국의 압력이나 개입에 굴복하는 것은 차주를 침해하고 주권을 방어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을 위협할 것입니다.[87] 이것이 김정일이 북한이 외국에 의존하게 되면 한국혁명이 실패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유일 것입니다.[87] 중국과 소련의 김일성은 북한이 다른 나라로부터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협력과 상호 지지 그리고 의존을 촉구했습니다.[8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한이 두 나라에 의존할 수 있다는 (혹은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혐오했고, 도그마틱하게 그들의 예를 따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87] 김일성은 WPK가 "소화되지 않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삼키거나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경향을 단호히 거부할 필요가 있다"며 북한의 성공을 WPK의 정책 수행에 대한 독립성 덕분이라고 평가했습니다.[87] 북한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공식적인 선언문들은 인민들이 WPK와 위대한 지도자 아래에서 단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87]

차주의 물질적 기반은 경제적 자립(차피)이라고 봅니다.[87] 김일성의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는 북한의 해외 원조 의존이었는데, 그는 북한이 강력하고 독립적인 경제를 가진 국가만이 할 수 있는 사회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위협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87] 샤리프중공업을 기반으로 한 독립적인 국가 경제를 강조합니다. 이 부문은 이론적으로 경제의 나머지 부분을 주도할 것입니다.[87] 김정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88]

독립적인 국민경제를 건설한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자유롭고 자립적인 경제, 자국민을 섬기고 자국의 자원과 국민의 노력에 의해 발전하는 경제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88]

김일성은 군사적 독립(차위)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88] 그는 북한이 제국주의 적들과의 전쟁에서 군사적 지원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국내적 대응을 강조했고 군사적 대결에 대한 당(및 국가)의 태도를 요약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제국주의자들에게 평화를 빌지도 않습니다."[88]

주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의식 때문에 자신을 궁극적으로 통제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89] 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보다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더 의존한다고 보는 고전마르크스주의와 차이가 있습니다.[90] 지식이 풍부한 혁명가 집단이 아닌 위대한 지도자가 이끄는 혁명을 바라보는 주체적 시각은 레닌의 선봉정당 개념에서 벗어난 것입니다.[90]

민족주의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국가 내 계급 구분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와 법의 차이를 명확히 하지 않았습니다.[75] 그들은 국가와 법이 (당시 존재했던) 프롤레타리아 통치로 전복되고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75] 이것은 1920년대 소련 이론가들의 주류적 견해였지만 1929년 스탈린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공격을 받았습니다.[91] 그는 프롤레타리아가 국가의 성향에 적대적이라는 니콜라이 부하린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국가(소련)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가 조화를 이루었다고 주장했습니다.[91] 1936년까지 스탈린은 사회주의 세계가 자본주의 세력에 의해 포위된다면 소련이 공산주의 생산 방식에 도달한다면 국가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91] 김일성은 이러한 입장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면서, 북한이 공산화된 생산방식에 도달한 후에 미래의 세계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국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91]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사회주의 세계가 지배한다고 해도 북한은 자본주의의 회복에 위협을 받을 수 있습니다.[92]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국가라는 용어가 부활하면서 북한에서는 김일성 치하의 국가가 부활했습니다.[92] 소련이 "국가"가 아닌 "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공식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후자는 1930년대에 부활했습니다.[92] 1955년 김일성은 "독단주의와 형식주의의 제거와 사상사업 주체의 확립에 관하여"라는 연설에서 비슷한 견해를 밝혔습니다.[92]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어떤 외국의 혁명이 아니라 우리의 한국 혁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념적 행동은 한국 혁명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민족 투쟁의 역사, 한국의 지리, 관습을 완벽하게 인식해야 합니다.[92]

그때부터, 그와 WPK는 그 혁명에서 "혁명적 전통"의 역할과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강조했습니다.[92] 당원들과 간부들은 당 회의에서 북한의 국위선양과 다가오는 부흥에 대해 배웠습니다.[92] 전통 풍습을 되살려 한국적인 면모를 선보였습니다.[92] 1965년까지 김일성은 공산주의자들이 개성주권에 대한 반대를 계속한다면 교조주의수정주의에 의해 운동이 위협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93] 그는 "외국의 모든 것을 칭송하고 국가의 모든 것을 비난함으로써 국가 허무주의"에 가입하고 자국에 외국 모델을 강요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했습니다.[93] 주체는 1960년대까지 북한 사회주의 건설과 그 일에 대한 불간섭을 위한 뚜렷한 길을 요구하는 본격적인 이념이었으나, 10년 후에는 "주권 실현이 근본 원리"인 체제로 규정되었습니다.[93]

비록 WPK 이론가들이 스탈린주의의 "국가" 정의의 영향 때문에 처음에는 "국가"와 "민족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적대적이었지만, 1970년대에 이르러 그들의 정의는 "공동 언어, 영토, 경제 생활에 기초한 안정적이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변경되었습니다. "공유 혈통"을 포함하는 "문화".[93] 1980년대에는 공통된 경제 생활이 정의에서 삭제되었고, 공유 혈통이 강조되었습니다.[94] 한국의 민주화와 소련의 해체로 WPK는 민족주의의 의미를 수정했습니다.[94]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한 부르주아적 무기로 스탈린주의 용어에서 정의되었던 민족주의는 반동주의자에서 진보주의자로 바뀌었습니다.[94] 김일성은 "진정한 민족주의"와 "진정한 민족주의"를 구별했습니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진보적인 생각이었지만, 민족주의는 여전히 반동적이었습니다.[94]

진정한 민족주의(진정한 민족주의)는 애국심과 비슷합니다. 진정한 애국자만이 헌신적이고 진정한 국제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라는 말은 동시에 민족주의자, 국제주의자를 의미합니다.[94]

외국인 혐오증과 인종차별 의혹

그 이름이 무엇이든, 아무리 그의 주장이 정교하더라도, 김 위원장의 주체사상은 공산주의와 거의 관련이 없는 외국인 혐오 민족주의에 불과합니다.

Dae-Sook Suh, author of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3]

1960년대에 WPK는 조선족들이 (주로 동구권 출신인) 유럽인 배우자들과 이혼하도록 강요하기 시작했고, WPK 고위 관리는 이 결혼을 "한민족에 대한 범죄"라고 불렀고, 동구권 대사관은 파시즘 정권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72] 1963년 5월, 한 소련 외교관은 김일성의 정치권을 "정치적 게슈타포"라고 표현했습니다.[72] 북한의 다른 동구권 관리들도 비슷한 발언을 했는데, 동독 대사는 이 정책을 "괴벨시안"(히틀러의 선전부 장관요제프 괴벨스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불렀습니다.[72] 이는 북한과 동구권의 관계가 최악의 상황에서 나온 말이지만, 김일성의 정책에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72]

브라이언 레이놀즈 마이어스(Brian Reynolds Myers)는 그의 책 깨끗한 인종(The Cleanest Race, 2010)에서 주체가 북한의 지도적인 이념이라는 생각을 일축합니다. 그는 그것의 공개적인 고양을 외국인들을 속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따르기 보다는 칭찬받기 위해 존재합니다.[95] 마이어스는 주체마오쩌둥에 버금가는 정치사상가로서 김일성을 찬양하기 위해 개발된 엉터리 이념이라고 쓰고 있습니다.[96] 마이어스에 따르면 북한의 선군 정책은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쿠바 흑인 외교관의 린치 시도, 중국계 자녀를 임신한 북한 여성에 대한 강제 낙태 등 인종에 기반한 사건으로 대표되는)는 극좌가 아닌 극우 정치(한국 식민지 시절 일본 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의 기반을 나타냅니다.[95][97]

거버넌스

위대한 지도자

북한은 인류를 역사의 원동력으로 생각합니다. "대중 대중은 모든 것의 중심에 있고, 대중의 중심에 지도자가 있습니다."[98]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투쟁을 역사적 진보의 원동력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도 계급투쟁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계급적 차이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결국 종식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99] 이때부터 인류사회가 계급투쟁과 같은 사회적 힘에 이끌리는 것을 멈추고, 대신 "자신의 자유로운 행동의 결과"가 됨에 따라 인류는 "점점 더 의식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100]

주체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인간 중심적 이념입니다.[98]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과 유사하게, 주체는 역사는 법에 의해 지배되지만 인간만이 진보를 이끈다고 믿습니다: "대중 대중은 역사의 원동력이다."[101] 주체의 입장에서 볼 때, 인류 전체가 자신의 역사를 만들고자 하는 투쟁은 계급사회의 지배계층에 의해 제약을 받습니다.[102] 또한 노동자 계급만이 이러한 구속을 극복하고 인류가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103] 주체역사적 유물론과 궤를 같이하며, 자본주의의 노동자 계급 유입으로 그 토대가 마련되었고, 따라서 주체사회주의 시대에 특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104] 그러나 대중이 성공하려면 위대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101]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는 생산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주도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북한에서 유일한 위대한 지도자는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이것은 김일성이 1인 독재정치를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105]

이 이론은 위대한 지도자를 절대적이고 최고의 지도자로 만듭니다.[106] 노동자 계급은 스스로가 아니라 위대한 지도자를 통해 생각합니다.[106] 그는 노동자 계급의 장본인이며 유일한 합법적인 대표입니다.[106] 계급 투쟁은 위대한 지도자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고, 일반적으로 어려운 과제(특히 혁명적인 변화)는 그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에 의해서만 도입될 수 있습니다.[106] 따라서 역사적 발전에서 위대한 지도자는 노동자 계급의 주도적인 힘이며,[106] 결코 실수하지 않고, 항상 자애롭고, 대중(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규칙을 제정하는 흠잡을 데 없고, 부패하지 않는 인간입니다.[107] 위대한 지도자 체제가 작동하려면 단일 이념이 있어야 하는데,[108] 이를 북한에서는 단일 이념 체제라고 합니다.[108]

김씨 왕조

김일성 왕조는 WPK와 북한의 초대 지도자인 김일성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109] 북한 체제는 후계자들이 그의 혈통을 따르는 김일성에 의해 확립되었기 때문에 "잘 작동한다"는 것이 공식적인 이념입니다.[110] 모든 아이들은 "위대한 지도자의 혁명사"와 "친애하는 지도자의 혁명사"(김정일)를 교육 받습니다.[110] 김일성이 후계자로 처음 선택한 인물은 형인 김용주였지만, 이후 아들 김정일을 대신 임명하기로 결정했고, 이 결정은 6차 대회에서 공식화됐습니다.[35] 김정일은 2010년 제3차 WPK 회의에서 막내아들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했고, 2011년 초 아들이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52] 가문의 세습과 가문의 고위직 임명 때문에 김씨 가문은 왕조이자 왕족으로 불렸습니다.[111] 김일성의 저자 서대숙: 그러나 북한 지도자는 "김일성이 북한에서 구축한 것은 한국의 공산국가나 사회주의 국가보다는 그의 개인 통치를 수용하기 위한 정치체제와 더 유사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가 세운 정치체제가 아니라 그가 후계자로 지목한 그의 아들 [김정일]이 그의 통치를 계승할 것입니다."[112] 집권 김씨 가문은 사실상 전제 군주제[113][114][115] 혹은 '세습 독재'의 수장으로 묘사돼 왔습니다.[116]

단일 사상 체계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은 통치의 기준을 세우고 북한 주민들의 행동을 지도하는 10대 원칙과 65개 조항입니다.[117] 10대 원칙은 노동당에 의해 헌법이나 칙령을 대체하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국가의 최고법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118][119][120]

송분

속이 완전히 빨갛게 달아오른 토마토는 가치 있는 공산주의자로 여겨지고, 겉만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는 이념적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포도는 완전히 희망이 없습니다.

— The three main classifications in North Korean society (core, wavering, and hostile), are metaphorically described as tomatoes, apples, and grapes, respectively.[121]

송분은 1957년 5월 30일 WPK 정치국이 "반혁명적 요소를 가진 투쟁을 전인민적 정당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하여"(일명 5월 30일 결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제정한 카스트 제도에 붙여진 이름입니다.[122] 이로 인해 북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당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받는 숙청이 이루어졌습니다.[123] 숙청은 1959년 WPK가 김일성의 동생 김용주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감독기구를 설립하면서 본격화됐습니다.[123] 북한의 주민들은 세 개의 "세력"(적대적, 중립적 또는 우호적)으로 나뉘었고,[123] 한 사람이 분류되는 세력은 세습적이었습니다.[123] 적대 세력은 평양(수도)이나 다른 주요 도시 근처나 북한의 다른 나라와의 국경 근처에 살 수 없습니다.[123] 송분은 교육 및 취업 기회에 대한 접근성, 특히 WPK 가입 자격에 영향을 미칩니다.[121] 그러나 동유럽 공산정권의 몰락과 1990년대 북한 경제(및 공공유통체제)의 붕괴로 그 중요성은 감소했습니다.[124]

조직

중앙조직

WPK 중앙위원회 본부 및 그에 따른 당

의회는 당의 최고 기관이며 비정기적으로 소집됩니다.[125] 당규에 따르면 중앙위원회는 당의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최소한 6개월 이상의 통지를 하면 회의를 소집할 수 있습니다.[125] 당규는 의회에 다음과 같은 7가지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125]

  1. 중앙위원회 선출
  2. 중앙감사위원회 선출
  3. 사무총장 선출
  4. 퇴임하는 중앙위원회 보고서 검토
  5. 퇴임하는 중앙감사위원회 보고서 검토
  6. 당 정책 논의 및 제정
  7. 당규 개정 및 이에 대한 개정

WPK 전국회의 사이에서 중앙위원회는 최고 의사결정기관입니다.[126] 중앙감사위원회는 당의 재정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며 중앙위원회와는 별도로 활동합니다.[127] 중앙위원회는 여러 기관의 구성을 선출하여 업무를 수행합니다. 새로 선출된 중앙위원회의 제1차 전체회의는 중앙군사위원회(CMC), 사무국, 정치국, 주석, 중앙감사위원회를 선출합니다.[128][129] 정치국은 전원회의가 열리지 않을 때 중앙위원회의 기능과 권한을 행사합니다.[130] 주석단은 정치국, 중앙위원회, 대의원대회, 의회가 개회하지 않을 때 당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입니다.[131] 1980년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설립되었습니다.[131] CMC는 당내 군사문제에 관한 최고 의사결정기관으로 한국인 육군의 작전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WPK 사무총장은 CMC의 오른쪽 의장입니다. 한편, 사무국은 WPK 사무총장이 이끄는 최고 이행기구이며, 보통 중앙위원회의 부서, 위원회, 간행물 및 기타 조직을 이끄는 여러 비서관으로 구성됩니다.[133] 중앙감사위원회는 당원 징계 문제를 해결합니다. 조사 대상은 일반적으로 모든 당규 위반을 포괄하는 독직에서 반당 및 반혁명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134]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는 또한 부서, 국 및 기타 기관의 장을 선출하여 업무를 추진합니다.[135][136] WPK에는 현재 15개 이상의 중앙위원회 부서가 있습니다.[136] 이러한 부서를 통해 노동신문과 같은 여러 대규모 조직과 신문을 통제하고 있습니다.[136] 한국인 군대는 WPK 규칙에 따라 "혁명적 전통을 계승한 조선노동당의 혁명무력"입니다. 총정치국(GPB)은 총정치국(General Political Bureau)으로, WPK 규칙에 따라 "KPA 당위원회의 집행기관으로서, 따라서 중앙위원회의 활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 동일한 권한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138] GPB는 당 기구와 KPA 내의 모든 정치 담당자를 통제합니다.[138]

하위조직

WPK 엠블럼이 새겨진 김일성 배지

WPK에는 북한 지방정부의 세 단계를 위한 지방조직이 있습니다: (1) 성 및 성 단위 자치단체, (2)[139] 특별시, 보통시 및 도시구, (3) 농촌 군 및 마을. 북한은 9개의 도(道)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 도당위원회를 가지고 있으며, 그 구성은 WPK에 의해 결정됩니다.[139]

WPK에는 정규 회원과 수습 회원의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140] 회원 자격은 만 18세 이상부터 가능하며, 세포에 신청서(적어도 2년 이상 정당한 자격을 갖춘 두 당사자의 회원이 지지)를 제출한 후 부여됩니다.[140] 신청은 감방 본회의에서 처리되며, 찬성 결정은 군 단위 당 위원회의 비준을 거쳐야 합니다.[140] 신청이 승인된 후에는 불특정 "특별한 사정"에 따라 의무적으로 1년의 수습 기간이 면제되어 후보자가 정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140] 모집은 조직 및 지도부와 해당 지역 지사의 지시에 따라 진행됩니다.[140]

WPK는 1988년에 3백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했는데, 이는 1976년에 발표된 2백만 명의 회원에서 크게 증가한 것입니다. 이 증가는 3개 혁명 팀 운동의 동원 운동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습니다.[141] 당시, 12퍼센트의 인구가 당원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공산주의 국가로서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숫자였고, 루마니아에 버금가는 수치였습니다.[142] 이후 수치는 공개되지 [141]않았지만 오늘 회원 수는 65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143]

북한 사회는 공업 노동자, 농민, 사무원 등 세 계층으로 구분됩니다.[141] 1948년 이래로 공업 노동자가 당원의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고, 농민과 사무원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141] 1970년대부터 북한의 인구가 도시 50%에 도달하면서 당의 단체 구성이 바뀌었고, 국영기업체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당원이 많아졌고, 농업협동조합의 조합원 수는 감소했습니다.[144]

기호

WPK의 상징은 공산주의 망치와 낫을 각색한 것으로, 한국 전통 서예 붓이 있습니다. WPK에 의해 묘사된 바와 같이, 그 상징들은 한국 사회의 세 계층을 나타냅니다: 공업 노동자 (망치), 농민 (병아리), 그리고 사무원 (잉크 붓). 사무원반은 사무원, 소상인, 관료, 교수, 작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수업은 북한의 수업 분석에 고유한 것으로 북한의 주민들 사이에서 교육과 문해력을 높이기 위해 개념화되었습니다.[145]

선거사

최고인민회의 선거

선거 당대표 좌석 +/– 위치
1948 김일성
157 / 572
Increase 157 Increase 1등
1957
178 / 215
Increase 21 Steady 1등
1962
371 / 383
Increase 193 Steady 1등
1967
288 / 457
Decrease 83 Steady 1등
1972
127 / 541
Decrease 161 Steady 1등
1977 [자료 누락]
1982 [자료 누락]
1986 [자료 누락]
1990
601 / 687
Steady 1등
1998 김정일
594 / 687
Decrease 7 Steady 1등
2003 [자료 누락]
2009
606 / 687
Steady 1등
2014 김정은
607 / 687
Increase 1 Steady 1등
2019 [자료 누락]

참고 항목

메모들

  1. ^ 한국어: 조선로동당, MR: 조선로동당

참고문헌

인용문

  1. ^ a b c d 마이어스 2011, 페이지 9, 11-12.
  2. ^ 세스 2019, 페이지 159.
  3. ^ a b 서 1988, 313쪽.
  4. ^ Cha & Hwang 2009, p. 214.
  5. ^ 2016년 백악관.
  6. ^ a b c 김 2021 : "우리 당은 인민을 위한 길을 닦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려는 그들의 위대한 목적과 이상을 실현하는 데 우리에게 어떤 행운의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결코 기대하지 않습니다." 당 중앙위원회의 지도 아래 수십만 명의 감방 비서들과 간부들이 당 중앙위원회의 지도 아래 당원들을 굳건히 단결시키고 그들의 충성심과 애국심, 창조적 지혜를 마음껏 발휘할 때, 우리 혁명은 항상 의기양양하게 승리할 것이며 공산주의의 이상은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7. ^ a b 연합뉴스2021 : "조선노동당의 당면 목표는 공화국 북반부에 번영하고 문명화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전국적 규모로 사회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발전을 실현하는 것이며,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인민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되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8. ^ a b Frank et al. 2013, p. 45.
  9. ^ a b c 연합뉴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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