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 원정
Chios expedition치오스 원정(그리스어: εκσααταίααα τηα αας χί was)은 그리스 독립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치오스 섬의 탈환을 위한 그리스 정규군과 불규칙한 군대의 시도가 실패한 것이었다. 키오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그리스 봉기에 참여했지만, 1822년 오스만 함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고 그 인구가 학살되었다.
역사적 배경
1827년 마지막 달, 독립이 임박하자 그리스 반군은 펠로폰네세로부터 키오스, 크레타, 동·서 그리스까지 동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이는 독립전쟁 이전 단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지역들까지도 그리스 예비국가 밖에 넓은 지역이 남아 있을 것을 매우 우려했기 때문이다.
1827년 시로스에 살던 치안 상인들은 그리스 정부에 치오스를 되찾기 위한 원정에 나서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새로 구성된 치안위원회는 그들의 동료 치안(Chian)인 아스토니오스 코라리스(Astabilios Korais)에게 서한을 보내 캠페인의 기본 자원(물과 음식 등)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주지사가 도착할 때까지 그리스를 관장했던 부관구민위원회는 1827년 8월 리처드 교회에게 샤를 니콜라스 파브비에에게 키오스를 되찾는 임무를 맡기라고 명령했다. 처음에는 파브비에르가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나 곧 소규모 포병대(야전포 4기, 6-7공성포, 박격포 3기)와 함께 대부분 정규군 출신 600~700명의 원정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1월까지 도착하지 않은 200명의 기병(실제로 4분의 1도 안 되는 말이 있었지만)과 중앙 그리스와 치안 난민으로부터 온 천여 개의 부정기병들이 그 병력을 보충했다.
초기캠페인
원정대는 마찬가지로 1824년 오스만군에 포로로 잡혀 황폐해진 치오스 근처의 파사라 섬에 집결했다. 원정군은 10월 17일 유수프 파샤 휘하의 2천 명의 오스만 수비대와 대치하면서 치오스에 상륙했다. 다음 날 토마스 코크란 휘하의 그리스 함대는 박격포 5대와 포탄 1000발을 추가로 하역했다. 그리스 원정은 이미 10월 12일 에게 해의 공신들이 키오스에 대한 어떠한 새로운 봉기에도 반대하는 포고문을 발표한 대국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파브비에르는 자신을 반대하는 오스만 제1군을 격파하여 그가 포위한 중세 치오스 성에 강제로 몸을 가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파브비에르는 이 요새를 바다에서 봉쇄할 함대가 부족했기 때문에 포위작전은 불완전했다.
파브비에르가 직면하고 있는 α 심각한 문제는 프랑스 제독 앙리 드 리니에게 그만 두고 떠나라는 명령이었다. 파브비에르는 그리스 정부의 명령만 받았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1827년 11월 5일, 그는 필헬렌 포르투갈 대령 안토니오 피게이라 달메이다 휘하의 기병대에 의해 강화되었다. 며칠 후 유명한 광산 채굴자 콘스탄티노스 라구미츠이스가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돕기 위해 이 섬에 왔다.
동시에 파브비에르는 아나톨리아 해안에 대한 습격을 개시했고, 콘스탄티노스 카나리스 휘하의 화력 공격과 연계하여 체스메 항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다. 이 경우에는 현풍으로 인해 이 작전의 집행이 금지되었다. 1828년 1월 6일 소티르 여단이 폭풍에 침몰한 후 스미르나의 주변 지역에 대한 유사한 습격은 좌절되었다.
오스만 수비대
1월 12일, 오스만군은 그리스 포위선의 허술한 보루를 상대로 강력한 정렬을 감행했고, 곧 제2정규대대의 개입에 귀중한 시간을 벌어 투르크군을 몰아낸 카페타니오스 게카스 휘하의 변칙병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멈추기까지 빠른 진전을 이루었다. 파브비에르 자신은 자신의 참호에서 터키식 현수막을 본 채 3대대를 점령하고 터키인들이 포로로 잡았던 원래의 보루를 탈환했다. 터키군은 240명(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524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봉쇄가 풀리지 않아 승패가 결정적이지 않았다. 신임 총독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이 섬에 자금과 증원군을 보내 함대에 지원을 명령했지만, 치안 위원회는 군대의 급료와 물자 지원을 중단한 반면, 불규칙한 투사들의 퇴각은 현지인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대피
마침내 1828년 2월 27일 오스만 함대가 그리스 함정을 몰아 포위망을 방조했다. 다음날 그들은 3천 명의 병력을 쎄스메에서 바다를 건너 치오스로 호송했다. 처음 섬에 상륙하려던 시도는 그리스 정규군에 의해 좌절되어 오스만군은 요새에 상륙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도착으로 치안 인구의 사기가 저하되었는데, 그들 중 다수는 섬을 탈출했다. 파브비에르는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기로 결정했고, 3월 초 그와 그의 부하들은 섬에서 대피했다.
참조
원천
- Παναγής Δ. Ζούβας (1971). Η εκστρατεία της Χίου υπό τον Φαβιέρον κατά την Ελληνικήν Επανάστασιν. Athens.
- Η Ελληνική Επανάσταση και η ίδρυση του Ελληνικού Κράτους (1821-1832) - (τόμος ΙΒ). Ιστορία του Ελληνικού Έθνους. Athens: Εκδοτική Αθηνών. 1975. ISBN 960-213-095-4.
- Σπυρίδωνας Τρικούπης (1994). Από τη Γ΄ Εθνοσυνέλευση στην Επίδαυρο ως την ανακύρηξη της Ανεξαρτησίας - (τόμος Τέταρτος). Ιστορία της Ελληνικής Επανάστασης. Athens: Νέα σύνορα - Α. Α. Λιβάνη. ISBN 960-236-3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