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이세 조약
Treaty of Falaise팔라이즈 조약은 1174년 12월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 1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 사이에 체결된 강제 서면 협정이다.
1173-1174년의 반란 동안 윌리엄은 반란군에 가담했고 노섬브리아 침공 중 알네윅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헨리가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동맹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기소하는 동안 그는 노르망디의 팔라이즈로 이송되었다.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이, 윌리엄은 조약에 동의했고 따라서 영국의 스코틀랜드 지배에 동의했다. 처음으로 스코틀랜드 왕과 영국 왕의 관계를 글로 정하기로 했다.[1] 이 조약의 조항은 스코틀랜드 왕, 귀족, 성직자, 그들의 상속인, 사법 절차, 그리고 록스버그, 베르윅, 제드버그, 에든버러, 스털링의 성을 영국 군인들에게 양도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전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최고였던, 이제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궁극적인 권위자였다.
이후 15년 동안 윌리엄은 헨리의 오버로드쉽을 관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지역 봉기를 진압하기 전에 영국 왕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2] 윌리엄에 대한 굴욕은 스코틀랜드에서 그에게 가정적인 문제를 야기시켰고, 헨리의 권위는 윌리엄의 신부를 뽑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이 조약은 1189년 헨리의 후계자인 리처드 1세가 제3차 십자군에 가담하는 데 대한 관심과 윌리엄의 1만 마르크 스털링 제의로 정신이 팔리면서 파기됐다. 아버지보다 윌리엄에게 더 많은 것을 미리 밝힌 리차드는 1189년 12월 5일 '캔터베리의 기권'으로 알려진 새로운 헌장을 작성했는데, 이 헌장은 팔라이즈 조약 전체를 무효화했다.[3] 이 새로운 서면 합의는 헨리가 요구한 직접적 정복보다는 스코틀랜드 왕과 영국 왕들 사이의 충성심과 경의를 표하는 이전의 모호하고 잘못된 개인 전통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스코틀랜드의 주권을 회복시켰다.
배경
노섬브리아 질문
윌리엄이 어떻게 알닉에서 붙잡히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노섬브리아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윌리엄의 불만의 씨앗은 1157년 7월, 헨리 2세가 1139년 할아버지 데이비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위해 확보한 일정한 땅과 직함을 1139년 영국의 스티븐으로부터 박탈하면서 뿌려졌다.[4]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남부의 불분명한 경계선은 12세기 스코틀랜드 왕과 영국 왕들의 상대적 힘과 관계에 따라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헨리 2세의 어머니인 스테판과 마틸다 황후의 후계 위기인 무정부 시절 영국 시민 불안을 틈타 데이빗은 황후의 영국 왕위 주장을 대신해 영국 북부를 침공했다.[3] 1127년 그가 조카 마틸다에게 헨리 1세의 후계자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이것은 데이빗이 노섬브리아와 컴벌랜드가 죽은 아내를 통해 그의 권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의 침략에 대한 원칙적인 구실에 해당했을지도 모른다.[4] 1139년 제2차 더럼 조약을 통해, 그는 말콤과 윌리엄의 아버지인 헨리에게 노섬브리아의 얼덤을 포함한 국경지대를 스티븐 스코틀랜드로부터 장악했다.[4] 스코틀랜드의 경우, 노섬브리아, 컴벌랜드, 그리고 데이비드가 획득한 다른 국경지대는 이제 세습으로 간주되었고,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밤버그와 뉴캐슬이라는 노섬브리아에 있는 두 성에 대한 영어 통제를 유지함으로써 스티븐은 노섬브리아 문제를 향후 분쟁의 테이블에 올릴 수 있었다.
A King, Spurned.
윌리엄은 1164년 스코틀랜드 왕좌를 차지했고, 거의 즉시 노섬브리아의 얼돔을 되찾기 시작했는데, 그는 여전히 그의 정당한 유산이라고 여겼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책략을 본받아 윌리엄은 1166년 노섬브리아와 컴벌랜드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압박함으로써 헨리의 분열된 관심을 이용하려 했다. 노르망디에서의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헨리와 합류한 윌리엄은 아마도 선의의 표시로 군사작전에 참여했지만 결국 빈손으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4] 이 무렵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기사 중 한 명이 윌리엄을 호의적으로 대했을 때 헨리가 화를 냈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두 왕 사이의 악화되는 개인적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추가 증거는 윌리엄이 1168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새로운 전쟁 속에서 루이 7세에게 사절을 보냈다는 것을 가리키지만, 헨리와 루이 사이에 평화 협상이 시작되자 이에 대한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다. 몇 년 후, 윌리엄은 1170년 4월 윈저에서 헨리와 만났을 때 다시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헌팅돈의 백작으로서 그는 현재 왕 지명자로 왕위에 오른 영 헨리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4]
반란을 일으킨 윌리엄
헨리의 아들 세 명인 영 헨리, 리처드, 제프리, 그의 아내인 아키타인의 엘리노르 여왕, 그리고 다양한 귀족들과 귀족들과 귀족들,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7세의 도움을 받아 1173년에 그들의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윌리엄은 노섬브리아를 되찾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보았다. 그는 영 헨리의 제안과 루이스로부터 "윌리엄은 한때 그의 조상들이 소유했던 땅, 즉 타이네나 노섬벌랜드 북쪽 땅과 웨스트모어랜드와 컴벌랜드의 군을 소유해야 한다"[5]고 약속하는 서한을 받았다. 어느 쪽에 합류할 지 확신하지 못한 그는 노르망디의 헨리에게 1000명의 기사들과 3만 명의 병사들을 제공했고, 그 답례로 "그만큼 좋은 권리를 가진 사람이 없는 노섬버랜드의 합법적인 것, 즉 첫째로"라고 말했다.[5] 헨리에 의해 다시 거절당한 윌리엄은 반군과 협력하고 영국 북부를 침공한다.
1174년 7월 13일, 노섬브리아에서 산발적으로 일련의 습격을 지휘하던 중, 윌리엄은 기사들의 작은 레티뉴만 남기고 자신을 떠나 알네윅에서 헨리의 충신들의 힘에 놀랐다. 가까운 거리에서 진격하는 영국인들을 확인한 윌리엄은 말에 올라타서 '이제 누가 좋은 기사의 역할을 할지 두고 보자!'[5]라고 외쳤다. 그는 자신의 말이 자기 밑에서 살해될 때까지 적을 뚫고 나아갔으며, 덫에 걸려 강제로 라눌프 드 글란빌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윌리엄은 헨리로부터 그의 운명을 기다리기 위해 뉴캐슬과 리치몬드로 끌려갔다. 7월 26일, 북쪽 전선에 대한 주요 위협이 진압되자, 헨리는 윌리엄을 노샘프턴에 데려와 "말의 배 밑에 발을 묶은 채" 동료 왕을 대접하는 특히 모욕적인 방법이었다.[6] 윌리엄에게 있어서 이러한 수치심의 여행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결국 노르망디의 팔라이즈에 있는 성으로 끌려온 윌리엄은 반란의 지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결론을 기다렸다. 윌리엄이 팔라이즈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합의문이 작성되었으나 1174년 12월 8일 발로인즈에서 발행되었다.[7] 합의서에 따라 헨리는 1175년 8월 10일 요크에서 열린 공개 기념식을 주선했는데, 그곳에서 윌리엄은 그의 형제자매인 데이비드, 그리고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숙주 앞에서 문서를 봉인했고, 조약은 모두가 목격할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낭독되었다.[7]
팔라이세 조약, 1174년
조약문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이 황후 모드의 아들인 헨리 왕과 맺은 협약은 다음과 같다.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은 스코틀랜드와 그의 다른 모든 영토에 대한 모든 남자에 대해 영주왕(헨리)의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영주왕(헨리)의 다른 모든 남자들이 하지 않을 것처럼, 그의 영주로서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헨리 왕의 아들인 헨리 왕에게 경의를 표하며, 오직 그의 아버지인 영주 왕에게 빚진 충성만을 구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왕과 그 후계자들의 모든 주교와 부주교와 부주교와 성직자들은 그들의 영주(헨리)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주왕의 다른 주교들이 하지 않을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왕 헨리,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왕과 그의 형인 다윗과 그의 변두리와 다른 부하들은 스코틀랜드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대로 영국 교회에 복종할 것을 영주왕(헨리)에게 허락했고, 영주 혈족인 영국의 왕들이었던 시대에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리차드, 성 주교. 앤드류스, 그리고 던켈드의 주교 리처드, 그리고 콜드햄튼 이전의 던펠드라인 교주교 제프리, 그리고 허버트는 영국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대로 스코틀랜드에서 그러한 권리를 가져야 하며, 그들 스스로가 영국교회의 어떤 권리에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허가했다. 그리고 그들은 영주 왕과 그의 아들 헨리에게 충성을 다함으로써 이러한 인정을 존중하기로 맹세했다.
마찬가지로 다른 스코틀랜드 주교와 성직자들도 영주 왕(헨리)과 스코틀랜드 왕, 그리고 그의 형 다윗과 그의 귀족들 사이에 맺어진 조약에 의해 그렇게 해야 한다.
또한 백작과 창살과 그 밖의 사람들이, 헨리가 택한 대로, 스코틀랜드 왕으로부터 땅을 차지하며, 모든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의 다른 신하들이 하지 않을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왕으로서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왕 헨리,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똑같이 행할 것이며, 오직 그들이 주 왕인 그의 아버지에게 빚진 충성만을 구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스코틀랜드 왕과 그의 변두리 왕과 그의 부하들, 그리고 그의 부하들도, 다른 모든 남자들을 상대로, 주 왕(헨리)의 후계자들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왕과 그의 부하들은 중죄로 추방된 영주왕(헨리 왕)의 궁정에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그의 재판소의 판결에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는 한, 스코틀랜드나 그의 다른 어떤 땅에서도, 어떤 망명도 받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스코틀랜드 왕과 그의 부하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런 사람을 데리고 영주 왕(헨리)이나 그의 정의로운 신하나 영국의 보석관들에게로 데려갈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스코틀랜드 왕의 땅에서 흉악범으로 추방된 도망자가 영국에 온다면, 그는 스코틀랜드 왕의 궁정에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그의 궁정의 판결에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는 한, 영주왕(헨리)의 땅에서 받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어디에서든지 주왕(헨리)의 보석상들에 의해 스코틀랜드 왕에게 인도될 것이다.
또한, 주 왕(헨리)의 사람들은, 그들이 소유했던 땅과, 그들이 소유해야 할 땅을, 주 왕(헨리)과 스코틀랜드 왕과 그 부하들로부터 계속 보유해야 한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왕들의 사람들은, 그들이 소유했던 땅과, 그들이 소유해야 할 땅을, 영주 왕(헨리)과 그의 부하들로부터 계속 소유하게 될 것이다.
영주왕(헨리)과 왕 헨리, 그의 아들, 그리고 그들의 상속인들과의 조약과 협약이 스코틀랜드 왕과 그의 상속인들에 의해 충실히 지켜질 수 있도록 스코틀랜드 왕은 영주왕(헨리)에게 록스버그 성, 베르윅 성, 제드버그 성, 에든버러 성, 그리고 캐슬에게 성전을 전달했다.스털링의 e는 주 왕(헨리)이 마음대로 붙들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왕은 영주 왕(헨리)의 쾌락에 따라 자신의 수입으로 이 성들의 수비대를 지불할 것이다.
Further, in pledge of the aforesaid treaty and pact, the king of Scots has delivered to the lord king (Henry) his brother, David, as a hostage, and also the following: Earl Duncan, Earl Waldewin, Earl Gilbert, the earl of Angus, Richard of Morville the constable, Niz son of William, Richard Comyn, Walter Corbet, Walter Olyfard, John de Vals, Lindsay의 윌리엄, Philliam de Coleville, Valoguees의 필립, Robert Frembert, Robert de Burneville, Hugh Giffard, Hugh Rydal, Walter Verkele, William de la Haye, William de Mortemer.
성들이 넘겨지면,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과 그의 동생 다윗이 풀려날 것이다. 그리고 (성들이 넘겨진 후와 마찬가지로) 상술한 귓불과 빗장을 풀어주되, 오직 각자가 자신의 인질을, 재치를, 그가 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합법적인 아들을, 그 밖에 그의 조카나 가장 가까운 후계자가 있는 경우에만 풀어주어야 한다.
또한, 스코틀랜드 왕과 그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선의와 악의가 없고 변명의 여지 없이, 주교들과 귀족들과, 스코틀랜드 왕이 왕(헨리)과 계약을 맺을 때 참석하지 않았던, 그들의 땅의 다른 신하들과, 그의 아들인 헨리 왕과, 그들이 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보증하였다.그는 그들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충성과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이 협정에 참석하지 않은 병거와 부하들은 주왕(헨리)이 결정할 그런 인질들을 넘겨주어야 한다.
또한, 앞에서 말한 주교, 귓바퀴, 빗자루들은 영주왕(헨리)과 계약을 맺었으며, 스코틀랜드 왕인 헨리왕(헨리)과 그의 아들에 대한 의무를 태만히 함으로써, 상기의 합의를 파기하고, 상기의 주교, 귓바퀴, 빗자루 등이 홀로서기를 하게 된다.d는 영주(헨리)에게, 그들의 영주에게, 스코틀랜드 왕에게, 그리고 영주왕(헨리)에게 적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항한다. 그리고 주교들은 스코틀랜드 왕이 충성을 다하여 영주왕(헨리)에게 돌아올 때까지 스코틀랜드 왕의 땅을 임관해야 한다.
스코트 왕과 다윗 왕과 그의 아들, 그리고 앞서 말한 모든 귀족들이, 영주 왕(헨리)과 헨리 왕(왕, 그의 아버지에 대한 충성만을 구함)의 충신으로서, 상술한 조약이 아무런 악의가 없이 그들에게 엄격히 지켜질 것을 전적으로 맹세하였다.
그리고 다음은 목격자들이다. Richard, bishop of Avranches; John, dean of Salisbury; Robert, abbot of Malmesbury; Ralph, abbot of Montebourg; Herbert, archdeacon of Northampton; Walter of Coutances; Roger, the king’s chaplain; Osbert, clerk of the chamber; Richard, son of the lord king, and count of Poitou; Geoffrey, son of the lord king, and count of Brittany; William, earl of Essex; Hugh, earl of Chester; Ricard of Le Hommet, the constable; the count of Meulan; Jordan Tesson; Humphrey “de Bohun”; William of Courcy, the seneschal; William, son of Aldhelm, the seneschal; Alfred of Saint-Martin, the seneschal; Gilbert Malet, the seneschal.
팔라이즈에서.[8]
조약의 조항 분석
이 조약은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기록되고 공개적으로 선언된 조항으로 스코틀랜드의 왕이 영국 왕에게 복종하도록 규정했다.[7] 그것의 조항은 스코틀랜드 왕, 귀족, 성직자와 그들의 모든 상속인, 사법 절차, 성의 상실 등에 영향을 미쳤다. 간단히 말해서 이전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최고였던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궁극적인 권위자였다.
첫 번째 단서에는 "스코트의 왕 윌리엄은 스코틀랜드와 그의 다른 모든 땅에 대한 모든 남자에 대해 영주왕(헨리왕)의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영주왕(헨리)의 다른 모든 남자들이 하지 않을 것처럼, 영주왕(헨리왕)의 거짓말쟁이가 되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스코틀랜드 왕은 이제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의무를 명백히 지고 있는데, 이것은 이전에 존재했던 이전의 개인적인 충성 전통과는 현저한 변화다. 윌리엄이 이전에 헨리에게 경의를 표했을 때, 그는 스코틀랜드의 왕이 아닌 헌팅돈 백작으로서, 마찬가지로 말콤과 데이비드와 이전의 왕들이 그들의 영어 보유에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그렇게 했다.[4] 스코틀랜드 왕과 영국의 왕들 사이의 충성의 춤은 역사적으로 외교적, 개인적 이유로 목적상 모호했다. 과거의 스코틀랜드 왕들은 확실히 영국 통치자들의 '그 남자'라고 불렸으나, 이 관계는 분명하지 않고 모호했다.[9] 이제 헨리는 윌리엄을 넘어 확장된 불확실한 용어로 영국의 지배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그들의 왕과 마찬가지로, 이제 헨리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주교, 약탈자, 그리고 성직자들처럼 "모든 사람에게 반대한다"는 충성을 빚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충성심이 윌리엄보다 헨리에 대한 충성심이 더 크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가 스코틀랜드 왕과 그의 백성들 사이의 전례 없는 직접 개입인 헨리를 대신해서 그들이 개입해야 하는 합의에서 "뒤집고"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7] 충성심 때문에 성직자들 외에도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제 영국 교회의 대상이 되었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요크 지배권의 대주교를 봉안하려는 공격적 움직임, 그리고 잉글랜드의 왕이 위임할 권한이 부족했던 움직임도 있었다.[4]
추가 처벌로, 록스버그, 베르윅, 제드버그, 에든버러, 스털링 등 5개 성도 헨리에게 넘겨져 스코틀랜드의 비용으로 영국군에 의해 유인되었다. 또 다른 조항은 영국이 스코틀랜드의 도망자를 상대할 수 있는 각각의 책임을 명시하고 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인 흉악범들을 넘겨야 했다. 스코틀랜드의 복종심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출석하지 않은 귀족과 주교들은 같은 존경을 표해야 할 것이며, 그들의 상속자나 가까운 친척으로 구성된 인질들이 전복되었다.
윌리엄이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협상을 벌이거나, 오히려 그에게 명령을 받은, 공개적인 복종 행위는 성 교회에서 일어났다. 피터는 요크에 있어 영국 왕국의 우두머리들 앞이야 자신의 귀족들, 성직자, 기사들, 자유당원들 앞에서 윌리엄과 그의 형제는 그 문서를 봉인했고 그것이 모두에게 소리내어 읽히는 추가적인 당혹감을 겪어야 했다.[10] 굴욕의 규모를 더하는 두 가지 중요한 제도 세부사항이 눈에 띈다.
"스코트랜드는 한 세기가 넘는 에드워드 1세의 강등 어휘에 의해 예상된 것이 아닌 땅(테라)으로 다시 언급된 반면, 헨리 2세의 '영주왕'(도미누스 렉스) 타이틀의 프리미어리그 지위는 윌리엄의 '스코트의 왕'(rex Scottorum)에 불과했다"고 말했다.[10]
이러한 영어 '오버로드쉽' 또는 '하이 킹쉽'의 개념은 이 조약의 기간 동안 이 관계를 규정할 것이다. 조약에서 스코틀랜드를 '도난'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 왕에게 '보유' 또는 '보유'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명시적으로 봉건적인 관계는 아니었다.[4] 헨리는 윌리엄이 헨리의 군주에 대한 궁극적인 의존을 인정하는 한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허락한 높은 왕이었다.[10]
여파
이 조약의 제정 이후, 윌리엄은 그의 약화된 지위의 결과로 스코틀랜드에서 몇 번의 굴욕을 겪는다. 갤로웨이에서는 이전의 긴장이 윌리엄의 예속력을 이용하기 위해 표면화되었고, 윌리엄은 갤로웨이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통제를 재확보하기 위한 어떤 조치를 시작하기 전에 헨리의 조언과 평의회를 구할 필요가 있었다.[4] 모레이와 로스에서는, 특정 귀족들 사이의 억눌린 분노가 왕권에 대한 잠재적인 도전자들을 야기시켰는데, 주로 던컨 2세의 사생아일 가능성이 있는 도날드 맥윌리엄이다.[4] 윌리엄이 10년 만에 8명가량 헨리의 법정을 자주 찾은 것과 국내에서의 입지가 약해진 점, 헨리가 스코틀랜드의 후계자를 보유하게 된 것에 대한 당혹감은 심각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10]
윌리엄의 부하로서, 헨리는 또한 그의 신부를 선택할 권리를 받았다. 헨리의 큰 손녀인 작센의 마틸다에 대한 윌리엄의 첫 번째 요청은 헨리가 추구한 결과일 수도 있는 교황의 합헌 판결에서 거절되었다.[4] 1186년 헨리는 그의 친족 여성이지만 비교적 작은 귀족 리차드의 딸인 보몽의 딸인 에르멩가르드를 선택했고, 선물로 에든버러에 있는 윌리엄 성으로 돌아왔다.[6] 윌리엄이 헌팅돈 백작(1185년 그가 즉시 데이비드에게 전함)으로 복권한 것과 함께 윌리엄의 지속적인 충성은 헨리가 자신의 왕국에 대한 더 중요한 프랑스의 위협을 인정한 것과 결합되어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이 조약으로 10년 동안 긍정적인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4]
헨리에게 있어서, 조약은 반란을 진압한 후 그의 모자의 또 다른 깃털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반항적인 아이들을 다시 굴복시켰고, 엘리노르 여왕을 여러 성에 감시하에 감금하도록 판결함으로써 그녀를 무력화시켰기 때문인데, 이것은 그가 평생 유지한 처벌이다.[11] 현재 스코틀랜드의 직접적인 지배권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스코틀랜드의 일반적인 문제에 개입하기 위해 많은 것을 할 필요도, 또한 매우 자주 요청하지도 않았다. 스코틀랜드인이 헨리에 직접 도움을 호소했다는 유일한 증거는 던퍼믈린의 아치발트 주임으로부터 나왔다. 주임은 윌리엄이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취한 행동에 대한 대응으로가 아니라 가까운 에든버러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 수비대의 무셀버그 항에서 계속되는 괴롭힘 때문에 헨리의 보호를 구했다.[1] 1174년 7월 12일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토마스 베켓의 무덤에서 공개적인 참회를 행했기 때문에 반란 중 타이밍이 우연히 그의 행운에 영향을 미쳤다.[4] 다음날 윌리엄의 포로가 일어나면서 헨리는 베켓의 살인과 관련된 추악함을 단번에 지나칠 수 있었고 스코틀랜드인, 프랑스인, 그리고 그의 자식들을 대신해 자신과 영국의 신성한 개입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해지
서브섹션 종료됨
1189년 헨리가 사망하자 리처드 1세는 왕위에 올라 즉위한 직후 윌리엄을 맞았다. 제3차 십자군 원정으로 떠나는 것에 대한 관심에 정신이 팔려 1189년 12월 5일, 리차드는 캔터베리의 Kutclaiming of Canterbury로 알려진 윌리엄과 함께 팔라이즈 조약 전체를 무효로 하는 새로운 헌장을 작성했다.
"어쨌든 스코틀랜드의 왕 윌리엄은 12월 달에 캔터베리에 있는 영국 왕에게 와서, 그의 형 말콤이 그들을 붙들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국에서 그의 고관들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영국의 왕인 리차드는 또한 그에게 록스버그의 성, 그리고 베르윅의 성을 자유롭고 조용히 복원시켜 주었고, 그는 그와 그의 모든 후계자들을 스코틀랜드 왕국, 그와 영국의 왕들에게 영원히 경의와 충성의 모든 것에서 무죄로 풀려나게 했다. 그의 성의 이 선물과 스코틀랜드 왕국에 대한 모든 충성과 충성을 그만둔 것에 대한 주장, 그리고 같은 뜻을 표하는 영국의 왕 리차드의 헌장을 위해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 리차드에게 준 것은 만 마르크 스켈레톤이다.[6]
윌리엄과 스코틀랜드는 이제 굴욕적인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원래의 팔라이즈 조약은 윌리엄에게 넘겨졌고, 아마도 파기되었을 것이다.[12] 스코틀랜드의 되찾은 독립에 대한 현대적 설명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는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그의 [헨리]의 무거운 멍에를 가치 있고 명예롭게 제거했다"[7]고 선언했다.
캔터베리, 1189년 기타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에게 부여된 자유에 관한 영국 왕의 헌장은 다음과 같다.
리차드는, 영국의 왕인 신의 은총으로 노르망디와 아키타네의 공작과 안주 백작에게, 대교주교, 주교, 배석, 귓불, 바론, 판사, 보안관에게, 그리고 영국 전역의 모든 신하와 충실한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인사한다. 우리가 스코틀랜드 왕과 록스버그와 베르윅의 성들과 같은 은혜로 가장 신망이 두터운 우리의 사촌 윌리엄을 회복시켰다는 것을 알아라. 그와 그의 후계자들이 그의 세습권으로서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우리의 아버지인 영국의 왕 헨리가 그에게서 새 기부로 빼앗은 행복한 기억의 결과 그리고 그의 형인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이 우리에게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할 것이다.네 전임자들은 옳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마찬가지로 전임자들이 우리 법정으로 안전장치를 가지고 오는 동안, 그리고 그가 법정에서 돌아오는 동안, 그리고 그가 우리 법원에 머무르는 동안, 그리고 그에 대한 적절한 조처를 하는 동안, 그리고 그에 따라 그에 따른 모든 자유, 고관, 명예가 r로 인해 그에게서 비롯된 모든 권리들을 그에게 해줄 것이다.ㄱ) 할렐루야. 우리가 뽑을 네 명의 귀족이 이와 같이 확인하여라. (ㄱ. 히) 할렐루야. 그리고 만약 우리 신하들 중 어느 한 사람이, 윌리엄 왕이 우리 아버지에 의해 포로로 잡혔을 때부터, 그와 같은 것이 법적으로 재판되지 않고,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경이나 행군을 점령했다면, 우리는 그에게 같은 것이 완전히 복구될 것이며, 같은 상태에 놓일 것이다.그가 그렇게 포로로 잡히기 전에 그들은 있었다. 게다가, 그가 영국에서 소유할 수 있는 그의 영토에 대해서는, 즉 데몬이든 유료가든 간에, 즉 헌팅돈 카운티와 다른 모든 카운티에서, 그와 그의 상속인들은, 말콤이 말한 것과 같이, 또는 그의 상속인이 신크(sinc)를 소유하지 않는 한, 해당 카운티를 영원히 완전하고 자유롭게 소유할 것이다.동일한 서비스 중 하나를 해제했다. 또한 동일한 서비스에서 탈퇴한 후 이에 해당하는 서비스도 그 또는 그 상속인에게 귀속된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아버지가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에게 무언가를 준다면, 우리는 같은 것을 비준하고 확정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의 신하들에 대한 모든 우화들과, 우리의 아버지가 그를 사로잡았다는 이유로 얻은 모든 헌장들을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만약 다른 헌터들이 건망증을 통해 우연히 우리에 의해 유지되거나 나중에 발견된다면, 우리는 같은 것이 완전히 공허하고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을 명령한다. 그는 또한 그의 선열들이 우리의 선열들에게 충신이었던 모든 땅에 대하여 우리의 충신이 되었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상속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The following being witnesses hereto: - Baldwin, archbishop of Canterbury, Walter, archbishop of Rouen; Hugh, bishop if Durham; John, bishop of Norwich; Hubert, bishop of Salisbury; Hugh, bishop of Lincoln; Godfrey, bishop of Winchester; Gilbert, bishop of Rochester; Reginald, bishop of Bath; Hugh, bishop of Coventry; William, bishop of Worcester; 왕의 어머니 엘리노르와 왕의 동생인 모타게의 백작 요한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6]
레거시
비록 팔라이즈 조약은 15년 동안만 발효되었지만, 그것은 영-스코트 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약의 본질은 캔터베리의 Kutclaim이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서면 문서가 그것을 계승해야 할 것을 요구하였다. 12세기와 13세기 조약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비록 그들의 효과는 누가 그들을 강제할 것인가에 달려있지만, 영국 군도 내에서 이러한 증가하는 외교 방식을 부각시켰다. 그 즉각적인 결과는 헨리가 요구했던 것처럼 스코틀랜드에 대해 "용서"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 충성과 경의를 표했던 이전의 전통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거슬리는 영어의 "과잉선"은 더 이상 아니었지만, 윌리엄이 소인이라는 것에 대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윌리엄이 항복하도록 요구된 모든 성에 영국식 가위조차 세우지 않기로 한 결정에서 증명되었듯이, 조약의 힘을 진정으로 이용하지 않았다.[7] 헨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가 다른 왕국을 관리해야 하기보다는 스코틀랜드인들을 계속 일렬로 유지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조약을 초래한 반란을 이긴 헨리가 베켓의 무덤을 방문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새로운 수호성인을 영원히 굳히는 것을 도우며, 헨리는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정복도 압박했다. 스코틀랜드의 상대국에 대한 영국 교회의 지배와 관련된 그것의 단서에 대해, 팔라이즈 조약은 궁극적으로 반대의 결과를 강요했다. 스코틀랜드 교회에 대한 영국의 패권에 대한 문제는 조약에 의해 답되는 것 같았다. 헨리는 노샘프턴의 한 협의회에서 조약에 따라 스코틀랜드의 주교들을 강제적으로 복종시키려 했지만, 그들 중 어느 쪽이 스코틀랜드의 메트로폴리탄이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칸터베리 대주교들과 요크주교들 사이의 논쟁은 로마에 대한 호소를 위한 시간을 허락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76년 7월 30일 황소 슈퍼안심버스를 발행했는데, 이 황소는 스코틀랜드의 주교들이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 교황을 그들의 수도로 간주해야 한다고 선언했다.[7] 이것은 1192년 쿰 우니베르시가 스코틀랜드 교회를 독립 기관으로 설립하면서 공식화되었다.
노섬브리아에 관한 한, 윌리엄은 귀의 상실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1194년 노섬벌랜드에 은 1만5000마크를 제공했지만 리차드는 성이 아닌 땅과 헤어지겠다고 했을 뿐 윌리엄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6] 1199년 존이 등극하면서 윌리엄은 여러 해 동안 몇 차례 더 시도를 하였는데, 이 시도 각각은 거절당했다.[4] 윌리엄은 1214년 노섬브리아를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노섬브리아는 그의 오랜 통치기간 동안 영국과 관련된 그의 많은 행동들을 규정했던 문제였다.[13]
요컨대, 팔라이즈 조약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 이유는 짧은 기간 동안 영어 지배를 선언하면 더 많은 적대행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영국 왕들은 이러한 주장을 밀어붙일 것이고, 웨일즈와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도 영국 지배를 강요하는 조약의 정신을 보게 될 것이다. 에드워드 1세가 영국의 스코틀랜드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재확보하기 위해 후계 위기를 이용하기 전까지, 조약의 파기는 한 세기 동안의 불안한 동맹에 제공되었고, 1296년부터 시작된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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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ng, Andrew (2012). The History Of Scotland - Volume 1: From The Roman Occupation To Feudal Scotland. Altenmünster: Jazzybee Verlag. ISBN 978-3-8496-0461-5. OCLC 863904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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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nglish historical documents. Douglas, David C. (David Charles), 1898-1982, Whitelock, Dorothy, Greenaway, George William, Myers, A. R. (Alec Reginald), 1912-1980, Rothwell, Harry, Williams, C. H. (Charles Harold), 1895-. London. ISBN 0-415-14361-6. OCLC 34796324.CS1 maint: 기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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