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더글러스
Roger Douglas로저 더글러스 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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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더글러스 | |
제35대 재무장관 | |
재직중 1984년 7월 26일 ~ 1988년 12월 14일 | |
수상 | 데이비드 랜지 |
선행자 | 로버트 멀둔 |
성공자 | 데이비드 케이길 |
제17대 세입부 장관 | |
재직중 1984년 7월 26일 – 1987년 8월 24일 | |
수상 | 데이비드 랜지 |
선행자 | 존 팰런 |
성공자 | 트레버 드 클레네 |
제45대 관세청 장관 | |
재직중 1975년 3월 13일 – 1975년 12월 12일 | |
수상 | 빌 롤링 |
선행자 | 믹 코넬리 |
성공자 | 피터 윌킨슨 |
제10대 주택부 장관 | |
재직중 1974년 9월 10일 – 1975년 12월 12일 | |
수상 | 빌 롤링 |
선행자 | 버트 워커 |
성공자 | 프레이저 콜먼 |
제12대 방송부 장관 | |
재직중 1972년 12월 8일 – 1975년 12월 12일 | |
수상 | 노먼 커크 빌 롤링 |
선행자 | 버트 워커 |
성공자 | 휴 템플턴 |
제42대 우체국장 | |
재직중 1972년 12월 8일 – 1974년 9월 10일 | |
수상 | 노먼 커크 |
선행자 | 버트 워커 |
성공자 | 프레이저 콜먼 |
뉴질랜드 의회 의원 비료와를 위해 | |
재직중 1978년 11월 25일 – 1990년 10월 27일 | |
선행자 | 머브 웰링턴 |
성공자 | 조지 호킨스 |
뉴질랜드 의회 의원 마누카우용 | |
재직중 1969년 11월 29일 – 1978년 11월 25일 | |
선행자 | 콜린 모일 |
ACT 뉴질랜드의 제1대 지도자 | |
재직중 1994 – 1996년 3월 24일 | |
성공자 | 리처드 프레블 |
뉴질랜드 의회 의원 ACT 파티 리스트용 | |
재직중 2008년 11월 8일 – 2011년 11월 26일 | |
개인내역 | |
태어난 | 뉴질랜드 오클랜드 | ) 1937년 12월 5일
정당 | ACT (현재의 경우 노동 (1990년까지) |
관계 | 빌 앤더튼(할아버지) 노먼 더글러스 (아버지) 말콤 더글러스 (오빠) |
직업 | 회계사 |
로저 오웬 더글러스 경(Roger Owen Douglas, 1937년 12월 5일 출생)은 두 개의 노동당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은퇴한 뉴질랜드 정치인이다. 그는 제4차 노동당 정부의 경제정책이 "로거노믹스"로 알려지게 된 1980년대에 뉴질랜드의 급진적인 경제 구조 조정에서 두드러진 역할로 가장 잘 알려지게 되었다.
더글라스는 1969년부터 1990년까지 노동당 의원을 지냈다. 재무부 장관 시절(1984년~1988년) 정부는 뉴질랜드 달러를 발행하고, 국가 서비스에 기업 관행을 도입하고, 국가 자산을 매각하며, 일련의 규제와 보조금을 없앴다. 일부 노동당 지지자들은 더글라스의 경제정책을 노동당의 좌파 정책 플랫폼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대중과 일반 당원들에게 깊은 인기를 잃게 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이 개혁이 국민 물둔(1975~1984년 재무부 장관) 하에서 엄격한 규제를 받아온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필요하다고 옹호했다. 그의 평평한 세금 제안의 결과로, 더글라스는 데이비드 랭 총리와 갈등을 겪게 되었고, 그는 결국 재무장관직을 사임했다; 1989년 더글라스가 내각에 재선되자 더글라스 자신이 총리로서 사임하면서 노동 정부의 종말을 알렸다.
1993년 더글라스와 데릭 퀴글리는 그의 정책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자 및 납세자 협회(ACT New Zealand Party의 전신)를 설립했다. 더글라스는 2011년 은퇴하기 전 2008년 ACT 백벤쳐로 의회에 복귀했다.
초기생활과 배경
더글라스는 1937년 12월 5일에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노동조합운동과 강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테오필러스 "빌" 안데르톤(1891~1966)은 영국 버밍엄의 좌익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 겸 소기업 소유주였으며, 1921년 부인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주했다.[1] 안데르톤은 1935~1946년 에덴의 하원의원을, 1946~1960년 오클랜드 센트럴의 하원의원을 지냈다. 그는 1957-1960년 제2노동당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냈고, 예술위원회를 설립했다.[2] 로저 더글라스의 아버지 노먼 베이지 더글러스(1910~1985) 전 노조비서관은 1960~1975년 오클랜드 센트럴의 하원의원을, 1967~1972년 노동·교육·사회보장 야당 대변인을 지냈다.[3] 로저의 형 말콤 더글라스는 1978-1979년 휴누아의 잠시 노동당 하원의원이었다.
더글라스는 오클랜드 원 트리 힐의 에웬슨 에비뉴에 있는 한 주립 주택에서 자랐다. 그는 엘러슬리 초등학교를 다녔고, 산술과 스포츠를 잘했다. 더글라스는 1950년에서 1955년 사이에 오클랜드 문법 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그는 현감과 열렬한 크리켓 선수였고 럭비 선수였다.[4] 더글라스는 1952년 말 오클랜드 회계법인 메이비, 할스테드, 키들에서 여름 직장을 구했다.[4] 그는 1957년 오클랜드 대학에서 회계학 학위를 받았다. 이후 사우스오클랜드의 브렘워스 카펫츠에 회사 비서로 채용되었다. 그는 글레니스 준 앤더슨과[5] 결혼하여 1961년에 만게레로 이주하여 마누카우 노동당 선거 위원회의 대통령이 되었다.[3] 그는 회사가 1960년대 중반 UEB에 매각된 후 브렘워스 사를 개별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4] 그는 또한 1963년에 성공적인 노동당의 후보인 콜린 모일의 선거 관리자로 일했다.[3]
정치 경력
그는 의회에 노동당 하원 의원 마누에 성공했다 지역 몸 정치에는 마누카우 시 이사회의 일원으로 1965년과 1969년, 그가 계획이 어디 마누카우 시티 센터 지금 stands,[6]토지의 매수를 청구할에 중요한 사이에는 몇가지 경험 후 더글러스 1969년 국가 정치에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kau그는 1970년 4월 7일 '응답하라 연설' 토론에서 첫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의 대부분을 국내 경제에 대한 외국인 투자에 반대하는 사건에 할애했다.[7] 국내 경제의 대외 보호와 정부의 투자 개입에 대한 그의 사례는 당시 노동당의 특징이었다. 더글라스는 산업과 경제에 관한 당의 정책에 관여하게 되었다. 1969년부터 1978년까지 마누카우 의원, 1978년부터 1990년까지 비료와 의원을 지냈다.
내각 장관(1972~1975)
1972년 노먼 커크 휘하의 노동당이 선거에서 승리했고, 노동당 의회 코커스는 당시 34세였던 더글라스를 내각으로 격상시켰다. 그래서 더글라스는 50년 만에 최연소 내각 장관이 되었다.[8] 그의 아버지 노먼 더글러스(62) 당시 의회 동료였던 노먼 더글러스(62)는 내각 투표에서 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해 씁쓸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9] 투표 당일, 커크는 노먼 더글라스의 반응이 극단적이고 그것이 아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너무 염려하여 더글러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커크는 비서에게 "로저의 생애에서 최고의 날이 되었어야 했는데 그 대신 최악이었다"고 말했다.[10]
제3차 노동당 정부 시절 더글라스는 1974년 예상치 못한 커크가 사망할 때까지 우체국장 겸 방송부 장관을 지냈다. 커크의 후임자인 빌 롤링은 더글러스 주택부 장관을 임명했다. 그는 1975년까지 방송부 장관으로 재직했는데, 그 때 그 포트폴리오는 폐지되었다. 더글라스는 1975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로버트 멀둔의 집권 하에 국민당에 패배할 때까지 주택부 장관과 관세부 장관이었다. 더글라스는 내각의 가장 후배가 되었지만, 곧 근면과 역량으로 명성을 얻었다.[11] 1974년 주택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공개적으로 내각의 인재로서 주목받았다. 그것은 의미심장하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민감한 포트폴리오였다.[12]
몇 해 | 용어 | 유권자 | 리스트 | 파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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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972 | 제36회 | 마누카우 | 노동 | ||
1972–1975 | 제37회 | 마누카우 | 노동 | ||
1975–1978 | 제38회 | 마누카우 | 노동 | ||
1978–1981 | 제39회 | 비료와 | 노동 | ||
1981–1984 | 사십일 | 비료와 | 노동 | ||
1984–1987 | 제41회 | 비료와 | 노동 | ||
1987–1990 | 제42회 | 비료와 | 노동 | ||
2008–2011 | 제49회 | 리스트 | 3 | ACT |
더글라스는 방송부 장관으로서 제2의 텔레비전 채널을 도입할 수 있도록 행정 체계를 고안했다. 독점 사업자인 뉴질랜드 방송사를 공영 라디오 뉴질랜드와 새로운 방송 위원회를 관리하는 회사인 Television One과 Television Two(이하 South Pacific Television)로 대체했다.[13] 공개 협의를 거쳐 1975년 4월 1일 실시되었다. 그러나 물둔 정부는 1977년 3개 방송사를 뉴질랜드의 단일 방송사로 통합했고, 1980년 두 텔레비전 채널이 Television New Zealand로 통합되었다.
더글라스는 노령연금을 보충할 강제적 기여 연금제도에 대한 정부 계획의 초기적이고 열정적인 추진자였다. 1972년, 여전히 반대하면서, 그는 의무적인 연령을 제공하는 개인 의원의 법안을 도입했다. 내각에서,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롤링과 더글라스는 1973년 정부의 연금 연장 제안을 발표한 백서를 주로 담당했다. 은퇴를 위한 개별적인 충당금을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이 계획은 국내 경제에 대한 투자를 위한 자본의 원천이 되려는 의도였다.[14] 이 계획은 1974년 뉴질랜드 연로법의 형태로 법이 되었다.
더글라스는 1975년 선거에서 노동당의 강령의 일부였던 '의무적 마인더스 수당'의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당초 노령기여금을 감액한 여성에 대한 보상책으로 취해진 이 제도는 선거 후 첫 번째와 둘째 자녀, 또는 처음 두 자녀 출산 시 여성들에게 현금 지급을 제공했다. 그것은 즉시 멀둔에 의해 "아기 보너스"로 불렸다.[15]
노먼 커크의 개인 비서였던 마가렛 헤이워드는 제3차 노동당 정부 동안
[더글라스]는 그가 나중에 된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가장 개입적이고 친국가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장관으로서 그는 심지어 여성들에게 아기 보너스로 알려진 것을 주정부로부터 실질적으로 아이를 낳기 위한 여분의 현금을 주길 바랐는데, 이 모든 것을 돌이켜보면 아주 동구권인 것 같다.[16]
반대로 더글라스는 우체국을 필라텔릭국과 옐로페이지의 두 사업 중 '시장'으로 만들려는 시도 외에는 그의 다른 장관 책임인 우체국에 대한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74년 노먼 커크의 사망 이후 주택부 장관으로 격상되면서 다른 일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17]
반대(1975–1984)
1977년 의회에 입성한 동료 데이비드 랜지와 마찬가지로 더글라스는 1972년부터 1975년 사이에 노동당의 정부 수행에 비판적이었다.[18] 1975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패배한 것은 1928년 이래 최대의 선거 역전이었다. 87명의 의원 중 노동당이 23석을 차지한 것은 같은 수의 국민 다수가 되었다. 제3노동당은 해외 차입을 통해 경기 위축을 완화하려 했으나 실업률을 상속받은 수준으로 유지하면서도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15%로 3배가량 증가했고, 수지 흑자는 적자가 됐다. 노동당은 1975년까지 경제관리자로서의 신뢰를 잃었다.[19] 일련의 추문과 오발, 일부 장관들의 무능, 그리고 멀둔의 포퓰리즘에 대항하지 못한 롤링의 무능이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20] 그 패배의 본질은 노동당의 더 나이든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 사이에 이미 존재했던 분열을 확대시켰다.[21]
1975년 이후, 더글라스는 주택, 특별 프로젝트, 소비자 문제, 교통에 관한 노동당의 연속적인 대변인이 되었다.[22] 1980년에는 '대체예산'이라는 제목으로 미래 경제발전을 위한 제안서를 연재했다. 그 제안들은 노동당 정책이 아니었고 그들의 출판물은 롤링 당수에 의해 그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롤링은 더글라스를 의회 앞 벤치에서 강등시켰고 그는 운송에 대한 책임을 잃었다.[23] 1981년 그는 무역과 산업의 대변인이 되었다.[24]
더글라스는 노동당의 경제정책 접근법이 단편적이고 비현실적인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3] 그는 또한 당 지도부가 다시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1980년 데이비드 랭지의 실패한 당권 도전을 지지했다. 비공식 노동당 코커스 정치에서 더글라스는 롤링의 대표적인 코커스 반대파가 포함된 소위 "피쉬 앤 칩 여단"[25]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을 리처드 프레블, 마이크 무어, 마이클 바셋이라고 밝혔다.[26]
랜지의 지도력 확보 실패, 노동당의 경제정책 접근에 대한 계속되는 불만, 당 내 주요 인사들과의 어려운 관계 등으로 더글라스는 1981년 총선에서 의회 은퇴 의사를 선언하게 되었다. 랭은 그를 설득하여 재고하도록 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27] 랜지는 더글라스가 모더니셔라고 믿었다. 그는 더글라스를 때로는 완고하고 제한적이라고 보았지만, 랭지의 견해로는 그는 운전을 했고, 노동당을 그토록 오랫동안 반대해 왔던 전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18] 1983년 3월 랑게가 노동당 당수가 된 후, 그는 더글러스를 더글러스 노동당의 재무 대변인으로 만들었다.[28]
임명 당시 더글라스는 급진주의자로 명성이 높았지만 경제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경제 경영에 대한 노동당의 케인즈식 접근법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29] 1983년 말에 이르러 그의 생각은 현저하게 경제권으로 옮겨갔다.[30]
1983년 말 노동당 코커스 경제위원회는 더글라스가 경제정책 패키지에 이름을 붙인 논문을 채택했다. 위원회의 지지는 만장일치가 아니었다. 더글라스 신문은 코커스에서 의견이 분분했다.[31] 몇몇 caucus 위원들은 노동당의 정책 위원회에 대안적인 경제 정책 초안을 제시했다.[32] 정책 위원회는 분열되었다. 그 당원들은 그 당의 경제 강령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다. 이견차가 점점 대중지식의 문제가 되어 1984년 총선이 가까워지자 제프리 파머 당 부대표는 양쪽의 주장을 종합한 절충안 초안을 작성했다.[33] 란지는 파머의 논문이 어느 한쪽을 만족시켰는지 의심했다.[34] 멀둔이 예상외로 조기 선거를 소집하자 파머 문건은 노동당의 선거 정책 플랫폼의 일부가 되었다.[35]
더글러스 경제정책 패키지의 핵심 요소는 노동당의 정책 문서는 아니지만 뉴질랜드 달러의 20% 절하였다. 이것은 민감한 주제였다. 만약 차기 정부가 달러를 평가절하할 것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딜러들은 선거 전에 달러화를 더 높은 가격에 팔고 그 이후에는 더 낮은 가격에 다시 사들이는 방식으로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화폐를 운용할 경우 수억 달러에 이를 수 있는 차액은 납세자가 부담하게 된다.[36] 멀둔이 선거를 소집한 직후 더글라스는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공개회의를 열고 자신의 경제정책안을 배포했는데, 이는 20%의 평가절하를 초래했다. 멀둔은 노동당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복사본을 입수해 언론에 공개했다.[37] 더글라스는 평가절하가 노동당 정책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고 실수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38] 랜지는 이 실수가 더글라스의 판단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고 믿었지만, 더글라스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선거에 너무 가까운 새 금융 대변인을 임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34]
재무부 장관 (1984–1988)
노동당은 1984년 선거에서 권좌에 복귀하여 제4차 노동 정부를 구성하였다. 랜지는 수상이 되었고 더글라스는 재무장관이 되었다. 더글라스의 요청에 따라 랑게 장관은 데이비드 케이길 통상산업부 장관과 리처드 프레블 교통부 장관 등 2명의 고위 재무장관을 차관보로 임명했다.[39] 더글라스와 그의 부장관들은 "Treasury Troika" 또는 "Troika"[40]로 알려지게 되었다.
선거 직후 퇴임 정부는 더글라스가 지지했던 평가 절하를 단행했다. 재무장관과 준비은행장은 조기선거 발표에 이은 통화위기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평가절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41]
조기 선거를 둘러싼 불안정한 정치 풍토와 외환 위기는 더글라스에게 내각에서 막강한 지위를 주었다. 랜지는 1986년 정부가 1984년 11월에 선출되고 1985년 6월에 첫 예산을 제시했다면 더글라스에게 1984년의 경제 및 정치 풍토가 그가 가지지 못했을 영향력을 주었다고 말했다. 1984년 7월 위기가 닥쳤을 때, 로저 더글러스는 무엇보다도 경제 문제를 깊이 생각해왔기 때문에 내각이 경제 철학에 다시 의존할 필요가 있을 때 더글러스였다.[42]
노동당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장부를 열 것"을 약속했는데, 이는 주로 멀둔이 경제 관리에 대해 비밀스럽고 특별하게 접근하는 것에 대한 도전이다. 더글라스는 '경제관리'라는 제목으로 등장한 차기 정부에 재무부의 브리핑이 게재되는 것에 동의하는 반응을 보였다.[43]
더글라스는 1984년 9월 11일 시작된 경제정상회의(Economic Summit Conference)에서 첫 번째 예산으로 이미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이번 정상회담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되는 것으로 보면서도 지속적인 합의와 관여에 대한 기대감을 높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44] 그는 이후 자신이 이미 염두에 둔 경제구조조정안을 갖고 재무 포트폴리오를 장악했다며 1984년 11월 자신이 전달한 예산에 대해 "보고서와 동료 장관 및 재무부 관료들과의 토론에서 내가 당초 구상했던 것과 신선한 선택지를 혼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45]
더글라스가 경제정책은 1980년[46] 초 자신이 구상한 계획의 산물이며 위기에 대한 대응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정부를 불신임 혐의로 남겨두게 했다.[47]
1984년 예산은 노동당이 수립한 경제관리 접근법에서 급진적으로 벗어난 것이었다. 더글러스는 정부의 의도가 유권자들에게 명확히 전달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정책위원회에 자신의 모든 프로그램의 철자를 썼다고 말했는데, 그는 이 프로그램을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고 지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세세한 내용은 단기간에 흡수할 수 있는 역량이 없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48]
그 예산은 노동당의 성명서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것의 내용은 경제운용에 제시된 재무부 견해와 밀접하게 일치했다.[49] 더글라스의 재무부 확인은 1985년까지 완료되었다. 1984년 선거 전에 정부가 채택한 재무구상에는 소비 종합세(GST) 도입, 달러 유동화(1984년까지 더글라스가 반대했던 것), 1985년 말 발표된 정부 무역활동의 기업화 등이 포함됐다.[50]
재무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견해는 신고전주의적이고 화폐주의적이며, 상업적 기준을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삼았다.[51] 더글라스는 이러한 견해를 옹호하는 것이 자신을 정치적 스펙트럼의 우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정부의 사회적 목표가 제1차 노동당 정부의 목표와 같으며,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노동당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경제적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2] 그는 재무부의 조언이 노동정책과 상충된다는 비난으로부터 재무부의 역할은 국가 전체의 이익에 기초하여 조언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재무부를 옹호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재무부는 정부가 당리당략이나 이념에서 자유로운 방식으로 장관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성명서를 이행하는 것을 도울 의무가 없었다.[53]
동전인 "로거노믹스"는 적어도 1985년부터 4차 노동당 정부의 경제 개혁 정책의 속기로 사용되었다.[54] 더글라스의 공개적인 인지도는 높아졌고, 그는 재계에서 정부에 대한 폭넓은 지지를 쌓았다.[55]
더글라스는 1987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한 후 재무부 장관으로 재선임되어 1988년 12월까지 재무장관으로 재직했다. 그의 두 번째 임기는 랑게 총리와의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랭과 더글러스 (1984–1989)

랭과 더글라스 사이의 갈등은 정부의 핵심에 있는 모순을 반영했다. 1984년 총선 캠페인 당시 랜지의 합의와 포괄성에 대한 이야기는 노동당의 사회 민주주의 역사를 반영했다. 더글라스는 급진적 변화를 의인화했다.[56]
란지는 1984년 예산을 강력히 지지했고, 이를 당과 대중에게 홍보했다.[57] 더글러스와 랜지는 내각과[58] 공공장소에서 모두 가공할 정치적 결합체였는데, 랭지의 유머와 미사여구는 더글러스의 경제 구조조정에 대한 의지에 내재된 결단력과 외곬성을 보완했다.[59]
랜지는 더글라스의 집요함이 필요했고 대담성이 프리미엄에 달했던 정부 첫 임기 때 더글라스의 집요함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신과 맞지 않는 이해관계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하지 못해 한계가 있다고 봤다.[60] 1986년 두 사람은 왕실 사회정책위원회 설립에 대한 내각 토론에서 반대 입장을 취했는데, 랑지는 이를 재무부에 대한 지적 균형추로 보았다.[61] 1987년 초 더글라스와 그의 동맹인 리차드 프레블이 마오리 대출 사건에 이어 마오리족 장관 코로 우테레(Kooro Wētere)의 사임을 받아들이려는 랑지의 요구를 거절하도록 내각에 설득하면서 더글러스 사무실과 란지 사무소의 관계는 경색되었다.[62]
더글라스는 1987년 4월 랜지에게 자신이 선호하는 1987년 예산안은 GST가 10%에서 15%로 상승했고, 공중 보건과 교육에서 사용자 부담금의 확대와 대부분의 정부 재산의 매각 그리고 결국 15%로 고정된 소득세율의 달성이 포함되었다고 말해 충격을 주었다. 랜지는 "재무장관이 제정신을 차리도록 하는 것은 공직의 짐에 익숙하지 않은 추가였다"[63]고 썼다. 더글라스는 랜지와 선배 동료들과 상의한 후 그의 제안을 추구하지 않았다.[64]
1987년 선거 운동에서 더글라스는 급진적인 개혁을 지속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고 랭지는 급진적인 경제 개혁이 대부분 완료되었다고 말했다.[65] 더글라스의 상업적 이익에 대한 호소는 그가 재계에서 캠페인을 위해 모은 거액의 돈(오클랜드 사업가 앨런 호킨스가[66] 준 25만 달러 포함)에 반영됐다.[67] 그는 자신이 모금한 돈을 노동당 조직에 전달하지 않고 텔레비전 광고와 같은 목적에 맞게 자금을 배분하면서 직접 관리를 선택했다.[68]
랜지의 선거 운동은 빈약했고, 더글라스는 1987년 노동당의 승리에 더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69] 당시 내각의 중진이었던 마이크 무어는 랭지가 1984년 선거에서 이겼지만 더글라스는 1987년 선거에서 이겼다고 말했다.[70] 노동당은 의회 다수당을 늘렸다. 투표는 국민당이 가장 안전한 의석에서는 노동당에, 전통적으로 노동당에 투표했던 의석에서는 국민당에로 쏠렸다.[71]
선거 직후 랜지는 더글러스와의 협의 없이 개각을 단행했다. 그는 나중에 더글라스를 더 이상 믿지 않으며 포트폴리오의 재분배를 이용해 자신을 어느 정도 구속하고 싶다고 썼다.[72]
더글라스는 1987년 초에 그가 시사한 급진적인 제안들에 대한 작업을 계속했다.[73] 1987년 10월 주식시장의 세계적인 하락은 그의 업적에 더욱 긴박감을 주었다.[74] 12월 1987년, 내각, 랭의 예약에도 불구하고 원칙의 긴급성의 이유로 그는 프로 재무 조언의 동료에게 알리지 않았어 소득세의 정액 요금과 소득 지원 새로운 형태의 최저 보장 가족 소득(GMFI)[75]GMFI는 더글러스 initiative[76]호출을 지원하는 성명에 동의했다.posals 재정적인 위험이 [77]있었어
1987년 12월 17일 정부의 GMFI 도입 의도와 소득세 균일세 도입 의향 발표로 로저노믹스의 만조세를 기록했지만 더글러스-랜지 간 고조되는 긴장감을 해소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더글라스는 그의 제안이 실행 불가능하다는 랜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78] 더글라스는 1988년 1월 랑게가 기자회견에서 관리들이 편평한 세금/GMFI 제안의 실질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었으며 정부가 이를 재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유럽에 있었다.[79] 더글라스는 자신이 내각의 과반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믿고 유럽으로부터 즉시 귀국했고, 총리와 재무장관 사이의 균열은 대중의 지식에 관한 문제가 되었다.[80]
내각이 GMFI를 버리고 조세 규모에 대한 타협점을 찾았지만 더글라스-랑게의 분열에서 정부 입지가 회복되지 않아 해가 갈수록 악화되고 개방이 확대됐다. 랜지는 데이비드 케이길이 재무장관으로서 더글라스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믿었지만, 케이길씨는 랭이 더글러스를 해고할 경우 군복무를 거절했다.[81] 1988년 12월, 더글라스는 랜지에게 편지를 써서 그가 이끄는 정부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다는 것을 노동당 간부들에게 알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랜지는 이 편지를 사표라고 해석하고 더글라스 대신 케이길로 대신했다.[82]
더글라스는 공개 성명, 내각 보고서의 무단 공개, 1988년 12월 21일 노동당 당원대회에서 랭의 지도력에 대한 도전 실패 등을 통해 랭에 대한 선거운동을 계속했다.[83] 1989년 6월, 코커스에서 그의 지지자들은 랑게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는데 랑게가 가까스로 이겼다.[84] 1989년 8월 3일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더글라스를 내각에 복귀시키기로 투표했다. 이번 투표를 자신과 더글라스 사이의 선택으로 본 랜지는 거의 그 직후 그의 사무실을 사임했다.[85]
랜지는 사임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지금은 원칙이 인격을 대체할 때"라고 말하며 더글러스와의 불화의 배경에는 정책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86] 그는 더글라스의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로저와 그의 결심, 그리고 특히 그가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그의 절대적이고 가차없는 추구는 충성의 모든 고려사항들을 압도하고 결국 우정의 모든 표시들을 압도했다."[87] 더글라스는 문제에 있어서 철학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른 동기를 랜지의 탓으로 돌렸다: "내 마음 속에 그는 내 마음 속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 분열을 만들었다. 우리는 각자 역할이 있었다. 나는 내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가 이해했어야 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88]
랜지의 후임인 제프리 파머는 더글러스를 데이비드 케이길의 재무 포트폴리오로 복원하지 않고, 그를 경찰청 장관과 이민부 장관으로 임명했다.[89] 더글라스는 노동당이 패배한 1990년 선거에서 의회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뉴질랜드 제4국가의 루스 리처드슨 재무장관의 비호 아래 계속되었다('안락사'[90]로 알려지게 된 스타일로).
ACT 뉴질랜드
1993년 더글라스는 데릭 퀴글리와 함께 소비자 및 납세자 협회를 공동 설립했다. 더글러스 앤 퀴글리는 이 협회가 더글라스 경제 정책을 홍보하는 압력 단체 역할을 할 것을 의도했다. 그 직후인 1996년, 한국은 MMP 선거제도를 사용하는 것으로 전환했다. MMP는 작은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 훨씬 더 나은 기회를 주었고, 협회가 ACT 뉴질랜드당을 설립하도록 장려했다.[91] 초창기 정당의 선언문은 더글라스가 쓴 '미완성 사업'이라는 책에 바탕을 두고 있다.[92] 더글라스는 ACT의 첫 번째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곧 리처드 프레블(노동당 코커스 시절 그의 오랜 동맹국)을 옹호했다.[91]
더글라스는 비록 순수한 경제 정책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는 당의 주장에 다소 불만을 품게 되었지만, ACT 정당의 강력한 지지자로 남아 있었다. 특히 더글러스 의원은 당내 포퓰리즘이라고 본 것을 비판하면서 일부 의원들이 정책 개발보다는 헤드라인을 잡는데 더 전념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2004년 4월 프레블이 은퇴 결정을 발표했을 때, 더글라스는 스티븐 프랭크스와 켄 셜리를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했다. – 리더쉽 경쟁의 다른 주요 경쟁자인 로드니 히데는 더글라스가 비난했던 스타일을 옹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93] 히데는 2011년 4월 사임할 때까지 지도부를 획득하고 ACT를 이끌었다.
2004년 12월 2일, 더글러스와 퀴글리 모두 ACT의 후원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당과 의견이 다를 수 있는 더 많은 자유를 원한다는 이유를 밝혔다.[94]
2008년 2월 21일, 더글라스는 2008년 ACT 컨퍼런스에 지지자들을 초대하는 서한에 서명하고, 2008년 총선을 위해 ACT를 지지하는 텔레비전과 신문 인터뷰에 출연함으로써 ACT에 다시 관여하게 되었다.[95] ACT의 2008년 오클랜드 연차총회에서 더글라스는 ACT 후보로서 다시 국회의원에 입후보할 의사를 밝혔다. 그가 새로 생긴 후누아 유권자에 출마하겠다는 발표는 2008년 6월 8일에 나왔다.[96][97] ACT는 더글라스에게 파티 리스트의 3번 자리를 할당했다.[98]
더글라스는 후누아에서 9.6%의 득표율만을 얻어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ACT 지도자인 로드니 히데가 Epsom의 의원으로 재선출되어 ACT가 MMP로 의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5%의 문턱 아래로 떨어진 정당은 적어도 한 명의 유권자가 당선되면 여전히 MMP 자격을 얻을 수 있다. ACT 의석의 3.65%는 더글러스 의회가 5석을 차지할 수 있게 되어, 더글라스 의원이 국회에 재입원할 수 있게 되었다.[99] ACT는 국민당에 자신감과 공급을 주었다. 존 키 총리 당선자는 앞서 더글라스 총리에게 내각직을 주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더글라스 총리 당선자는 이 입장에 대한 재검토를 희망한다는 뜻을 내비쳤다.[100]
더글라스는 정부 후원자로서 2010년 투표에서 세 명의 의원 법안을 뽑았다. 첫 번째, 16세, 17세 구분 최저임금을 재도입하는 최저임금(청년실업 완화) 개정안이 지난 2월 의원 투표에서 도출돼 첫 117대 5로 부결됐다.[101][102] 둘째 관세 법 1988년 Repeal 법안에 물건은 뉴질랜드로 수입된 모든 관세를 취소할 것, April,[103][104]에 있고, 첫 독서에서 패배되었다 116–5[105]세번째, 교육(위원회 신탁하는 자유의)개정 법안 것은 학교 교사들의 보수에 모든 주정부와 국가 통합 학교가 있다.sponsibility 거예요교육부가 아닌 이사회는 6월에 추첨되어 첫 번째 독해에서 111 대 10으로 패배했다.[106]
2011년 2월 18일, 더글라스는 제49회 뉴질랜드 의회 말기에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07] 9월 29일, 그는 국회에서 연설했다.[108]
정치 외 경력
1992년 초 더글라스는 세계은행이 조직한 민영화 자문위원회의 일환으로 러시아 경제 관련 연설을 했다.[109] 이후 1992년 더글라스는 오클랜드 럭비 리그에 의해 오클랜드 워리어스의 창단 이사회에 임명되었다.[110] 이후 1996년 교체되기 전 의장을 지냈다.[111]
더글라스는 전국정치에 불참하는 동안, 그가 잠시 전무이사로 재직했던 Bill과 같은 많은 저명한 회사들에서 고위직을 맡았다. 국제 컨설팅 회사인 로저 더글러스 어소시에이트의 상무이사를 겸직하기도 했다.[112]
명예 및 상
1977년 더글라스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은주빌리 훈장을 받았고, 1990년에는 뉴질랜드 1990년 기념 메달을 받았다.[5] 1991년 신년 영예에서, 그는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기사 총각으로 임명되었다.[113]
레거시
1997년 '학계, 지역사회 지도자, 예술가, 심지어 스포츠인 등 저명한 판사 4, 5명이 뽑은 '뉴질랜드에서 운영되는 최악의 초국가적 기업'의 연례상 설립자들은 더글러스(Douglas)의 이름을 따 '로저상'으로 명명했다.[114]
더글라스와 그의 정책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고 여전히 양극화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뉴질랜드 경제를 회복시킨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그의 반대자들은 로저노믹스가 무엇보다도 빈부 불평등을 크게 증가시킨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115]
이후 노동당 총리였던 헬렌 클라크는 로저노믹스를 "끔찍한 시기"라고 비난했고, 유산을 버림으로써 노동당을 다시 집권하게 했다.[116] 그러나 정치 분석가들은 그녀가 로저노믹스에 의해 만들어진 패러다임을 크게 바꾸지 않았다고 제안한다.[117] 대체로 1980년대 이후 정부들은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더글라스가 추진한 정책들을 유지하거나 강화했는데 여기에는 낮은 수준의 수입 보호, "경제가 가능한" 통화 및 재정 정책, 규제완화 금융시장, 제한된 보조금과 기타 경제 개입 등이 포함된다.[118]
참고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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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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