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 모스타르두브노 교구
Roman Catholic Diocese of Mostar-Duvno모스타르두브노 교구 디에케시스 만덴트리엔시스둘미니엔시스 모스타르스코두반즈스카비스쿠피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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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
나라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교회주의 주 | 브르흐보스나 대교구 |
좌표 | 43°20′20″n 17°47′52″E / 43.3389°N 17.79778°E좌표: 43°20′20″N 17°47′52″E / 43.33889°N 17.79778°E/ |
통계 | |
면적 | 8,368km2(3,231 sq mi) |
인구 - 총계 - 가톨릭(비회원 포함) | (2016년 기준) 454,505 197,656 (43.5%) |
파리시 | 66 |
정보 | |
디노미네이션 | 가톨릭의 |
수이루리스교회 | 라틴 교회 |
굿 | 로만 레트 |
확립된 | 1881년 7월 5일 |
성당 | 성모 마리아 대성당 |
수호성인 | 세인트조셉 |
세속 사제 | 67 |
현 리더십 | |
교황 | 프란시스 |
비숍 | 페타르 팔리치 |
비카 제너럴 | 젤코 마지치 |
사법부 | 니콜라 메날로 |
주교 명예 | 라트코 페리치 |
지도 | |
웹사이트 | |
md-tm.ba |
모스타르두브노 교구(라틴어: 디에체시스 만덴트리엔시스-둘미니엔시스)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특별한 교회다. 그것은 북부 헤르체고비나를 포함한다. 성공회 자리는 모스타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있다. 1881년 7월 5일 헤르체고비나의 사도교 재상교도가 교구로 승격되면서 결성되었다. 가톨릭 교구 수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큰 가톨릭 교구다.
모스타르두브노 교구 역시 591년에 처음 언급된 골동품 교구인 두브노 교구의 성공회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며, 7세기에 억압되었다가 14세기에 다시 세워졌다.
교구의 자리는 교회의 어머니인 마리아 대성당이다. 교구는 월간지 크크바나 카메뉴를 발매한다.
교구 면적은 8.368km²이고 교구 66개 교구에 175.395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다. 67명의 교구 사제들이 있다. 헤르체고비나의 프란시스칸주는 29개의 파리를 섬기고 있다.
현재 모스타르두브노의 주교는 페타르 팔리치이다. 또한 1890년부터 모스타르뒤브노의 주교들이 관리하고 있는 트레빈제-미르칸의 사도교 행정관을 겸하고 있다.
역사
로마 제국과 중세
로마 제국 시대, 현재의 모스타-두브노 교구의 영토에는 두브노와 나로나-사르텐테움이라는 두 개의 교구가 있었다.[1] 두브노 교구(Delminium)는 591년 교황 그레고리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다. 살로나의 베네티우스는 3세기에 두브노 교구의 영토에서 순교했다.[2]
두브노 교구는 7세기에 탄압받았으나 1337년 교황 베네딕토 12세에 의해 보스니아 왕국에 만연하여 크로아티아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던 보스니아 교회에 대한 방어책으로 다시 설립되었다.[1]
오스만 통치
1482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만족에 의해 정복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복 후에 도망치거나 나중에 이주했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은 파괴되었고 교회는 모스크로 변했다. 16세기에 헤르체고비나에서 마지막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소멸되었지만, 그들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활동적이었다. 17세기에는 서헤르체고비나의 주교들이 더 이상 인구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카르스카의 주교는 두브노 교구 등 서헤르체고비나에 대한 관할권을 확대하였다.[3]
1709년과 1722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선전선동까지 가톨릭 신자들이 그들 사이에 상주할 주교를 보내 달라는 청원이 두 차례 있었다.[4] 1722년 선전선동부는 스플릿과 자다르의 대주교와 마카르스카의 주교에게 조언을 구하며 관할권이 있는 뒤브노 주교의 자리를 돌려주려 했으나, 이들은 "뒤브노 주교는 교구와 식인적 연합"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했다.[5] 1722년 4월부터의 선전 회기에, 선전은 두브노 교구의 새로운 경계를 그릴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6]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카톨릭 신자들은 1723년, 1729년, 1734년에 계속해서 선전에 탄원서를 보냈다. 1734년 선전선동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두브노 교구의 가톨릭 신자의 지위를 묻는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빈의 수녀에게 오스만족을 탈출해 쟈코보에 거주하던 보스니아의 주교와 새 교구 설립에 대해 의논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선전선동은 1735년 6월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회기를 갖고 두브노 교구의 재정립에 관한 자다르 대주교의 제안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또한 오스트리아 황제가 보스니아에 사도교 대리인을 보내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준 수녀원으로부터 답변을 받았다. 마침내 선전선동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가톨릭 신자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자다르의 대주교에게 적당한 주교를 제안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4]
자다르 대주교는 스플릿 대주교와 마카르스카 주교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사도교 대리인의 관할권에 두브노 특별 주교 임명 없이 두브노 교구의 영토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7] 마침내 1735년 9월 25일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보스니아 사도교 교황의 설립을 승인했다.[8]
프란치스코 신자인 마테 델리비치 신임 사도교 비카르 주교는 마카르스카 주교의 방해로 1736~37년 보스니아 전역을 방문했지만 헤르체고비나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리하여 마카르스카의 주교와 (리브노 주변 영토의 일부를 지배한) 스플릿의 대주교 사이에 새로운 분쟁이 일어났고, 보스니아와 다른 한쪽의 사도교 대리자 사이에 새로운 분쟁이 일어났다. 마카르스카의 주교와 스플릿의 대주교는 프랑스인들을 대신하여 교구 성직자들을 파리에 임명하는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프란치스코 수도자인 파바오 드라기체비치 주교는 프란치스코인들에게 그의 승인 없이는 어떤 성직자에게도 교회의 어떤 기능도 허용하지 않을 것을 권고했다.[9]
마카르스카의 스테판 블라슈코비치 주교는 1759년 모스타르에 자리 잡은 또 다른 교구를 헤르체고비나의 영토를 포함하는 것을 포함하는 절충안을 선전에 제안했다. 그 제안은 선전선동에 의해 거부되었다.[10]
헤르체고비나의 사도교 대리교
헤르체고비나에 사도교 대리교도가 세워진 정확한 날짜를 나타내는 문서는 없다.[11] 헤르체고비니아 프랑시스칸은 주로 크레셰보 수도원 출신으로, 헤르체고비나를 목회자로 돌본 뒤 1840년 시로키 브리제그의 헤르체고비나에 그들만의 수도원을 세우기로 결정했다.[12] 이 시책의 리더는 니콜라 코르디치, 아네오 크랄제비치, 일리야 비도셰비치였다.[13] 당시 보스니아 라파엘 바리시치의 사도 비카르는 보스니아계 프랑시스인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헤르체고비니아계 프랑스인들은 헤르체고비나 알리 파샤 리즈반베고비치의 비지에르와 연락을 취했으며 오스만 술탄으로부터 보스니아 봉기 당시 충성을 인정받아 자신의 아이알레를 승인받았다. 프랑스인들은 사도교 대리인이 헤르체고비나에 온다면 그들만의 수도원을 더 빨리 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2]
체리가이흐의 대리자인 일리야 비도셰비치는 별도의 헤르체고비니아 사도교 대리교회를 설립하자는 생각에 대해 라파엘 주교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아이디어는 알리 파샤가 지지한 아이디어이기도 하다.[14] 1843년 라파엘 주교는 알바니아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체리가에 머물렀다. 일리자는 알리 파샤와 관계를 맺는 것을 도왔다.[15] 1844년, 교회 당국은 프랑스인들에게 시로키 브리예그에 수도원을 짓도록 허용했고, 그래서 헤르체고비니아 프랑시스칸인들은 새로운 수도원을 짓기 위해 이전의 수도원을 떠났다.[14] 1845년 라파엘 주교는 선전선동부에 편지를 보내 헤르체고비나로 이주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그곳에서 테르빈제-Mrkan 교구를 섬길 것이며 그곳의 가톨릭과 이슬람교도들은 모두 그를 사랑하고 비지어를 포함한 그를 원한다고 말했다.[16]
특별 대리점 설립에 대한 그들의 주된 주장은 헤르체고비나의 파리와 신실한 가톨릭 신자들의 숫자였다. 1818~19년 아우구스틴 밀레티치 주교의 보고에 따르면 헤르체고비나는 8개의 파리와 3100개의 가톨릭 가문을 가졌으며, 총 20.223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 10년 뒤 같은 주교가 보고한 가톨릭 신자는 51.744명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체 가톨릭 신자의 3분의 1이었다.[17]
1845년 10월 29일, 라파엘 주교는 보스니아에서 사도교 비카르로서의 직책을 포기할 것이라고 선전부에 알렸다. 로마와 이스탄불은 라파엘 주교의 자리에 대한 협상에 들어갔고, 둘 다 그의 헤르체고비나로의 이적에 대해 고분고분했다.[16] 교회의 협상가는 몬스였다. 안돈 베드로스 9세 [18]하순 선전선동부 장관은 1846년 3월 13일 라파엘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협상의 성공을 알리고 보스니아 사도교 비카르의 집무실에서 "가능한 한 빨리" 사임하라고 요구했는데,[16] 그는 그렇게 했다.[18]
1846년 4월 29일, 선전선동대는 라파엘 주교에게 술탄의 승인 페르맨을 받은 즉시 헤르체고비나로 이동하라고 알렸다. 같은 날 무렵, 이스탄불에서 당시 라파엘 주교는 페르만과 알리 파샤의 승인서 두 통을 받았다. 라파엘 주교는 종교의 자유 보장 등 여러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1846년 5월 26일 선전에 승인 사실을 알렸다. 이틀 후 이스탄불에서 트리에스테로 떠나 1846년 6월 18일 헤르체고비나에 도착했다. 주교는 모스타르 근교의 부코돌에 거처를 짓고 있었고, 주교는 우판작(Dubno, 현재의 토미슬라브그라드) 부근의 선리카에 거처를 마련하여 그의 큐리아를 세웠다.[19] 부코돌에 있는 기존 토지 소포가 거주하기에 너무 작았기 때문에 알리 파샤는 이슬람 현지인으로부터 개인 소유의 토지를 사들여 비카리아테에게 허가했는데, 이슬람 현지인들의 강한 반대가 있었다. 알리 파샤는 또한 공사 기간 동안 보호를 제공했다.[20] 공사는 1851년 초에 완료되었고, 라파엘 주교는 1851년 6월에 그곳으로 이전하였다.[21]
주교가 모스타르에 이주한 후 지역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번성했다. 모스타르 주변의 이웃 언덕에서 온 가톨릭 신자들은 도시로 돌아와 도시의 대중, 문화, 정치 생활에 관여하게 되었다.[21]
1864년 12월 7일,[22] 라파엘 주교는 Fr에 의해 계승되었다. 아네오 크랄예비치, 또한 프란시스칸 헤르체고비나 양육권의 커스토스.[23] 1865년 3월 25일 자다르에서 주교로 봉헌되었고, 1865년 6월 13일 사도교 대리인으로 설치되었다.[22] 아네오 주교는 1840년대에 헤르체고비나에 사도교적 비카리아트를 설립하기 위한 이니셔티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13]
아네오 주교는 아네오 주교가 시작한 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1866년 3월 7일 그는 주교가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게 성결하면서 마침내 세워진 교회의 초석을 축복했다. 그리하여 대신의 자리는 부코돌에서 새 교회로 옮겨졌다. 이듬해인 1873년, 그 옆에 교구 거주지가 세워졌다.[24]
안제오 주교는 헤르체고비나의 모든 파리를 통제하는 프랑시스칸 때문에 헤르체고비나의 프란시스칸 관리청과 갈등을 겪게 되었고, 안제오 주교는 비록 프란시스칸인 자신이 교구 성직자를 마음대로 두기를 원했다.[25] 1878년, 그는 프란치스코 보관소장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에 교구 성직자의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비엔나에 있는 수녀원장에게 편지를 썼고, 사도직 대리자는 자신의 결정을 확인하는 인물에 불과했다. 그는 또 교황청과 함께 로비를 해 교구를 설립해 교구 성직자가 통제할 새 교구를 찾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나머지 교구들은 프랑스인들이 보관하고 있다.[26]
헤르체고비나의 프랑시스칸들은 안데오 주교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가 후맥에 수도원을 짓기 위해 모은 액수의 액수를 그들에게 충분히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27]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 익명의 편지가 보내졌는데, 주교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오스만인들에게 보낸 기부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투르크포파일이라고 비난했다. 프란시스칸 교도소는 이 편지에 대해 금지했다.[28] 1877년 2월, 아네오 주교는 선전선동부에게 헤르체고비나에 사도 방문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후맥 수도원의 당시 수호자인 파스칼 부콘지치가 파슈칼 부콘지치를 파리에 대한 태만과 헤르체고비니아 프랑시스칸인들이 부활절 성찬식 기간 동안 신자들로부터 강제로 유지비를 받아냈다고 비난했다.[29] 교회는 카시미르 포를라니 주교를 사도 방문자로 지목했고, 그는 이듬해 2월 모스타르에 도착했다. 포를라니는 1878년 5월 보고서를 완성하고, 비숍에게 프랑시스인들과 합의하여 행동하고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도록 조언했으며, 휴맥에 수도원 건립을 도울 것을 권고했다.[30] 그 파리의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31]
1879년 7월 27일 아네오 크랄제비치 주교는 콘지크에서 성탄 방문 중 사망했다.[32] 헤르체고비니아 프랑시스칸이 그의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Fr이었다. 파슈칼 부콘지치.[33]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fr을 위해 로비를 벌였다. 보스니아의 사도교 대리자인 파슈칼 비치치 주교의 추천으로 파슈칼은 아네오 주교의 뒤를 이을 것이다.[34] 교황 레오 13세는 그의 지명을 승인하고 1880년 1월 30일 두 개의 칙령을 발표했는데, 그 중 하나는 그가 Fr을 임명했다. 파스칼은 사도교 대리인과 다른 한 사람은 마기두스의 십일조 주교로 임명되었다.[35]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의 연결성을 높이기 위해 Fr.[36] 파스칼은 1880년 3월 19일 자그레브 대주교 조시프 미할로비치 추기경에 의해 자그레브에서 주교로 봉헌되었고, 그 후 파스칼 주교는 빈의 황제, 로마의 교황을 방문했다. 그는 1880년 4월 25일에 마침내 사도교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37] 그의 성공회 모토는 "신앙과 조국을 위한 모든 것"[38]이었다.
일부 이웃 주교들이 아닌 자그레브에서 성직하기로 한 그의 선택은 헤르체고비나가 보스니아 프랑시스칸의 지배를 없앨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는 쟈코보 요시프 주라즈 스트로스마이어 주교의 도움으로 그것을 통제하려 했다.[39] 파스칼 주교는 그의 경력에 꾸준히 힘썼다.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점령으로 부콘지치가 정규 교회 서열체계의 재도입과 함께 주거주교로 거듭날 가능성은 보스니아 주교 파스칼 비이치치의 사도교적 비카르와는 달리 뚜렷해졌다.[36]
1880년 3월, 미할로비치 추기경과 파스칼 주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있는 교회의 조직을 논의하였다. 1880년 봄 비엔나에 있는 동안 파스칼 주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도메니코 자코비니 추기경에게 사도 Nuncio를 만났고, 이후 조셉 미할로비치 추기경에게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교회의 조직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두 사람 모두 파스칼 주교에게 감명을 받았다.[39]
파슈칼 부콘지치 주교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고, 1881년 6월 8일 오스트리아-헝가리-헝가리-성시간 협약에 서명함으로써 성공회 후보 지명을 위한 근거가 마련되었다.[40] 협약에 따르면, 황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주교 임명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다.[41] 1881년 7월 5일부터 교황 레오 13세가 사도 황소 엑하 아우구스타와 함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정기적인 교회 서열을 회복했다.[42] Pope established the Archdiocese of Vrhbosna with the seat in Sarajevo and subordinated to it three other dioceses: the newly established Diocese of Banja Luka, the already existing Diocese of Trebinje-Mrkan (under the apostolic administration from the bishop of Dubrovnik at the time) and the Diocese of Mostar-Duvno, to which he added the title of 두브노의 주교도 마찬가지야 모스타르-두브노 교구는 헤르체고비나의 사도교인 비카리테의 영토를 아우르고, 따라서 폐지되었다.[43] 설립 당시 모스타르두브노 교구에는 13만 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44]
이전의 친오스트리아적 입장 때문에, 재무부 장관은 1881년 10월 9일 파스칼 주교를 황제에게 모스타-뒤브노의 거주 주교 자리에 지명했고, 황제에게는 파스칼 주교를 새 거주 주교로 임명했다. 황제의 임명은 공식 확인을 위해 로마로 보내졌고 교황 레오 13세는 1881년 11월 18일 파스칼 주교를 주거주교로 선포함과 동시에 마기두스의 주교 칭호를 해결했다.[41]
주교로서 부콘지치는 자신의 교구보다 프랜시스칸 양육권을 더 좋아했다. 부콘지치는 교구 성직자들의 교육을 위해 세미나를 여는 대신 두 개의 프란치스코 신학원을 설립하는 것을 도왔는데 하나는 트라브니크에 체육관으로, 다른 하나는 사라예보에 신학교로 1893년에 개교하였다. 그의 성공회 기간 동안 서품을 받은 교구 성직자는 단 5명뿐이며, 70명이 넘는 프랑스인이 서품을 받았다.[45]
그는 또한 교구 재산의 일부를 보호국에 양도했다.[45] 그는 1889년 3월 19일 모스타르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초석을 봉헌했다. 수도원은 옛 교구 주택의 위치 위에 세워졌는데, 성당인 현 성 베드로와 바울의 교회도 위치해 있었다. 부콘지치는 그 교회를 수도원 교회로 만들기로 동의했고, 반면에 새로운 성당 교회는 제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세워져야 했다. 그는 1885년 5월 14일 신앙전파를 위한 성스러운 회중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부콘지치는 모스타르의 론도 쿼터(현재의 크로아티아 로지 '헤르체그 스테판 코사차'가 위치한 곳)에 있는 새 성당을 위해 그 땅을 샀다.[38] 새 성당이 세워져야 할 재산은 나중에 부콘지치가 병상에 누워 있을 당시 부채로 인해 헤르체고비나의 프란시스칸 보관소의 이익을 위해 담보로 잡혔다.[46]
부콘지치는 1899년 모스타르의 프란치스코 수녀들을 데려와 류부슈스키에 있는 마녀들에게 집과 마당을 허락했다. 부콘지치는 1905년부터 1909년까지 모스타르의 글라비카에 성공회 저택을 짓고 1909년 3월 24일에 입주했다. 그의 30년간의 성공회 기간 동안 모스타-두브노 교구의 5개 교구 사제들이 서품을 받았는데, 사제 서품을 받은 74명의 프랑시스 사람들에 비해, 이 교구 사제들은 서품을 받았다.[38]
부콘지치의 성공회 교구 시절 주요 쟁점은 교구 성직자들과 프랑스인들 사이의 파리의 분할이었는데, 이들은 로마와 함께 헤르체고비나에서의 지배력을 확인하려 했다. 교황의 황소 엑하 아우구스타가 선교 활동에서 프랑수아인들이 누렸던 모든 특권을 종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모든 파리를 교구에 보존하고 싶어했다.[47] 프랑스인들은 부콘지치 자신이 프란치스코인이었으므로 파리의 소유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스토스 마리잔 조브코는 1881년 12월 헤르체고비나의 파리에 대해 훈장에게 편지를 썼다. 장군은 그에게 1882년 2월에 조브코가 그 파리의 소유권에 대해 물어봤고, 그 파리의 소유권은 프랑스인들이 그 파리를 세우고 지배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파리를 후원했다. 조브코는 1882년 12월 헤르체고비나에 있는 파리의 상황을 다시 장군에게 물었고, 장군은 부콘지치가 프란시스칸 양육권을 사랑하기 때문에 헤르체고비니아 프랑시스칸인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부콘지치는 프랑스인으로부터 파리를 빼앗지 않고, 새로 세운 파리를 교구용으로 그대로 두겠다고 장군에게 확언했다.[48]
1883년 5월 선출된 신임 커스토스 루카 베기치는 새로 설립된 파리지들만이 교구의 통제를 받게 되더라도 프랑시스칸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하게 되었고, 그 파리지들조차도 프란시스칸 보관소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콘지치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부콘지치는 그의 우려에 응했고, 새로 설립된 파출소라도 보호관찰소에 속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베기치는 1883년 7월 장군에 합의 사실을 알렸으며, 아무런 회답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부콘지치가 로마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던 1885년 3월에 다시 편지를 써서 문제를 해결했다. 안드레아 루포리 장군의 부관은 1885년 5월 부콘지치가 자신과 보호관찰관이 서명한 파리에 관한 계약서를 가지고 오도록 요청하면서 대답했다.[49]
보관소는 베기치가 네레트바 강 서쪽의 파리는 프랑시스칸이 보관하고 동쪽 둑의 파리는 주교가 처분하라는 지시를 받아 로마의 부콘지치를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베기치는 "가능한 한" 굴복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부콘지치와 베기치는 1885년 5월 12일 로마에 도착했다. 베기치의 요청은 1885년 6월 선전선동부에 의해 접수되었고,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국가 비밀경호국에 알렸다. 루이지 자코비니 국무장관은 빈의 세라피노 반누텔리 누니치 추기경에게 프랑스인들이 보관해야 할 파리와 그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파리에 대해 부콘지치에게 물어봐 달라고 요청했다. 바누텔리는 1885년 12월 부콘지치에게 베기치의 제안에 동의하는지, 프랑시스칸이 어떤 파리를 보존해야 하는지, 어느 파리를 마음대로 써야 하는지 물었다. 1886년 1월 부콘지치는 바누텔리에게 편지를 써서 프랑시스칸으로부터 파리를 빼앗지 않겠다고 알렸다.[50]
부콘지치의 답변을 받은 바누텔리는 자코비니에게 프랑시스칸과 부콘지치의 합의는 확정되어서는 안 되며, 파리는 헤르체고비나에서와 같은 상황이었던 보스니아처럼 분단해야 한다고 알렸다. 그는 적어도 파리의 3분의 1은 주교의 처분 아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부콘지치가 프란치스코인이었기 때문에 반누텔리는 새로운 해결책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주교와 승려들의 조화가 있기 때문에 로마는 어떠한 새로운 규율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코비니는 바누텔리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로마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1888년 3월 루조 라도쉬 목사는 아무 성과 없이 특별교회를 촉구했다.[51]
루포리는 니콜라 시모비치 프리아르에게 이 문제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입장을 빈에 있는 낭시오에게 설명하고 그들의 제안에 대한 확인을 받으라고 조언했다. 1889년 10월 말에 그는 낭시오를 방문했는데, 낭시오는 그에게 프랑시스칸의 이익을 위해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모스타르로 돌아온 시모비치는 다시 낭시오에게 편지를 써서 1888년부터의 라도시의 제안을 상기시켰다. 넌시오는 1889년 12월 이런 제안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몇 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52]
1892년, 헤르체고비나의 프란치스코 보관소가 지방으로 승격되었다.[53] 1898년 베기치가 도에 당선된 후, 그는 불안정한 현상을 유지하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떤 거래라도 중개하려 했다. 부콘지치는 1899년 부활절 이후 로마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베기치는 마침내 파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커스터스 라파엘 라도시는 로마의 부콘지치에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1899년 3월에 사망하여 베기치는 4월에 헤르체고비나에 있는 프란치스코 지방을 대표하기 위해 서신했다. 부콘지치는 베기치와 이 문제를 논의했고, 두 사람 모두 모스타르두브노 교구에 강한 프란치스코인의 존재를 보존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부콘지치는 25개의 파시는 프랑시스칸에 속해야 하며, 12개의 파시는 주교의 마음대로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또한 부콘지치는 주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12개의 파시를 추가로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54]
마침내 1899년 7월 17일 교황 레오 13세는 데키시아를 확정했는데, 데키시아는 14개의 파리가 교구 성직자에게 지정되었고, 다른 파리는 프랑수아에게 맡겨졌다. 부콘지치는 교황의 결정을 최대한 연기했다. 그는 1908년에야 데키시아를 출판했다.[55] 프랑시스칸과 부콘지치는 그런 결정에 만족하지 못했다.[56] 이 간행물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우리는 교구의 사제들, 특히 어린 교구의 사제들 앞에서 교구들이 세운 교구들과 관련된 근엄한 데키시아의 사본들을 발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 데시시아는 소원의 반대나 변화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견고하고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38] 그는 교구 사제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교황에게 프랑시스칸에게 특정 교구를 믿을 수 있는 허가를 요청했다.[57]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데히사는 확고하지도 않고 일정하지도 않았고, '소망의 반대와 변화성'도 피하지 못했다. 파리의 분단에 대한 부콘지치 주교의 의지는 존중되지 않았다.[38]
참고 항목
메모들
- ^ a b 마지치, 페이지 14.
- ^ 마지치, 페이지 15.
- ^ 니키치 1979쪽 22-23쪽 26-27쪽
- ^ a b 니키치 1979, 페이지 24.
- ^ 니키치 1979쪽 23-24쪽
- ^ 니키치 1979, 페이지 23.
- ^ 니키치 1979, 페이지 25.
- ^ 니키치 1979, 페이지 26.
- ^ 니키치 1979, 페이지 27.
- ^ 니키치 1979, 페이지 30.
- ^ 니키치 1979, 페이지 31.
- ^ a b 니키치 1979쪽 31-32쪽
- ^ a b 니키치 1979, 페이지 43.
- ^ a b 니키치 1979쪽 32~33쪽
- ^ 니키치 1979쪽 43-44쪽
- ^ a b c 니키치 1979, 페이지 44.
- ^ 니키치 1979쪽 32쪽
- ^ a b 니키치 1979, 페이지 45.
- ^ 니키치 1979쪽 45-46쪽
- ^ 니키치 1979쪽 47-48쪽
- ^ a b 니키치 1979, 페이지 49.
- ^ a b 페리치 2002, 페이지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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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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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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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위키소스는 1913년 카톨릭 백과사전 기사 모스타르와 마르카나-트레빈제의 내용을 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