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리고

Rodrigo of Castile
로드리고
카스티야 백작
알라바 백작
군림하다850/862-873
전임자포지션 설정됨
장남디에고 로드리게스 뽀샤로스
이슈디에고 로드리게스 뽀샤로스
아버지라미로 1세
어머니페테르나

루더릭(라틴어: 루데리쿠스;는 스페인 이름 로드리고로 더 잘 알려진 873년 10월 4일 – 11월 5일에 사망했으며,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영향력 있는 귀족이었으며, 아마도 카스틸 백작(850/862–873)과 알라바(867/868–870)였을 것이다. 그는 레콘키스타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오르도뇨 1세와 아스투리아스의 왕 알폰소 대왕의 충실한 신하였다. 로드리고는 무어족의 땅을 정복함으로써 카스티야 군의 남쪽 확장을 시작했다.

오리진스

로드리고의 시조는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베리아 무슬림 작가 중에는 카스티야에서 활동하는 오르도뇨 1세의 형제나 처남을 지칭하는 작가도 있고, 루데릭에게 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같은 역할을 맡기는 작가도 있으며, 그 언급은 동일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 때문에 왕실과 가까웠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1] 페르난데스 데 베텐쿠르트는 그를 오르도뇨 1세의 형이자 둘째 부인인 파테르나에 의해 아스투리아스의 라미로 1세의 아들로 두었다.[2] 이것이 사실이었더라면, 로드리고는 카스티야 백작이 되었을 것이고, 라미로와 파테르나가 842년 경까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어린 시절에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것을 있음직하지 않다고 여겼다. 바라우디하고는 1차 소식통의 지지 부족을 이유로 이 같은 해석을 일축했다. 대안적인 재건술은 로드리고를 오르도뇨의 아내 무니아의 형으로 만들 것이다.

카스티야 백작

로드리고는 아랍인들에 의해 알킬라라고 불리는 영역인 왕국의 동쪽 행군(마르카 오리엔탈)의 주지사가 되었고, 이후 카스티야 주가 되었다. 이 지역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방어적 위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성, 즉 카스티요가 생겨났기 때문에 이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3] 로드리고는 전통적으로 850년에 주지사가 되었다고 믿는데, 아마도 오르도뇨의 왕위 추정에 의해서일 것이다. 이들 혼성강국을 도입한 일차적인 이유는 무어족에 대항하는 중요한 전초기지였던 아스투리아스 동부지역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오르도뇨에게는 이러한 소유물들을 그의 친척들과 가급적 직계 가족의 지배하에 두는 것도 중요했다. 그들의 충성심에 대한 보답으로, 이 새로운 계수는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

이러한 임명은 무월라드 바누 카시 부족의 무사 이븐 무사카사위가 이끄는 에미리트 반군에 대한 반란과도 겹쳤다. 무사군은 팜플로나의 이니고 아리스타와 동맹을 맺었으나, 아스투리아인과 가스콘은 알베다 전투에서 그들과 싸웠다. 아스투리아인들은 전투뿐만 아니라 라 리오자에 대한 통제력도 잃었다. 무월라드 반군은 에미리트군이 하시임 ibn 'abd al-Aziz'를 비지어로 임명한 후 모짜랍스와 합류했다. 칼라트라바 모자랍인들은 성을 장악하고 오르도뇨에게 도움을 청했다. 853년 안두하르에서 무어군을 격파하여 대응한 것은 엘 비에조의 가톤 백작이었다. 에미르의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고 에브로 계곡을 점령하며 계속 반격했다. 로드리고를 카스틸레 백작에 임명함으로써 오르도뇨는 로드리고가 칼라트라바에서 가톤이 했던 것을 라 리오자와 에브로 계곡에서 이룰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로드리고의 영역(바둘리아라 불림)은 동쪽의 에브로 강, 서쪽으로는 브라뇨세라, 북쪽으로는 칸타브리아 산맥과 접해 있는 작은 영토에 한정되었고, 그 중 남쪽으로는 메린다드 드 로사와 발레토발리나가 가장 큰 요새였다.[4] 로드리고를 카운트로서 가장 일찍 문서화한 것은 852년부터 시작된 산 마르틴 데 페란트(부르고스 에란)의 건국헌장이었지만, 지금은 이것이 위조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의 이름으로 853–862년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헌장들이 있지만,[5] 확실한 연대를 할 수 있는 가장 이른 헌장은 862년이다.

레크키스타도르

로드리고는 재위 초기부터 레콘키스타에서 활약했다. 854년 카스티야 병사들이 하로 포획에 참여했고, 조금 뒤 세레조 리오 티론, 카리아스, 그라뇨에서 이슬람 요새를 포획했다. 한편 오르도뇨 1세와 로드리고는 회교 국경에 새로운 요새를 대대적으로 건설했으며, 그 중에는 프리아스란타론도 있었다.[4]

로드리고 백작이 레콘키스타에 직접 참가했다는 첫 증거는 859년 몬테 라투르스 전투의 참가자들 중 한 명이다.[6] 그 속에서 오르도뇨가 지휘하는 아스투리아-팜플로나의 가르시아 이니게르스가 지휘하는 연합 아스투리아스-팜플로나군은 아스투리아스와 팸플로나 국경의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무사 이븐 무사 군대를 격파했다. 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이슬람교 사상자 수는 1만 명에서 2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사 자신은 중상을 입었고, 862년 사망할 때까지 기독교인 반대 운동을 하지 않았다. 알벨다는 무슬림과 기독교 국경지대의 주요 무어 요새 중 하나로서 파괴되었다.[7]

페냐 아마야, 칸타브리아 두키아의 고대 수도.

무사(Musa)가 죽자 아들 럽(톨레도를 물려받은)이 오르도뇨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기독교인들은 두에로의 사막으로 알려진 지역을 다시 채집하고 이전에 무슬림 통치 하에 있던 기독교 주요 도시들의 환영을 받으며 평화적으로 남쪽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재생산 노력은 대부분 성직자들이 주도했지만, 로드리고는 860년 아마야를 재생산하면서 오르도뇨의 레포블라시온에도 참여하였다.[8][9] 아마야는 한때 타리크 이븐 지야드에 의해 711-712년에 정복된 톨레도 왕국 중 8개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에 "애국적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타릭의 정복 이후 비어 있었다.

로드리고의 아마야 재건

로드리고의 재 셋틀러 중 상당 부분은 코르도바 에미리트에서 박해를 받고 아스투리아스로 도망친 모짜랍스였다. 아마야를 정착시킨 로드리고는 카스티일이 남쪽으로 확장될 것을 준비했다.[10] 로드리고는 새로운 국경을 따라 요새를 건설했다. 이것이 우르벨 델 카스티요, 카스티야 피네스, 모라딜로 드 세나도( 부르고스 인), 빌라프란카 몬테스오카 등의 근대 자치체들의 기반이 되었다.[4]

863년 로드리고 백작은 코르도반족이 소유한 소모시에라를 포획하여 약탈하였다.[10] 카스티야인들은 탈라망카 자라마의 요새를 점령하고 포로로 잡았으나 곧 현지의 왈리 무르주크 부부를 풀어주었다.[11] 동시에 오르도뇨는 코리아를 황폐화시켰다.[7] 한 연대기는 863년에 '오르도뇨의 형제'가 이슬람 군대와 싸웠다고 말한다.

밀리터리 패인즈

로드리고의 승리는 코르도바의 무함마드 1세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그해 무함마드의 명령에 따라 아들 압드 아르 라만과 지휘관 압드 알 말리크 이븐 압바스가 알라바와 카스틸레로 가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국경지대를 황폐화하여 여러 요새를 파괴하고 많은 민간인을 죽였다. 로드리고 백작은 판코르보 근처의 협곡을 막으며 무어족을 저지하려 했으나 압드 아르라만과 압드 알 말리크는 간신히 카스티야인들에게 중패를 가할 수 있었다. 스페인 이슬람 역사학자 이븐 이다리보트에 따르면 전투와 퇴각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19개의 계수를 포함해 큰 손실을 입었다. 로드리고를 포함한 소수의 카스티야인만.[12]

865년 다시 압드 아르라만과 압드 알 말리크가 이끄는 2만 명의 무어 군대가 로드리고의 영역을 침범했다. 무어족은 863년 선거 운동 후 살아남은 카스티야 국경 요새를 점령했는데, 일부 역사가들이 부르고스와 동일시하고 있는 군디살보 백작(또는 곤살로) 소속 보르지아(Bordjia)가 있었다.[13] 이후 압드 아르라흐만과 압드 알 말리크는 아냐나 인근 모르쿠에라 전투에서 카스티야 백작에게 새로운 패배를 안겼다. 기독교 병사들이 무슬림들을 가장 먼저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후퇴했고 대부분 퇴각 중에 죽었다. 무어인들은 판코르보, 세레소리오 티론, 이브리요스, 그라뇨의 요새에 있는 무슬림 성전들을 떠나 코르도바로 돌아왔다. 이러한 패배는 카스티야와 알라바를 매우 약화시켰고, 866년 압드 아라만이 다시 로드리고의 땅을 공격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저항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역사학자 알 알라티라에 따르면 필요한 병력조차 모으지 못했다고 한다.[4] 로드리고의 성들과 카스틸레에 있는 다른 귀족들의 성들을 무어인이 자른 것은 그 지역의 재포집과 재포집하는 과정을 중단시켰다.

867년 무함마드 1세의 또 다른 아들인 알 하캄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로드리고 백작의 영지를 다시 습격했다. 같은 해, 코르도반족은 10년 반 동안 지속된 심각한 내부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로써 로드리고 휘하의 카스티야인들은 라 부레바, 판코보(870년),[14] 세레소 데 리오 티론의 요새를 다시 장악할 수 있었고, 알라비아인들은 셀로리오리를 점령했다.[15]

내부 충돌

오르도뇨 왕은 866년 5월 27일 당시 18세 정도였던 아스투리아스의 장남 알폰소 3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당시 알폰소는 산티아고 데 컴포스텔라에 있었다. 거의 즉시 루고프루엘라 베르무데즈 백작이 이끄는 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Fruela는 아스투리아 수도인 Ovedo를 점령하고 왕으로 임명되었다. 알폰소는 전복되어 카스티야로 피신했다. 로드리고 백작은 성탄절에 오비에도에서 왕위에 오른 젊은 군주를 지원하기 위해 재빨리 군대를 일으켜 아스투리아스 왕국으로 들어갔다.[16] 로드리고는 대관식에 참석했고 왕국의 다른 모든 영주들처럼 충성을 맹세했다.[15] 왕에 대한 그의 봉사로, 로드리고는 알폰소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 중 한 명이 되었다.[5]

로드리고는 866/867년의 겨울 동안 오비에도에 머물렀지만, 무어 침입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카스티야로 돌아와야 했다. 867년에서 868년 사이에 바스크의 거인 엘글리온의 알라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역사적 소식통들은 로드리고가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보고하지 않지만, 868년 말까지 반군들은 로드리고가 칼을 뽑지 않아도 왕과 화해했다고 증언한다.[15] 이 공로로 로드리고는 알라바를 세게 되었다. 로드리고는 사라신 무녜스라는 사람을 알바의 알칼드로 임명했다. 그는 벨라 히메네즈가 카운트로 기록될 때까지 그 카운티를 통치했다. 알라바 백작이 아닐 때에도 로드리고는 그 카운티의 많은 소유물들을 통제했다.[15]

로드리고는 873년 4월 18일자 문서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며, 같은[15][17] 해 10월 4일이나 11월 5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를 이어 사망했다고 한다. 이것은 왕의 승인과 함께 일어났으며, 아스투리아스에서 백작이 자신의 소유물을 물려받은 첫 번째 사례다.[18]

레거시

로드리고가 카스틸레의 개국 가능성 있는 숫자만큼의 역할로 인해 그의 실제 활동이 확대되었고, 위조된 헌장들이 그의 카운티에서의 통치를 신뢰성 있게 추적할 수 있는 것보다 10년 일찍 밀어냈다. 이 과정은 또한 자신과 아들의 중복을 초래하기도 하였는데, 앞서 계산한 로드리고(아우렐리우스베르무도 1세의 형)와 디에고의 발명의 형태로도 이어졌다.[19] 그는 적들의 약점을 이용, 자신의 방어를 재편성했던 크리스텐돔의 방패로 기억되고 있다. 카스티야 군을 결성하고 나서 그 군을 확장하여 여러 요새와 아마야 성을 추가하였다. 그는 또한 그의 아들 디에고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전해진 그의 나라를 위한 권리를 확보했고, 미래 세대들에게 카스티일의 중요성을 보장했다.

메모들

  1. ^

    DCCCCª 시대의 팩타 카르타, 카스텔라의 로데리코 콤마이트. (900년대의 샤르트르, 로드리고 통치, 카스틸레 카운트) 산 밀란 데 라 코골라의 헌장집

    .

참조

  1. ^ 마르티네스 디즈 2004, 157페이지
  2. ^ 레 노블레스 에스파뇰스 모옌 아게, 파 마리클로드 게르베트, 아르망 콜린, 페이지 12.
  3. ^ 레 노블레스 에스파뇰스 모옌 아게, 파 마리클로드 게르베트, 아르망 콜린, 페이지 14.
  4. ^ a b c d "Historia del Condado de Castilla. Capítulo III. Rodrigo, el primer conde Castilla (850—873) (I)" (in Spanish). Bardulia.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8 August 2012. Retrieved 22 September 2011.
  5. ^ a b 마르티네스 디에즈 2004 페이지 158-159.
  6. ^ "Rodrigo" (in Spanish). Bardulia.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8 August 2012. Retrieved 22 September 2011.
  7. ^ a b 알폰소 3세의 연대기, 26세.
  8. ^ 마르티네스 디에즈 2004 페이지 144.
  9. ^ Anthones Castellanos Segundos, Annales ComposellaniChronicon Burgense에서 860년으로 등재
  10. ^ a b 마르티네스 디에즈 2004페이지 147-148.
  11. ^ 항문 카스텔라노스 프리메라, 863년
  12. ^ 마르티네스 디에즈 2004페이지 148-149.
  13. ^ 마르티네스 디에즈 2004 페이지 152-156.
  14. ^ Rodrígues-Picavea Matilla E. (2000). La corona de Castilla en la Edad Media. AKAL. p. 10. ISBN 978-8446010869.
  15. ^ a b c d e "Historia del Condado de Castilla. Capítulo III. Rodrigo, el primer conde de Castilla (850—873) (II)" (in Spanish). Bardulia.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8 August 2012. Retrieved 22 September 2011.
  16. ^ 항문 카스텔라노스 프리메라, 866년
  17. ^ 크로니카 나이렌시스는 그것을 10월 5일에 둔다.
  18. ^ "Historia del Condado de Castilla. Capítulo IV. El Condado de Castilla bajo Diego Rodrígues (873 – c. 885)" (in Spanish). Bardulia.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8 August 2012. Retrieved 22 September 2011.
  19. ^ 마르티네스 디즈 2004 페이지 136.

원천

  • 바라우 디히고, L. 레커셔스 정치학 두 로이아움 아스튀리엔(718-910) 히스파니크 레뷔. 52: 1-360 (1921).
  • Martínez Díez, Gonzalo (2004). El Condado de Castilla (711-1038). La historia frente a la leyenda (in Spanish). Valladolid: Junta de Castilla y León. ISBN 84-9718-275-8.
  • 페레스 데 우르벨, 저스토. "로스 프리메로스 시글로스 데 라 레콘퀴스타(아뇨스 711-1038)"는 크리스찬라(Espaigna Christiana)의 "로스 프리메로스 데 라 레콘퀴스타(Angos 711-1038). Comienzo de la Reconquista (711-1038), 히스토리아에스파냐[dirigida por Don Ramon Menndes Pidal] (1964), 204–210.
로드리고
사망: 8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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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867–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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