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실레시아 전쟁
First Silesian War제1차 실레시아 전쟁(독일어:에르스터 슐레시처 크리그)는 1740년부터 1742년까지 지속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으로 프로이센이 실레시아(현재의 폴란드 서남부에 있음)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에서 점령하는 결과를 낳았다.전쟁은 주로 실레시아, 모라비아, 보헤미아(보헤미아 왕관의 땅)에서 벌어졌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한 극장을 구성했다.18세기 중엽에 프레데릭 대왕의 프로이센과 마리아 테레사의 오스트리아 사이에 벌어진 세 차례의 실레시아 전쟁 중 처음으로, 이 세 전쟁은 모두 실레시아의 프러시아 지배로 끝났다.
전쟁을 촉발시킨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프로이센은 실레시아 일부에 대한 수세기 동안 지속된 왕조적 주장을 카수스 벨리(casus belli)로 내세웠지만, 리얼폴리틱과 지오스트라테이트적 요소도 갈등을 자극하는 데 한몫했다.마리아 테레사가 경합한 합스부르크 왕정 계승은 프로이센이 작센이나 바이에른 같은 지역 라이벌에 비해 자신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쟁은 1740년 말 합스부르크 실레시아의 프러시아 침공으로 시작되었고, 1742년 베를린 조약으로 프러시아의 실레시아 대부분과 보헤미아 일부에 대한 프로이센의 압류를 인정하면서 프러시아의 승리로 끝났다.한편, 더 넓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계속되었고, 실레시아를 둘러싼 분쟁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불과 2년 후에 새로운 제2차 실레시아 전쟁으로 끌어들일 것이다.제1차 실레시아 전쟁은 독일의 약소국들에 의해 합스부르크 왕정이 예상치 못한 패배로 기록되었고, 1세기 이상 동안 독일 정치를 형성할 오스트리아와 프루시아의 경쟁관계를 촉발시켰다.
맥락 및 원인
18세기 초, 브란덴부르크-프루시아의 통치자 호헨졸레른 가문은 브란덴부르크의 마르그라비테에 있는 프로이센의 핵심 영토와 인접하여 인구가 많고 번영한 지역인 합스부르크 주 내의 여러 두키족에 대한 왕조의 주장을 펼쳤다.[1]실레시아는 세수, 산업 생산량(특히 광물), 군 신병으로서의 가치 외에도 교전자들에게 지리적 중요성이 컸다.어퍼 오더의 계곡은 보헤미아 왕국 브란덴부르크와 모라비아의 마르그라비테 사이에 자연적인 군사 통로를 형성했고, 그 영토를 장악하는 어떤 세력이든 이웃을 위협할 수 있었다.실레시아는 또한 신성로마제국의 북동쪽 국경을 따라 자리잡고 있어, 그 통제관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독일 내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었다.[2]
브란덴부르크-프루시아의 주장
Brandenburg–Prussia's claims in Silesia were based, in part, on a 1537 inheritance treaty between the Silesian Piast Duke Frederick II of Legnica and the Hohenzollern Prince-Elector Joachim II Hector of Brandenburg, whereby the Silesian Duchies of Liegnitz, Wohlau and Brieg were to pass to the Hohenzollerns of Brandenburg should the Piast dynasty i실레시아는 멸종한다.당시 보헤미아(실레시아의 봉건적 지배자)의 합스부르크 왕 페르디난도 1세는 이 협정을 거부하고 호엔졸레르인들에게 이를 거부하라고 압박했다.[3]1603년 브란덴부르크의 호헨졸레른 엘렉터 요아힘 3세 프레데릭은 그의 사촌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마르그라브 조지 프레데릭으로부터 야게르노프의 실레시아인 두치(Silesian Duchy)를 따로 물려받아 둘째 아들인 요한 게오르그를 공작으로 설치하였다.[4]
1618년 보헤미안 반란과 그 뒤 이어진 30년 전쟁에서 요한 게오르그는 가톨릭 신성로마제 페르디난드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며 실레시아 영지에 가담했다.[5]1621년 백산 전투에서 카톨릭이 승리한 후, 황제는 요한 게오르크의 뒤치를 몰수하고 그가 죽은 후 후계자에게 돌려주지 않으려 했으나 브란덴부르크의 호헨졸렌들은 계속해서 야게르도르프의 합법적인 통치자라고 주장하였다.[6]1675년 브란덴부르크의 "위대한 선택자" 프레데릭 윌리엄은 실레시아 피아스트 선이 리그니츠의 조지 윌리엄 공작의 죽음으로 끝나자 리그니츠, 워홀라우, 브리예그에 대한 주장을 내세웠지만 합스부르크 황제는 호헨졸레른의 주장을 무시하고 그 영토는 왕위에 종속되었다.[7]
1685년, 오스트리아가 터키 대전에 참전했을 때, 황제 레오폴트 1세는 터키인에 대한 군사 지원과 실레시아에서 뛰어난 호헨졸레른의 주장을 항복하는 대가로 슈위버스의 실레시아 엑클라베를 프레드릭 윌리엄에게 즉각적으로 통제하도록 했다.대 일렉트로너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브란덴부르크의 프레데릭 3세가 즉위한 후, 황제는 1694년 슈위버스를 다시 장악하여, 이 영토가 평생 고 대 일렉트로너에게 개인적으로만 할당되었다고 주장하였다.[8]젊은 왕자로서 프레데릭 3세는 레오폴드가 빚의 일부를 갚는 대가로 이 압류에 은밀히 동의하였지만,[9] 군주로서 그는 그 합의를 거부하고 예거른도르프와 실레시아 피아스트 유산에 대한 옛 호헨졸레른 주장을 재인증하였다.[8]
오스트리아의 계승
2세대 후, 프로이센의 새로 왕위에 오른 호헨졸레른 왕 프레데릭 2세는 1740년 5월 왕위를 계승한 직후 실레시아에 대한 디자인을 형성하였다.[10]프레데릭은 자신의 왕조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고,[1] 아버지로부터 크고 잘 훈련된 프러시아 군대와 건강한 왕실 재고를 물려받았다.[11]오스트리아는 재정적인 곤경에 처해 있었고, 1737–1739년 오스트리아-터키 전쟁에서 치욕적인 성과를 거둔 후, 그 군대는 강화되거나 개혁되지 않았다.[12]영국과 프랑스가 젱킨스의 이어 전쟁에서 서로의 관심을 끌고 있고 스웨덴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유럽의 전략적 상황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공격에 유리했다.[13]바이에른과 작센의 선거인단도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주장을 펼쳤으며 공격에 가담할 것 같았다.[1]호엔졸른의 왕조적 주장이 합법적인 관점을 제공했지만, 리얼폴리틱과 지스트라테이의 고려가 전쟁을 자극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4]
1740년 10월 합스부르크 신성로마 황제 찰스 6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브란덴부르크-푸루시아가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일 기회가 생겼다.1713년의 실용적 제재로, 찰스는 그의 세습 직함의 후계자로 장녀 마리아 테레사를 세웠다.그가 죽자 그녀는 합스부르크 왕정 내에 있는 보헤미안 및 헝가리 땅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통치자가 되었다.[15]찰스 황제의 생전에 실용주의 제재는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일반적으로 인정받았으나 그가 죽자 즉시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에 의해 경쟁되었다.[16]
프레데릭은 1740년 볼테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정치체제의 완전한 변혁을 위한 신호"라며 오스트리아의 여성계승이 실레시아를 압류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라고 보았다.[10]그는 합스부르크 일가가 세습적 소유물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 데메스의 일부로 보유하고 있던 실레시아에는 실용적 제재가 적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프레데릭은 또한 그의 아버지인 프레데릭 윌리엄 1세가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쥴리히와 버그의 레니쉬 뒤치족에 대한 호헨졸레른의 주장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보증하는 대가로 제재에 동의했다고 주장했다.[17][18]
한편 바이에른의 찰스 알버트 왕자와 작센의 프레드릭 아우구스투스 2세 왕자는 각각 합스부르크 왕가의 원로 지부 출신 마리아 테레사의 사촌 중 한 명과 결혼했고, 이들은 남성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합스부르크 영토에 대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러한 연줄을 이용했다.[11]개인적인 연합으로 폴란드를 통치했던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는 특히 실레시아를 장악하여 자신의 두 영토를 하나의 인접 영토로 연결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브란덴버그를 거의 포위할 뻔 했다).이러한 결과를 막으려는 프레데릭의 우려는 경쟁적인 승계가 기회를 제공했을 때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서두르는 데 기여했다.[1]
전쟁을 향해 나아간다.
프로이센이 실레시아의 주장을 재활성화하고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자, 몇몇 다른 유럽 강대국들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바이에른의 찰스 알베르트는 보헤미아, 상오스트리아, 티롤의 합스부르크 영토와 함께 제국 왕위에 대한 주장을 제기했고, 작센의 프레드릭 아우구스투스는 모라비아와 상오실레시아에 대한 주장을 제기했다.[19]스페인과 나폴리 왕국은 북부 이탈리아에 합스부르크 소유지를 점령하기를 희망했고 합스부르크 왕국을 전통적인 라이벌로 본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의 지배권을 노렸다.[20]쾰른의 일렉트로라테스와 팔라티네테는 이에 합류하여 넵스부르크 왕정의 감소 또는 파괴와 독일 국가들 사이에서 그 지배적인 위치를 목표로 한 넵스부르크 동맹으로 알려진 동맹을 결성하였다.[16]
오스트리아는 (하노버의 유권자들과 개인적인 연합으로) 대영제국의 지지를 받았고, 결국 사보이-사르디니아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지지를 받았으며, 엘리자베스 여왕 휘하의 러시아 제국도 스웨덴(당시 프랑스의 동맹국)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보다 넓은 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편을 간접적으로 들었다.분쟁에서 마리아 테레사의 목적은 첫째, 세습 땅과 작위를 보존하고 둘째, 그녀의 남편인 로레인의 프란시스 스테판 공작이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도록 지지를 얻거나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집은 독일 내에서 전통적 우월성을 옹호했다.[16]
10월 20일 찰스 황제가 사망한 후 프레데릭은 재빨리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했고, 11월 8일 프러시아군의 동원을 명령했고, 12월 11일 마리아 테레사에게 실레시아의 사임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했다.[21]그 대가로, 그는 합스부르크의 다른 모든 소유물들을 어떠한 공격에도 보증하고, 거액의 현금 보상금을 지불하고,[22] 실용주의 제재를 인정하고, 제국 선거에서 그의 선거권자인 브란덴부르크의 투표권을 마리아 테레사의 남편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다.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와 그의 부대는 실레시아로 진격했다.[21]
방법 및 기술
현대 초기의 유럽 전쟁은 전통적인 블러드 무기와 결합하여 총기를 널리 채택함으로써 특징지어졌다. 18세기 유럽 군대는 매끄러운 보병 부대와 총검으로 무장한 대규모 보병 부대를 중심으로 건설되었다.기병대는 사브르와 권총 또는 탄수화물을 갖추고 있었으며, 경 기병대는 주로 정찰, 선별, 전술 통신에 사용되었고, 중장비 기병대는 전술적 예비군으로 사용되어 충격 공격에 배치되었다.스무드보어 포병대는 화력을 지원했고 포위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23]이 시기의 전략전은 주변 지역과 도로를 통제하기 위해 배치된 주요 요새의 통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긴 시간 동안 무력 충돌의 공통점이 있었다.결정적인 야전은 비교적 드물었지만, 프레데릭의 전쟁 이론에서는 현대의 경쟁자들 사이에서 전형적이었던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24]
실레시아 전쟁은 18세기의 대부분의 유럽 전쟁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규율한 정규군을 갖추어 공급하여 주권자의 이익을 대신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이른바 내각 전쟁으로 치러졌다.점령한 적 영토에는 정기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자금을 갈취했지만, 이전 세기의 분쟁에 비해 민간인들에 대한 대규모 잔학행위는 드물었다.[25]군대는 혼자서 사냥과 약탈을 함으로써 장기간에 걸친 캠페인을 벌이기에는 너무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많은 전쟁에서 군대의 물류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군수 물자는 중앙집중 잡지에 저장되고 적군의 기습에 취약성이 높은 수하물 열차에 의해 보급되었다.[26]군대는 일반적으로 겨울에는 전투작전을 지속할 수 없었고, 보통 추운 계절에는 겨울 숙소를 설치하여 봄이 돌아오면서 캠페인을 재개했다.[23]
코스
1740-41년 실레시아 전역
프러시아군은 1740년 12월 초순에 오더를 따라 조용히 미사를 거쳤으며, 12월 16일, 선전포고 없이 프레데릭은 자신의 군대를 국경선을 넘어 실레시아로 이동시켰다.[27]프러시아군은 2개 군단으로 이루어져 총 2만 7천 명의 병사가 있었으며 실레시아는 8천 명밖에 되지 않는 오스트리아 수비대에 의해 방어되었다.[28]오스트리아인들은 단지 가벼운 저항과 몇 개의 요새를 수비할 수 있었다; 프러시아인들은 1741년 1월 2일 브레슬라우에서 싸움 없이 수도를 장악하면서 지방을 휩쓸었다.[29][30]오라우의 성곽도 1월 9일에 무저항으로 빼앗겼으며,[31] 그 후 프러시아인들은 겨울 숙소로 사용했다.[32]1741년 1월 말경에는 실레시아의 거의 전부가 프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나머지 오스트리아 거점인 글로가우, 브리그, 니세 등이 포위되었다.[21]
1741년 초 겨울 숙소를 떠난 후 프러시아군은 봄 운동을 시작했고, 3월 9일 안할트데소의 레오폴트 2세 왕자는 글로가를 기습했다.3월 말, 빌헬름 라인하르트 폰 네이페르그(Wilhelm Rinhard von Neipperg)의 지휘 아래 2만여 명의 오스트리아군이 모라비아에서 수데테스 산맥을 넘어 4월 5일 네이세스의 포위를 깨뜨렸고,[33] 이후 주요 프러시아군은 그 진격을 반대하기 위해 기동했다.[34][35]양군은 4월 10일 말비츠 마을 부근에서 교전하였는데, 그 곳에서 쿠르트 폰 슈베린 마샬 휘하의 프러시아인들이 말비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다.어느 군대도 몰비츠에서 잘 무죄판결을 내렸고, 어느 순간 프레데릭은 붙잡히지 않기 위해 (슈베린의 조언에 따라) 도망쳤으나, 프러시아인들은 그라운드를 점령하고 나서 그 전투를 승리로 묘사했다.[36]브리에그는 5월 4일 프러시아인들에게 항복했고,[37] 그 후 주요 프러시아군은 네이세 근처에서 다음 달 동안 진을 치고 네이페그의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했으나 거의 싸우지 않았다.[38]
1741년 중반의 협상
오스트리아가 몰비츠에서 프러시아 침공을 격퇴하지 못한 후, 다른 세력들이 대담해져서 포위된 대구를 공격하게 되었고, 그 갈등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확대되었다.[39]프랑스는 브레슬라우 5년 6월 조약에서 프로이센의 실레시아 압류 지지를 선언했고,[40][41] 7월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오스트리아에 대한 바이에른의 영토 주장을 지지하기로 한 님펜부르크 조약에 가입했다.프랑스군은 8월 15일 라인 강을 건너 [19]다뉴브강에서 바이에른군과 합류하여 비엔나 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42] 스페인-네폴리탄군은 오스트리아군이 보유한 북부 이탈리아를 공격했다.[43]오스트리아 동맹국이었던 작센은 이제 프랑스 동맹에 가입했고 영국은 프랑스나 프러시아의 하노버 공격을 막기 위해 중립을 선언했다.[44][45]
자신의 영역을 완전히 분할할 것이라는 전망에 직면한 마리아 테레사는 다음 달까지 힘을 모아 역습을 준비했다.6월 25일, 그녀는 프레스부르크에서 헝가리의 여왕으로서 공식적인 대관식을 받았고 그녀의 동쪽 땅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46]8월에 그녀는 프레데릭에게 로우 국가에서의 양보와 프로이센이 실레시아를 피난시킬 경우 현금 지불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즉각 거절당했다.[47]한편 새로운 적들은 오스트리아를 다방면으로 공격하였는데, 프랑코-바바야리아군은 9월 14일 린츠를 점령하고 상오스트리아를 거쳐 10월까지 빈 부근에까지 진격하는 한편, 보헤미아는 동시에 작센족의 침략을 받았다.[19]오스트리아의 고통을 본 프레데릭은 넴펜부르크 리그를 공개적으로 계속 지지하면서까지 브레슬라우에서 네이퍼그와 비밀 평화협상을 열었다.[48]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프랑스나 바이에른이 오스트리아의 파괴를 통해 독일의 지배세력이 된다는 생각은 프레데릭에게 어필하지 않았다.[48]으로 영국, 그리고 10월 9일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mediation,[19] 비밀을 휴전이 협약 클라인 Schnellendorf의 두가지 교전자, 오스트리아는 최종 평화에 대한 대가로 로어 실레지아 인정할 것이다 실레지아(비록 외모 유지)의 적대를 끝낼 것이다라고 하는 b형이야 협상할 것을 동의했다라고 촉구하고efo연말을 [49]고하다그 후 네이페르그의 오스트리아군은 서방의 침략자들로부터 오스트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실레시아로부터 소환되어 11월 초 위장 포위 후 네이세스를 버리고 실레시아 전역을 프러시아의 지배하에 두었다.[50][51][52]
1741-42년 보헤미아-모라비아 전역
10월 중순 바이에른의 찰스 알베르트와 그의 프랑스 동맹국들은 비엔나 근방에 진을 치고 포위할 준비를 하였으나 작센과 프로이센이 역시 주장했던 보헤미아의 일부를 점령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19]프랑스인들은 또한 오스트리아가 파괴되기 보다는 감소하는 것을 보기를 바라면서 비엔나에 대한 결정적인 움직임을 비난했다.[53]그래서 10월 24일, 그들의 군대는 대신 프라하로 진격하기 위해 북쪽으로 향했다.바이에른, 프랑스, 색슨 군대는 11월에 집결하여 그것을 포위하고 결국 11월 26일에 폭격을 가했다; 찰스 앨버트는 12월 7일에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포했다.[19]한편 11월 초 프레드릭은 작센의 프레드릭 아우구스투스와 프러시아 실레시아와 작센 모라비아의 경계선을 협상하였고,[54] 글라츠 보헤미안 군과 함께 실레시아 전역을 압류한 것에 대해서도 프랑스와 바이에른의 지지를 확보하였다.[55]
프랑코-바바바리아 동맹국들이 영토적 이득을 얻자 프레데릭은 프로이센이 궁극적인 평화협정에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자국의 기밀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면서 클라인 슈넬렌도르프 협정을 거부했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로 남하하는 장군에게 합류했다.<[56] 12월 슈베린의 군대는 수데테스를 거쳐 모라비아로 진격하여 12월 27일 올무츠에서 수도를 점령하였고, 레오폴드 왕자의 군대는 보헤미아 가장자리에 있는 글라츠에서 요새를 포위하였다.[55]1742년 1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제국 선거가 열렸는데, 그곳에서 바이에른 엘렉터 찰스 알베르트가 차기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었다.[57]
1742년 초 프레데릭은 작센족과 프랑스인과 함께 모라비아를 통해 비엔나를 향해 공동 진격을 조직하였는데, 이 진격은 2월 5일 위샤우에서 그들의 군대가 만난 후 시작되었다.그러나 프랑스군은 마지못해 비협조적인 동맹국임을 증명했고, 2월 15일 이글라우를 압류한 후 보헤미아로 철수했다.[58]프러시아인과 작센군은 모라비아에 남아 있는 오스트리아의 주요 거점인 브룬을 향해 진군했으나 실질적인 오스트리아 수비대와 물자 부족으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49]색슨족은 3월 30일 그 노력을 포기하고 보헤미아로 돌아왔는데,[59] 7월 전쟁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60]모라비아 캠페인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61] 4월 5일 프러시아인들은 보헤미아와 상부 실레시아로 후퇴했다.[59]
모라비아의 진격이 무너지자 로레인의 찰스 알렉산더(마리아 테레사의 처남)는 프로이센인들을 해산시키고 프라하를 해방시키기를 바라며 모라비아를 거쳐 보헤미아를 향해 3만명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강화군을 이끌었다.5월 초 프레데릭과 레오폴드 왕자가 이끄는 2만8000명의 프러시아군이 프라하 남동쪽 엘베 평야로 진격해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기동작전을 펼쳤다.[62][63]양군은 지난 5월 17일 샤를르의 오스트리아군이 초투시츠 마을 부근의 레오폴드 왕자의 진영을 공격했을 때 만났는데, 그 결과 발생한 초투시츠 전투는 양측에 상당한 사상자를 내면서 좁은 프러시아의 승리로 끝났다.찰스 왕세자가 초투시츠에서 패한 데 이어 5월 24일 사헤이 전투에서 또 다른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한 직후 프라하를 침략자들의 손에 안전하게 맡기고 오스트리아는 그들을 보헤미아에서 몰아낼 즉각적인 수단이 없었다.[64]
브레슬라우와 베를린 조약
쵸투시츠의 여파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의 별도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했고, 5월 말 브레슬라우에서 두 호전파의 협상단이 다시 만났다.[65]프레데릭은 이제 글래츠 카운티뿐만 아니라 실레시아 전체와 거의 모든 것을 요구했다. 마리아 테레사는 그런 양보를 꺼렸으나, 영국 사절인 힌포드 경은 프러시아와 화해하고 프랑스군에 전력을 집중하라고 그녀를 압박했다.[49]영국 재무부는 프랑스를 약화시킬 수 있는 현금 보조금으로 오스트리아의 전쟁 노력의 상당 부분을 조달해 왔으며, 힌트포드는 마리아 테레사가 실레시아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영국의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위협했다.두 호전성은 결국 제1차 실레시아 전쟁을 종식시킨 브레슬라우 6월 11일 조약에서 합의에 이르렀다.[66]
이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나중에 통합되어 실레시아의 프러시아 지방을 형성하게 될 글라츠의 보헤미안 현과 함께 실레시아의 다수를 프로이센에게 양보하였다.[67]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의 나머지 부분과 테셴의 뒤치족과 야게르난도르프, 트로파우, 네이스의 뒤치족 일부를 포함한 실레시아의 극남쪽 끝의 작은 두 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땅들은 나중에 합쳐져서 오스트리아의 실레시아의 왕관 땅을 이루게 될 것이다.프로이센은 또한 실레시아의 자산에 대해 확보된 오스트리아의 부채의 일부를 떠맡는 것과 더불어 현재 진행 중인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중립을 지키기로 약속했다.이 협정은 공식화되었고 1742년 7월 28일에 서명된 베를린 조약에서 확인되었다.[66]
결과
제1차 실레시아 전쟁은 약 3만 5천 평방 킬로미터(1만 4천 평방 미)의 새로운 영토와 약 백만 개의 새로운 대상들을 확보하여 [60]자원과 위신을 크게 향상시킨 프로이센의 확실한 승리로 끝났다.그러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격화되는 동안 두 차례나 별도의 화해를 함으로써 프레데릭은 님펜부르크 리그에서 오랜 동맹국들을 버리고 외교적 비신뢰성과 이중거래로 명성을 얻었다.[40][49]프로이센이 더 넓은 전쟁에서 제거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다른 전선에서 잃어버린 기반을 되찾기 시작했고, 외교 상황은 오스트리아에 유리하게 전환되었다.[68]
프로이센이 실레시아를 압류한 것도 오스트리아, 작센과의 지속적인 갈등을 보장했다.[69][70]실레시아를 되찾겠다는 마리아 테레사의 결심은 불과 2년 후 제2차 실레시아 전쟁에서 프로이센과 다시 갈등을 빚게 될 것이며, 10년 후에는 제3차 실레시아 전쟁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71] 작센은 향후 두 분쟁에서 모두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 것이다.[72][73]
프로이센
전쟁을 종식시킨 영토 정착에서 프로이센은 프러시아 국가에 상당한 인력과 세금을 기부할 인구밀도가 높고 공업화가 밀집된 지역인 [67]글라츠와 실레시아의 광범위한 새로운 땅을 장악했다.[74][75]합스부르크 왕정에 대한 작은 왕국의 예상치 못한 승리는 바이에른, 작센과 같은 독일의 라이벌들과 차별화되면서 프로이센이 유럽 강국의 지위를 향한 상승의 시작을 알렸다.[76][77]
실레시아의 압류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지속적이고 단호한 적으로 만들었고, 다음 세기에 걸쳐 독일 정치를 지배하게 될 오스트리아와 프루시아의 경쟁은 시작되었다.[78]프로이센의 우세를 부러워하고 프러시아 실레시아의 지리적 지위에 위협을 받은 작센 역시 프로이센에 대한 외교정책을 확고히 돌렸다.[70]그 님펜부르크 동맹(그리고 그것의 반복을 제2차 실레지아의 전쟁)프레데릭의 일방적인 철수와 그의 다음 인식한 프랑스 court,[79]을 화나게 한"배신"(영국과 웨스트민스터의 1756년 협약에 따라 방위 동맹)가속화된 프랑스의 궁극적으로 재배치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외교 혁명. 의1750년대[80]
오스트리아
브레슬라우와 베를린 조약은 합스부르크 왕정의 가장 부유한 지방을 희생시켰고,[76] 더 작은 독일 왕자에게 항복하는 것은 합스부르크 왕정의 위신을 현저히 약화시켰다.[69]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 내에서의 우월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제국 선거에서도 패배했다.오스트리아군은 더욱 단련된 프러시아인들과 자신들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81] 1741년 말 님펜부르크 동맹은 합스부르크 왕정을 재앙으로 위협했다.[82]
그러나 실레시아 극장의 평화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전년도 프랑스인과 바베리안들이 벌어들인 이득을 되돌릴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서방의 침략자들은 1742년 초 다뉴브 계곡으로 밀려났고 작센은 베를린 조약 이후 보헤미아에서 병력을 철수시켜 연말에 오스트리아와 화해했다.[83][67]프라하를 점령한 프랑코-바바바리아군은 고립되고 포위되어 결국 12월에 도시를 포기하게 되었다.[84]1743년 중반까지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의 지배권을 되찾아 라인 강을 건너 알자스로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바이에른을 점령하여 황제 찰스 알베르트를 몰아 프랑크푸르트로 향하게 했다.[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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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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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nnay, David McDowall (1911). . In Chisholm, Hugh (ed.). Encyclopædia Britannica (11th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