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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 루카의 플라톤

Platon of Banja Luka
반자 루카의 플라톤
Bishop Platon (Jovanović).jpg
플라톤 주교 (조바노비치)
거룩한 상형문자
태어난밀리보예 요바노비치
(1874-09-29)1874년 9월 29일
베오그라드, 세르비아 공국
죽은1941년 5월 5일 (1941-05-05) (66)
반자 루카, 크로아티아 독립국
다음에서 존경됨동방 정교회
표준화된2000년 5월 21일, 세르비아 정교회 베오그라드
잔치5월 5일 (오월 22일)

히에로마티르 플라톤 반자 루카 주교(Milivoje Jovanovich 출생, 1874년 9월 29일 ~ 1941년 5월 5일)는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로 1940년부터 1941년 사이에 반자 루카의 주교를 지냈다.그의 임기는 1941년 5월, 우스타셰 운동 추종자들에게 납치, 고문, 살해되면서 끝났다.

플라톤은 고향인 베오그라드에서 신학교를 다녔고 이후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를 졸업했다.1912~1913년 발칸 전쟁제1차 세계대전의 개시 몇 달 동안 모두 왕립 세르비아 군대에서 군목사로 근무했다. 1936년 그는 주교로 임명되었다.2년 후 플라톤은 오흐리드·비톨라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전임자를 비난하고 후기 내 불화를 조장한다고 비난한 후 직위에서 해임되었다.1940년 10월, 그는 반자 루카의 주교직을 맡았다.6개월 후 유고슬라비아는 축국 세력에 의해 침략당하고 점령당했다.반자 루카는 우스타슈가 지배하는 파시스트 인형 국가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의 일부가 되었다.4월 24일, 반자 루카의 우스타셰 위원인 빅토르 구티치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서 태어난 모든 시민들에게 5일 이내에 도시를 떠날 것을 명령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플라톤은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다.5월 4~5일 저녁, 우스타슈에 체포되었다.다음날 밤 그와 또 다른 성직자는 감방에서 잡혀 반자 루카 외곽으로 몰려서 그곳에서 고문을 당하고 살해당했고, 훼손된 시체는 브르바스로 밀려들어갔다.

플라톤의 시신은 5월 23일 브르바스 강둑에서 발견되어 다음 날 표식이 없는 무덤에 묻혔다.그는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NDH에서 살해된 수백 명의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 중 한 명이었다.1973년 반자 루카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 지하실에서 플라톤의 유해를 발굴하고 재해석하였다.1998년 플라톤은 세르비아 정교회에 의해 상형문자의 지위로 격상되었고, 2년 후 시성되었다.그의 잔치는 매년 5월 5일에 거행된다.

전기

초년기

플라톤은 1874년 9월 29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밀리보제 요바노비치(Milivoje Jovanovich)로 태어났다.아버지 일리자는 트레빈제(Trebinje)에서 태어난 직업군인이었고 어머니 젤카(네 소콜로비치)는 포차 출신이었다.그는 베오그라드의 승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브란제에서는 초등교육을, 니슈에서는 중등교육을 마쳤다.1892년 조바노비치는 베오그라드의 보고슬로비자 지역에 있는 세르비아 정교회 신학교에 등록했다.3년 후인 1895년에 그는 수도승 서약을 하고 플라톤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그는 1896년에 신학교를 졸업했다.그는 그 후 집사장로교로 임명되었다.1896년 플라톤은 모스크바 신학아카데미 교육을 계속하기 위해 러시아로 이주했다.[1]그는 1897년에 이 학원에 등록했고, 이반 아크사코프 장학금을 받은 최초의 세르비아인이 되었다.[2]

플라톤은 1901년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에서 학업을 마쳤다.러시아에서 돌아오자 플라톤은 싱셀루스 계급으로 격상되어 그로카 베오그라드 교외의 라지노바크 수도원에 배속되었다.플라톤은 보고슬로비자에 있는 신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것은 거절당했다.대신 그는 알렉산시낙에 있는 신학 학교에 배정되어 1903년에서 1906년 사이에 가르쳤다.1906년에는 자고디나에서 몇 달 동안 신학을 가르쳤다.1906년 플라톤은 신학 교수로 공인되어 원생세포의 지위에 올랐다.1908년에는 세르비아 정교회 총대주교의 가제트 편집 업무를 맡았고, 이듬해에는 아치만드라이트로 격상되었다.1910년 가제트 편집장직에서 해임되었다.[2]

사무직

1912년 11월 발칸 전쟁이 발발한 후 플라톤은 왕립 세르비아군의 모라바 여단에서 군목원으로 복무하기 위해 소환되었다.플라톤은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의 개시 몇 달 동안 군목사로 일했다.그는 1914년 12월 11일 교목에서 해방되어 보고슬로비자에 있는 신학교에서 교직을 재개하는 것을 허락받았다.그는 세르비아가 패배하고 중앙 열강에 점령된 후 왕립 세르비아 군대와 함께 그리스의 코르푸 섬으로 피난하는 것을 거부하며 전쟁 전체를 세르비아에서 보냈다.1918년 말, 중앙 열강들은 패배했다.오스트리아-헝가리가 무너지고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이후 유고슬라비아로 개명)이 발칸의 옛 소유물들을 둘러싸고 세워졌다.1919년, 세르비아 정교회 주교협의회 내에서 정적들의 로비로 인해 플라톤은 강제로 은퇴하여 목공소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게 되었다.몇 달 안에 플라톤은 회계사로서의 직업을 찾는데 성공했다.그는 후에 출판사의 지배인으로 임명되었다.1922년 그의 주요 라이벌 중 한 명이 사망한 후, 플라톤은 주교 평의회에 의해 사제직 복귀를 허가 받았다.그는 이후 라코비카 수도원의 대교구인 동시에 수도원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3]

플래튼은 임명 후 몇 년 만에 자금을 유용하고 배상 없이 직위해제했다는 혐의를 받았다.플라톤은 주교 평의회에 몇 번의 실패한 항소를 제출한 후 교육부 장관에게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원하는 데 실패했다.그 후 그는 플라톤에게 지역 신학교의 교사직을 약속했던 니슈의 주교 도사이트지에게 호소했다.도사이트즈는 이후 교육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플라톤이 신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교육부 내 플래튼의 반대자들은 그의 요청을 무시해 달라는 로비에 성공했다.도사이트지는 이어서 플라톤을 포가노보 수도원의 대수로 임명했다.1930년 총대주교 디미트리제가 사망하면서 오랫동안 총대주교의 후원을 누려온 플라톤의 정적 몇 명이 지위가 강등되었다.1932년 주교회의는 플라톤이 라코비차에서 재임한 데 따른 혐의를 기각했다.1932년 11월 플라톤은 스렘스키 카를로프치의 수도원 인쇄기 관리자로 임명되어 다시 한 번 세르비아 정교회 총대주교 가제트의 편집을 맡겼다.1933년에 그는 리틀 보골주브라는 어린이 신문을 창간했다.이듬해 크루셰돌 수도원의 대수로 임명되었다.[4]

주교 서품

1936년 10월 4일 플라톤은 스렘스키 카를로프치에서 바르나바 총대주교가 주재하는 의식에서 주교로 임명되었다.[5]콩코드 사태 때 플라톤은 '콩코드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와 반대'라는 제목의 팜플렛(세르비안: Primedbe i prigovori na projekat Konkordata)을 썼는데, 이 팜플렛은 익명으로 출판되었다.[a]플라톤이 그 작가라는 사실이 곧 드러나 그와 밀라노 스토자디노비치 총리가 이끄는 왕립 유고슬라비아 정부 사이에 불화를 일으켰다.[7]1937년 7월 19일, 콩코드 채택이 국회에서 표결 전에 상정되어, 줄기를 휘두르는 겐드르맹에 의해 격렬하게 진압된 세르비아 정교회 고위 성직자들이 주도한 거리 시위가 일어났다.[8]플라톤은 소요 기간 동안 겐다르므와 몸싸움을 벌였고, [5]그 기간 동안 주교와 신부 한 명이 살해되었다.[8]언론은 이 폭동을 블러디 리투지(Crvava 리티자)라고 불렀다.[9]7월 23일, 국회는 이 법안을 승인했다.그럼에도 스토자디노비치 주지사는 세르비아 정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콩코드의 이행을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10]몇 시간 후 바르나바 총대주교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8]

1938년 6월 22일, 주교회의는 플라톤을 오흐리드·비톨라의 공석인 에파정부로 선출했다.플라톤은 마케도니아 남서부에 도착한 후, 자신의 교구 사제들이 그들끼리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1939년 12월 19일, 성 니콜라스잔치를 기념하는 예배 중, 플라톤은 전임자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고, 교구 내의 분열과 불만을 부추긴 것에 대해 그를 꾸짖었다.이 발언은 논란이 되었고 주교회의는 플라톤이 주교회의 앞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걸할 것을 요구하면서 플라톤의 전임자의 편을 들었다.플라톤은 낙오될 가망성에 직면하여 마지못해 의무를 다했다.[5]종교부는 그가 강제로 은퇴하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주교회의는 플라톤을 반자 루카(Banja Luka) 에파제로 이양하기로 결정했다.그의 반대자들이 그의 도착에 항의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플라톤은 예고 없이 반자 루카에 도착했다.1940년 10월 1일, 정식 즉위식을 거치지 않고 반자 루카 주교의 자리에 올랐다.앞으로 성직자들이 정식으로 임명되지 않고 주교직을 맡는 것을 막기 위해, 비록 플라톤은 그의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주교회의는 곧 그러한 관행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11]

죽음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의 축 침공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독립국(크로아티아어:안테 파벨리치의 지도하에 파시스트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 우스타셰 운동이 지배하는 괴뢰 국가네자비스나 드라바 흐르바츠카; NDH.거의 즉시, 우스타슈는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을 겨냥한 인종법 시행에 착수했다.이 운동의 주요 대상은 세르비아계 세르비아인들이었는데, 세르비아계에서는 경찰의 잔혹성, 정치적 암살, 유권자 탄압, 정치 권력의 중앙집권화 등을 이유로 우스타셰가 분개하고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 인구의 한계화를 집단적으로 비난했다.[12]NDH 설립 직후 빅토르 구티치가 우스타셰 위원(크로아티아어:스토에르닉)은 반자 루카 시를 위한 것이다.[13]구티치는 신속하게 일련의 반-세르브와 반유대주의 조치를 실행했다.공공 부문에서 일하는 모든 세르비아인, 유대인, 그리고 "국가의 적"들은 그들의 고용이 종료되었고 그들의 직업은 충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들에게 할당되었다.또한 세르비아인들과 유대인들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들과 같은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구티치는 4월 24일 '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서 태어났거나 그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모든 개인은 5일 이내에 반자 루카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14]

플라톤은 자신이 결정한 반세르브 조치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구티치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했으며, 가능하다면 특정 세르비아인에 대한 추방 시한을 연기하도록 설득하기로 했다.플라톤은 클루치 마을의 사제인 두샨 마치치를 그의 중개인으로 선택했다.마치키치와 구티치는 4월 27일에 만났다.구티치는 이 자리에서 우스타슈가 시행하고 있는 반세르브 조치를 '너희 세르비아인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설명했지만 추방 시기를 열흘 늦추기로 합의했다.[15]구티치는 이들의 대화에 이어 마치키치가 추방될 예정이었다는 점에서 뜻하지 않게 플래턴의 후임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마치치는 자신이 플라톤에 뒤지지 않는다고 불평했지만 구티치는 플라톤의 부주교 사바가 몬테네그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역시 추방될 것이라고 추론하며 주장했다.마치치는 마지못해 그 임명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지역 성직자들의 많은 분노를 자아낸 결정이었다.며칠 후, 현지 신문들은 마치키치가 플라톤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는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시민들은 마치키치의 집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마치키치에게 그들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대신해서 개입해 달라고 간청했다.[16]

비록 세르비아에서 태어났지만, 플라톤은 그의 교구를 떠나기를 거부했다.5월 1일, 그는 구티치에게 후자의 훈령과 관계없이 "양떼를 버리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다.그는 5월 4~5일 밤 우스타시에 의해 체포되었다.[17]그날 밤 체포된 많은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들도 있었다.플라톤은 블랙 하우스로 알려진 합스부르크 시대의 감옥에 감금되었다.[16]두샨 그라디슈카의 성공회 학장은 그의 감방 동료였다.[18]5월 5일 저녁 플라톤과 두샨은 구티치의 경호원 중 한 명인 아심 젤리치가 감방에서 데리고 나왔다.[19]제일리치는 또 다른 두 명의 우스타슈인 미르코 코바체비치, 니노 콘드리치와 함께 두 명의 성직자를 강제로 차 뒷좌석에 태워 시내에서 쫓아냈다.[17]그들은 이어서 르브로바크 마을 근처의 브르바스 둑으로 끌려갔다.[20]젤리치, 코바체비치, 콘드리치가 먼저 두 성직자를 물리쳤다.플라톤의 턱수염은 그 뒤에 벗겨지고 눈은 움푹 꺼지고 코와 귀는 잘려 나갔다.칼로 살의 파편을 제거하고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17]그러자 뜨거운 쇠막대기가 그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21]플라톤은 머리에 총을 맞고 결국 굴복했다.[18]그는 66세였다.[22]두샨은 비슷한 방식으로 살해되었다.두 성직자의 시체는 그 후 브르바에 밀려 들어갔다.5월 23일, 브르바스 강둑에서 플랫의 훼손된 시체가 발견되었다.[18]

레거시

세인트 플라톤의 아이콘

마치치는 중개인을 통해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민간인들을 설득해 플라톤의 시신을 매장했다.[16]5월 24일, 그의 시신은 반자 루카에 있는 군사 묘지에 의식 없이 묻혔다.그의 묘지 위에 놓인 십자가는 표시가 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23]NDH의 세르비아 정교회 주교 10명 중 플라톤을 포함해 3명이 사망했다.[24][b]NDH에 있는 세르비아 정교회 9개 교구가 소멸되었고, 벨리콘자에 따르면 세르비아 정교회는 괴뢰 국가 내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27]벨리콘자는 1941년 4월 NDH에 577명의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 승려, 기타 종교계 고위 인사들이 있었다고 말한다.12월이 되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벨리콘자는 "214년에서 217년 사이 독일 점령 세르비아로 추방된 334명, 자진 탈주 18명, 체포 3명, 자연사 5명"이라고 썼다.[27]모제스는 NDH에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187명의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들과 30명의 승려들이 살해되었다고 말한다.게다가 수백 명의 성직자들이 유배되었다.[24]스텔라 알렉산더는 3명의 주교와 214명의 성직자에게 사망자를 냈다.[28]역사학자 조조 토마세비치는 1941년 5월부터 12월 사이에만 약 150명의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들이 살해되었다고 쓰고 있다.[25]

1944년 10월, 일리치는 반항적인 이유를 들어 크로아티아 내무반장 블라디미르 메티코시의 명령에 교수형에 처해졌다.[29]유고슬라비아 국가위원회가 실시한 전후 조사 결과 플라톤의 살인은 구티치의 명령으로 판명되었다.[30]1945년 NDH가 해체되자 구티치는 이탈리아로 피신했다.이후 그는 연합군에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로 송환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반역, 협력, 전쟁 범죄, 반인륜 범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그는 1947년 2월에 모든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 달 말에 교수형에 처해졌다.[31]

1973년 7월 1일 전쟁 중 우스타슈에 의해 역동적으로 변모하여 최근에야 재건된 반자루카 성 삼위일체 교회 지하실에서 플라톤의 유해를 발굴하고 재해석하였다.1998년 세르비아 정교회는 플라톤을 상형문자의 지위로 격상시켰다.[23]종교학자 디미트리 브래디는 플라톤이 "종교적 신념만큼이나 민족적 연대를 위해 헌신했다"고 주장하며, 1999년 6월 코소보 해방군에 의해 납치, 고문, 살해된 채리톤 신부와 그의 살해는 유사하다고 주장한다.[32]플라톤은 2000년 5월 21일 세르비아 정교회에 의해 시성되었는데, 성 사바 성당에서 우스타슈의 손에서 죽은 몇몇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거행되었다.[33]그의 유해는 곧 성 삼위일체 교회 지하실에서 분리되어 교회 제단석관 안에 유물로 섞여 들어갔다.플라톤의 잔치는 매년 5월 5일에 그의 사망 기념일에 기념된다.[23]역사학자 브제코슬라프 페리카는 1998년 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자그레브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낙전시 대주교논쟁적으로 구타한 데 대한 대응으로 플라톤의 성직자와 다른 성직자들의 성직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33][c]

참고 항목

각주

  1. ^ 콩코드 사태는 스토자디노비치 대통령이 유고슬라비아와 교황청의 합의 조건을 협상하고 싶어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 협정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위를 통제하게 될 것이다.세르비아 정교회는 찬성표를 던진 세르비아 정교회 부대표를 해임하겠다고 위협했다.[6]
  2. ^ 5월 12일, 우스타슈는 사라예보 메트로폴리탄 페타르를 체포했고 곧 그를 살해했다.8월 중순, 그들은 플라슈키-칼로바크의 주교 사바를 체포했다.두 주교 모두 자도브노 강제 수용소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25]페타르가 사망한 정확한 상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18]사바는 산에서 밀려서 죽었다고 한다.[26]자그레브의 주교인 도사이트의 목숨은 독일군이 그를 대신해 개입하면서 막판에 면하게 되었다.[18]고문을 당한 그는 고통스러운 시련 끝에 가까스로 세르비아에 닿았지만 몇 년 후 부상으로 사망했다.[27]
  3. ^ 스테피낙은 전후 유고슬라비아 법원에 의해 우스타슈와 협력한 죄로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다.그는 또한 세르비아인들의 로마 가톨릭교로의 강제 개종에서 역할을 한 것으로 반인륜적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그는 1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형기를 마치기도 전인 1960년에 사망했다.[34]

인용구

  1. ^ 푸조비치 2002 페이지 243.
  2. ^ a b 푸조비치 2002 페이지 244.
  3. ^ 푸조비치 2002, 페이지 245.
  4. ^ 푸조비치 2002 페이지 246.
  5. ^ a b c 푸조비치 2002 페이지 247.
  6. ^ 2004번 레인, 66페이지.
  7. ^ 라멧 2006, 페이지 97.
  8. ^ a b c Adriano & Cingolani 2018, 페이지 144–145.
  9. ^ 페리카 2002, 페이지 17.
  10. ^ 라멧 2006, 페이지 98.
  11. ^ 푸조비치 2002 페이지 248.
  12. ^ 토마세비치 2001, 페이지 402–403.
  13. ^ 둘리치 2011, 페이지 84.
  14. ^ 버골츠 2016, 페이지 67-70.
  15. ^ 둘리치 2005, 페이지 217.
  16. ^ a b c 둘리치 2005, 페이지 218.
  17. ^ a b c 푸조비치 2002, 페이지 248–249.
  18. ^ a b c d e 스토야노비치 2017, 페이지 274.
  19. ^ 골드스타인 2012, 페이지 97.
  20. ^ 루카치 1968, 페이지 94.
  21. ^ 1995년 6월 11일 서쪽.
  22. ^ 고다 2016.
  23. ^ a b c 푸조비치 2002, 페이지 250.
  24. ^ a b 모제즈 2011, 페이지 63-64.
  25. ^ a b 토마세비치 2001, 페이지 398.
  26. ^ 태너 2001, 페이지 151.
  27. ^ a b c 벨리콘자 2003, 페이지 170.
  28. ^ 알렉산더 1987, 페이지 73.
  29. ^ 루카치 1968, 페이지 359.
  30. ^ 스토야노비치 2017, 페이지 274, 노트 21.
  31. ^ 부클리시 & 스토시치 2017, 페이지 21~37.
  32. ^ 브래디 2010, 페이지 435.
  33. ^ a b 페리카 2002, 페이지 177–178.
  34. ^ 폴라드 2014, 페이지 370.

참조

외부 링크

동방 정교회 직함
선행자 오흐리드 비톨라의 주교
1938–1939
비어 있음
다음에 보유하는 제목
클리멘트 트라이코프스키
프레스파와 비톨라의 주교로
선행자 반자루카 주교
1939–1941
비어 있음
다음에 보유하는 제목
바실리예 코스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