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아이티인
Polish Haitians모집단이 유의한 지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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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잘레, 캡헤이텐, 폰드드드블랑크, 자멜, 라발라인, 라발레데자크멜, 포트살루트, 생장두수드 | |
언어들 | |
아이티 크리올, 프랑스어 | |
종교 | |
로마 가톨릭교회, 아이티 보다우 | |
관련 민족 | |
다른 폴란드 디아스포라 |
폴란드 아이티인(Haitian Creole: Poloné 또는 La Polone)은 주로 19세기 초까지 폴란드와 아프리카의 혈통을 가진 아이티인이다. 몇몇은 아이티 시민권을 얻은 더 최근에 태어난 폴란드인일 수도 있다. 포르토프랭스에서 약 45마일 떨어진 야산에 있는 작은 마을 카잘레는 아이티에서 폴란드 민족 공동체의 주요 인구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지만, 다른 마을들도 있다. 카잘레에는 아이티 혁명 당시 노예에 가담했던 나폴레옹의 폴란드 레지옹트들의 생존 멤버들의 후손들이 있다. 이들 중 400~500여 명은 전쟁 후 아이티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1] 이들은 장 자크 데살린스 총독과 황제로부터 누아르라는 특별한 지위를 받았고 아이티 헌법에 따라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역사
1802년 나폴레옹은 약 5200명의 폴란드 군단을 파견하여 생도밍게에서 프랑스군에 합류시켜 아이티 노예 반란을 진압했다. 폴란드인들은 18세기 후반에 폴란드를 분단한 프로이센(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칸막이들과 압제자들로부터 폴란드의 독립을 회복하는데 프랑스의 지원을 받기를 희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2] 어떤 이들은 생도밍게에서 죄수들의 반란이 일어났다고 들었다. 그들이 도착하여 전투에 투입되기 시작한 후, 폴란드 소대는 프랑스인들이 백인 주인들로부터 자유를 위해 싸우는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봉기를 진압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군과 폴란드군 모두 사망률이 높았고, 전사한 것보다 황열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았다. 살아남은 폴란드 군인들은 그들의 적수를 존경했고, 결국 프랑스 군을 가동시켜 반항하는 아프리카인들에 가담했다. 프랑스군과 나란히 남아 있던 폴란드군 병사들은 일부러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붙잡힌 포로들을 살해하지 않았다.[3] 반은 흑인인 브와디스와프 프란치스코예크 자브워노프스키도 폴란드 장군 중 한 명이었으나 생도밍게에 도착한 직후 사망했다. 폴란드 군인들은 세계 최초의 자유 흑인 공화국과 최초의 독립 카리브해 국가 수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아이티가 독립을 쟁취한 후, 데살리네스는 폴란드인들을 알아보고 섬에서 대부분의 프랑스 백인들과 많은 유색인종(물라토스)을 학살하라고 명령하자 그들을 살려주었다. 그는 폴란드인들에게 새로운 지배계급을 구성하는 누아르(흑인)로 분류를 허가했고, 헌법에서는 그들에게 완전한 아이티 시민권을 부여했다.[4] 카잘리는 그들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폴란드-하이티인의 후손들은 이 섬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과 같은 농민들이었다. 카잘레는 많은 현지인들이 그것이 그 이름의 원천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때때로 잘레프스키의 고향이라고 불렸다. 잘레우스키는 흔한 이름이고, 아이티어 크리올어(kay)는 고향(kay)이라는 뜻의 단어 또한 그 역사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5]
아이티의 초대 국가원수 장 자크 데살린은 폴란드 국민들을 "유럽의 백인 흑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폴란드인과 아이티인의 형제애를 의미하기 때문에 당시 큰 영광으로 여겨졌다. 약 160년 후인 20세기 중반 흑인 민족주의자와 범아프리카인의 시각으로 유명한 아이티의 프랑수아 뒤발리에 대통령은 폴란드인을 지칭하고 애국심을 미화하면서 같은 개념의 '유럽 백인 흑인'을 사용했다.[6][7]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아이티를 방문했다. 그는 어떻게 폴란드인들이 아이티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노예 반란에 기여했는지를 언급했다. 파파닥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장클로드 뒤발리에는 교황 방문에 계획된 각종 의식에 참석하고 '전통 옷'을 입도록 폴란드 아이티인들을 선발하라고 지시했다. 대부분은 나들이옷을 입었다.
폴란드의 가장 존경받는 종교적 상징 중 하나는 Czzstochowa의 블랙 마돈나라는 아이콘이다. 아이티 부두가 에르줄리(Erzulie), 즉 에질리 단토르(Ezili Dantor)로 흡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검은 색의 성모 마리아가 검은 피부의 유아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은 아이티 로아 영혼 중 한 사람의 시각에 영향을 주었다. 폴란드 군인들이 그녀의 이미지를 생도밍게에 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오늘날까지 폴란드 아이티인들은 혼혈인이며 종종 금발이나 연하고 직선적인 머리, 가벼운 눈, 그리고 얼굴 생김새와 같은 유럽의 특징으로 확인된다. 물론 이 섬에는 전쟁이 끝나고 도착한 몇몇 유럽인들을 포함한 다른 유럽인들이 있었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폴란드인들이 카잘레, 라발레데자크멜, 폰드드드블랑크, 라발라인, 포트살루트, 생장두수드에 정착하여 아이티인 아내, 가족과 함께 농민으로 살았다.[8]
참고 항목
참조
- ^ Rypson, Sebastian (2008). Being Poloné in Haiti: Origins, Survivals, Development, and Narrative Production of the Polish Presence in Haiti. Warsaw: academia.edu. ISBN 978-83-7545-085-9. Retrieved 16 June 2021.
- ^ Perry, James (2005). Arrogant Armies: Great Military Disasters and the Generals Behind Them. Edison: CastleBooks.
- ^ Girard, Philippe R. (2011). The Slaves Who Defeated Napoleon: Toussaint Louverture and the Haitian War of Independence 1801–1804. Tuscaloosa, Alabama: The University of Alabama Press. ISBN 978-0-8173-1732-4.
- ^ Abbott, Elizabeth (2011). Haiti: A Shattered Nation. ISBN 9781468301601. Retrieved 1 January 2015.
- ^ "200 years away from home Polish descendants in Haiti". 10 December 2012. Retrieved 7 February 2014.
- ^ Susan Buck-Morss (2009). Hegel, Haiti, and Universal History. University of Pittsburgh Pre. pp. 75–. ISBN 978-0-8229-7334-8.
- ^ Riccardo Orizio (2000). Lost White Tribes: The End of Privilege and the Last Colonials in Sri Lanka, Jamaica, Brazil, Haiti, Namibia, and Guadeloupe. Simon and Schuster. pp. 159–. ISBN 978-0-7432-1197-0.
- ^ Dapía, Silvia G. (2012). "Polish American Studies". 69 (1).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5–8. JSTOR 41440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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