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푸트라
사리푸트라 | |
19세기 미얀마의 사리불 조각(나무에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혔으며, 유리로 장식을 함) - 호놀룰루 예술 아카데미 소장품 | |
산스크리트어 | 산스크리트어: Śāriputra(사리푸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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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어 | 팔리어: Sāriputta(사리풋타) |
중국어 | 舍利佛 |
한국어 | 사리불 |
숭배 정보 | |
속성 | 지혜 제일 |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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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푸트라(舍利弗, 산스크리트어: Śāriputra) 또는 사리풋다(팔리어: Sāriputta), 사리불(舍利佛)은 석가의 십대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지혜제일이라고 불린다.
산스크리트어 발음으로는 "사리푸트라"라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사리불이라고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사리자가 바로 사리푸트라(사리불)이다.
이름의 뜻
[편집]사리푸트라(사리불)의 어머니 이름은 "사리"이다. 산스크리트어 푸트라(Putra)는 아들이라는 뜻이므로, 이름의 뜻은 사리의 아들이라는 뜻이다.[1]
사리불(舍利佛)
[편집]중국과 대한민국 불교에서 흔히 사리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산스크리트어 푸트라(Putra)를 음차하여 "부처 불(佛)"이라는 글자로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부처이기도 하다. 석가모니불은 사리푸트라(사리불)가 이미 아나함과(아라한)를 성취하여[2], 윤회를 벗어났다고 증명해줬다.[3]
사리자(舍利子)
[편집]반야심경에서 "사리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사리자(舍利子)라고 부른다.[4]
생애
[편집]탄생
[편집]마가다의 수도 라자그리하 밖에 있는 나란다의 부자 바라문 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우파 티사"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미 알듯이 어머니 사리에게서 받은 이름인 사르푸트라(사리불)가 더 유명하다.[5]
어린 시절
[편집]얼굴이 잘 생겼었고, 학문과 기예를 익혔다. 특히 베다에 통달했다. 16세에 종교 이론들을 해석하고 논박하였다. 자신과 다른 이론들까지 굴복시켰으며, 목련존자와 친한 친구사이였다.[6]
출가를 결심
[편집]사르푸트라(사리불)는 친한 친구인 목련존자(목건련)와 축제를 보러갔다. 둘은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100년 뒤에는 이 사람들은 볼 수 없겠지?"라는 대화를 서로 나누고는 인생무상을 느끼고 출가를 결심했다.[7]
첫번째 스승(육사외도)
[편집]사르푸트라(사리불)과 목련존자(목건련)가 처음 스승으로 삼은 사람은 여섯 외도 중 한 사람인 "산자야비라지자"였다. 7일 만에 첫 스승의 가르침을 모두 통달하였고, 250명의 스승이 되었다. 하지만 "산자야비라지자"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주지 못했고, 이에 다른 스승을 찾아나선다.[8]
석가모니불의 제자
[편집]사르푸트라(사리불)는 탁발을 나온 석가모니불 제자와의 문답을 통해 바로 "제법무아(諸法無我)"를 깨달아버렸다. 자신의 제자 250명을 데리고 죽림정사로 가서 석가모니불의 제자가 되었다.[9] 물론 목련존자(목건련)도 석가모니불의 제자가 되었다.
거의 보름 만에 아라한(아나함과)이 되어, "번뇌와 집착"을 떠나버렸다.[10] 음차한 한자어 사리불처럼 부처(불)가 된 것이다.
열반
[편집]사르푸트라(사리불)의 친한 친구인 목련존자(목건련)가 외도에게 폭행을 당하여 열반(죽음)에 들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사르푸트라(사리불)는 석가모니불에게 자신이 먼저 열반에 들기를 청했다.[11]
석가모니불이 한 겁(한 우주가 생겼다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우주가 생기는 시간) 뒤에 열반에 들어라고 하자, 사르푸트라(사리불)는 석가모니불이 그렇게 하면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12]
그리고 다시 자신이 먼저 열반에 들기 청하는데, 석가모니불의 열반(죽음)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석가모니불이 보니 사르푸트라(사리불)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허락하였다.[13]
친동생 쭌다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 "사리"에게 마지막 설법을 하고는 음력 11월 보름에 열반에 들었다.[14]
일화
[편집]사리푸트라(사리불)는 아라한(아나함과)이 되었기에 화내는 마음이 사라졌는데, 이에 관한 일화가 있다.
사위성의 인욕자
[편집]사위성 사람들은 사리푸트라(사리불)가 잘 참는 인욕자라고 칭찬을 했다. 그러자 어떤 젊은이가 사리푸트라(사리불)의 등을 힘껏 때렸다. 사리푸트라(사리불)은 "이게 뭔가?"하면서 혼잣말을 하고는 다시 걸어가 버렸다.[15]
어머니와의 일화
[편집]사리푸트라(사리불)의 어머니 "사리"는 4남 3녀를 두었었다. 그러나 장남인 사리푸트라(사리불)가 출가를 하자, 다른 자식들도 모두 출가를 하여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사리"는 아들 사리푸트라(사리불)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16]
사리푸트라(사리불)가 고향에 와서 탁발을 하자, 어머니가 심하게 꾸짖었다.
팔십만 냥이나 되는 거대한 재산을 버리고서는 남이 주는 밥찌꺼기를 먹고, 시큼하게 상한 쌀죽도 버리지 않고 먹고, 머리를 밀고 가사를 입은 이상한 사람들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국자 뒷면을 핥고 다닌다고 모욕을 했다. 그리고 집안을 망쳐버렸다고 했다.[17]
그래도 사리푸트라(사리불)는 아무 말없이 탁발해서 돌아갔다.
각주
[편집]- ↑ 이, 원익 (2013년 12월 3일). “[지혜의 향기]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중앙일보 - THE KOREAN DAILY》. 중앙일보.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사리불의 어머니 이름이 사리(Sari)였고 그 아들(putra)이니까 사리푸트라가 된 것인데
- ↑ 김, 응철 (2008년 2월 27일). “사리불 존자 ①”.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부처님께서도 수행자가 아나함과에 도달하면 마음속에서 화내는 마음이 사라진다고 말씀하시면서 존자를 칭찬하셨다.
- ↑ 김, 응철 (2008년 3월 19일). “사리불 존자 ④”.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부처님께서는 “사리불 존자가 성내지 않고, 수행에 근실하고, 계행에 덕이 높고, 교만하지 않고,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 윤회에서 벗어났다”고 증명하셨다.
- ↑ 김, 응철 (2008년 3월 19일). “사리불 존자 ④”.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사리뿟따 존자의 어머니 이름은 ‘사리’였다. 사리뿟따는 ‘사리의 아들’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이름이다. 존자의 이름을 사리불(舍利弗)이라고 한 것은 음으로 번역한 것이다. 반면에 반야심경에서 사리자(舍利子)라고 호칭하는 것은 ‘뿟따’를 아들 자(子)로 직역한 것이다.
- ↑ 불교신문, 불교신문 (1995년 4월 1일). “경전안물열전-사리푸트라”.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사리푸트라라는 이름은 어머니의 사리에서 받은 이름이며, 아버지 티사에의해서 우파 티사라고도 불리고 있다.그는 왕서성 교외 나란다의 부자인 바라문의 아들로 용모가 단정하고 얼굴이 준수했다.
- ↑ 불교신문, 불교신문 (1995년 4월 1일). “경전안물열전-사리푸트라”.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그는 왕서성 교외 나란다의 부자인 바라문의 아들로 용모가 단정하고 얼굴이 준수했다. 그는 자라면서 여러가지 기예와 학문을 익혔고 특히 나베다에통달했다. 뿐만아니라 당시 여러 종교철학의 논리들을 해석했고 16세에는다른 이론들을 논박하고 그들의 이론을굴복시켰다고 하니 상당한 학문적 수준에 올랐던 것이다.소년시절에 저 유명한 목갈라나(대목련존자)와는 친한 친구사이였다.
- ↑ 불교신문, 불교신문 (1995년 4월 1일). “경전안물열전-사리푸트라”.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큰 종교축제를 구경갔다가 함께겪은 일이 있었다. 축제는 노래와 춤과 여러가지 오락으로 보는 이를 기쁘게 했다.그러나 이 두사람은 그러한 오락이 인간을 진실로 기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그곳에서 무상을 느꼈다. 사리푸트라는 목갈라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이 사람들이 저렇게 즐거워 하고있지만, 백년후에는 한 사람도 이세상에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그때 목갈라나도 대답하기를 "내 생각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이러한 계기를 통하여 두사람은 출가
- ↑ 불교신문, 불교신문 (1995년 4월 1일). “경전안물열전-사리푸트라”.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처음 출가한곳은 육사외도의 하나인 산자야비라지자에게 였다. 사리푸트라는 그의 밑에서 7日7夜에 스승의 가르침을 다 통달하였고 그의 제자 2백50명(혹은 5백명)의 상수가 되었다. 그러나 스승은 고통에서부터 벗어나는 길은 가르쳐주지 못했다.
- ↑ 불교신문, 불교신문 (1995년 4월 1일). “경전안물열전-사리푸트라”.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사리푸트라는 즉시 2백5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죽림정사로 나아가 부처님께 예배하고 제자가 되었고, 약 반달만에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 ↑ 일아 스님, 일아 스님 (2011년 4월 30일). “아라한은 어떤 사람인가”.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번뇌와 집착’을 떠난 분
- ↑ 김, 응철 (2008년 3월 25일). “사리불 존자 ⑤”.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목건련이 외도들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여 열반에 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리불은 부처님을 찾아뵙고 ‘자신이 먼저 열반에 드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
- ↑ 김, 응철 (2008년 3월 25일). “사리불 존자 ⑤”.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그대는 왜 한 겁쯤 더 머무르려 하지 않는가?”라고 물으셨다. 이에 존자는 다음과 같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의 목숨이 매우 짧아 한껏 살아도 백년을 넘지 못한다. 중생들의 목숨이 짧기 때문에 내 수명도 짧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세존께서 한 겁을 더 머물러 주신다면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 ↑ 김, 응철 (2008년 3월 25일). “사리불 존자 ⑤”.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존자는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는 것을 차마 제 눈으로 볼 수 없사오니 저의 열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재차 청하였다. 부처님은 존자의 천수(天壽)가 다한 것을 아시고는 “그렇게 하도록 하라.
- ↑ 김, 응철 (2008년 3월 25일). “사리불 존자 ⑤”.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사리불존자가 고향의 어머니를 찾아 갈 때 함께 동행한 사람은 쭌다(Cunda)라는 사미였다. 쭌다는 존자의 친동생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제도하기 위하여 마지막 설법을 한 존자는 쭌다의 수발을 받으면서 음력 11월 보름에 완전한 열반에 들으셨다.
- ↑ 김, 응철 (2008년 2월 27일). “사리불 존자 ①”.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사위성 사람들이 모여서 다음과 같이 사리불 존자의 덕행을 칭찬하고 있었다. “존자는 참으로 인욕자이시다. 무지한 자가 존자를 몰라보고 욕하고 심한 말을 해도 존자는 조금도 화를 내시는 법이 없다.” 이 말을 들은 한 젊은이가 존자를 시험하기 위하여 성안을 걸어가고 있는 존자의 등을 힘껏 때렸다. 그러나 존자는 ‘이게 뭔가?’하고 혼잣말을 하고는 여법하게 그냥 걸어갔다.
- ↑ 김, 응철 (2008년 3월 19일). “사리불 존자 ④”.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사리불 존자의 어머니는 슬하에 4남3녀를 두었는데 모두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때문에 장남이 되어서 동생들을 모두 출가하게 만든 존자에 대하여 어머니는 서운한 마음이
- ↑ 김, 응철 (2008년 3월 19일). “사리불 존자 ④”.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7일에 확인함.
“남이 주는 밥찌꺼기나 먹는 자, 시큼한 쌀죽도 버리지 않고 먹는 자, 이상스런 사람들과 함께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국자 뒤나 할고 다니는 자여! 너는 이 같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 팔십만 냥이나 되는 거대한 재산을 버렸단 말이냐? 너는 우리 집안을 아주 망쳐 버린 자다. 어서 이 음식이나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