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준(아미르 알우마라)

Tuzun (amir al-umara)

Abu'l-Wafa Tuzun[1] 처음에 이란의 통치자 Mardavij ibn Ziyar와 그 후에 Abbasid Caliphate를 섬긴 터키 군인이다.아바스 군대의 지도자로 승진한 그는 943년 5월 31일 바그다드에서 함다니드 나시르 알-다울라를 축출하고 아미르 알-우마라로 취임하여 칼리프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그는 바그다드와 그와 함께 압바스 칼리프 왕국이 바이아족의 지배하에 놓이기 몇 달 전인 945년 8월 사망할 때까지 이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초기 경력

투준은 터키의 노예 군인 (굴람 또는 맘루크)으로, 처음에는 이란의 자치 통치자 마르다비지 이븐 지야르를 섬겼다.935년 마르다비즈가 암살된 후, 그의 많은 병사들은 와싯강력한 압바스 통치자 이븐 라익 밑에서 복무하기 위해 떠났다.그들의 지원으로, 936년 이븐 라이크는 아미르[2]우마라라는 칭호 아래 남은 칼리프의 효율적인 통치권을 넘겨받으려는 칼리프라디의 초대를 받아냈다.이븐 라이크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오래된 칼리팔 군대의 해체였고, 그의 터키 군대는 칼리프와 그의 궁정의 지배권을 위한 투쟁의 주요 동력 요소들 중 하나로 남겨졌고, 이 투쟁은 곧 자지라 왕가의 함다니드바스라[3]바리디스 같은 야심찬 이웃 세력들을 끌어들였다.이 복잡한 싸움에서 이븐 라익은 938년 바즈캄에 의해 폐위되었는데, 바즈캄은 투준과 같이 한때 마르다비즈를 섬겼으며 그와 함께 서부로 왔다.이븐 라익은 941년 바지캄이 죽은 후 그의 지위를 되찾았으나 이듬해 암살되고 함다니드의 에미르 나시르 알-다울라[1][4]의해 대체되었다.

9-10세기 이라크 지도

이 기간 동안 투쥔은 활발한 역할을 했다.941년 초 바리디스족이 바그다드로 이동했을 때 그는 바리디스족과 누쉬타킨족과 함께 바즈캄족으로부터 그들과 맞서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마드하르에서 전투가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바그다드 군대와 맞섰지만, 결국 투준과 누슈타킨이 승리하여 바리디스 [5]가문을 패배시켰다.그러나 바지캄은 4월 21일 쿠르드족 산적에 의해 살해됐고 혼란이 뒤따랐다.칼리프 알 무타키는 자신의 지도자를 임명했지만 곧 바리디 지도자 아부 압달라 알 바리디를 임명해야 했고, 그는 군대의 반란으로 인해 데일람 지도자인 쿠란키즈가 아미르 알우마라로 임명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6]한편 바지캄이 죽은 후 투준, 누쉬타킨, 카즈카지와 몇몇 터키 군 지도자는 처음에는 모술로 가서 나시르 알-다울라의 고용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는 그들을 돌려보냈다.그 결과, 그들은 이븐 라이크에게 의지했고, 그는 그의 예전 자리를 되찾기 위해 기회를 이용했다([7]9월 23일).그러나 11월 투준과 다른 터키 지도자들은 이븐 라익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바리디 왕가로 그를 버렸다.942년 3월 7일 바리디군은 바그다드로 진격하기 위해 싸웠고, 이븐 라이크와 칼리프는 함다니드의 도움을 [8]구하기 위해 북쪽으로 철수했다.수도의 주인이 된 바리디 가문의 우두머리 아부엘 후사인은 투준을 티그리스 강을 건너 도시 동부의 사히브 알슈르타로 임명했다.그러나 바리디의 통치는 곧 인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규율 없는 데일라민족의 약탈은 급격한 가격 상승과 숨막히는 세금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투준과 다른 터키인들은 아부엘후사인을 점령하려고 공모했지만 누쉬타킨에게 배신당했고, 바리디스의 궁전에 대한 그의 공격은 경고받은 데일람파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투쥔은 바그다드를 버리고 많은 터키인들과 함께 북쪽으로 [9]모술까지 행군했다.이러한 이탈에 힘입어 함다니드족은 바그다드로 남진했지만 바리디스족은 이를 포기했다.그 후 함다니드에 의한 이븐 라익의 살해(942년 4월 11일)와 며칠 후 나시르 알-다울라가 아미르 알-우마라 지위에 올랐다.투쥔은 차례로 강 [10]양쪽의 수도 사히브 알슈르타라는 직책을 받았다.

그러나 바리디 가문은 와시트에 있는 그들의 기지에서 함다니드 지위에 계속 도전했고, 투준은 그의 세이프 알-다울라의 라캅으로 더 잘 알려진 나시르 알-다울라의 형제 알리 휘하에서 그들에게 보내진 군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942년 8월 16일부터 19일까지 알 마다인 근처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함다니드와 터키군은 바리디스를 격퇴했고, 바리디스는 그들의 원래 근거지인 바스라를 위해 [11]바리디스를 버렸다.Sayf al-Dawla는 와시트를 점령했지만, 943년 봄까지 터키군과 그 지도자들, 주로 Tuzun과 Khajkhaj는 급여의 지연으로 인해 안절부절못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반면 Sayf al-Dawla는 그의 동생인 Sayf al-Dawla가 시리아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그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결국 943년 5월 7일 밤 터키군은 Sayf al-Dawla의 야영지를 공격하여 불을 질렀다.함다니드는 사막을 통해 바그다드로 탈출할 수 있었고, 와싯에서는 터키 장교들이 투준을 그들의 우두머리(아미르)로 칭송하며 고대 페르시아 풍습에 따라 머틀과 약초를 가져다 주었고, 카지카지는 총사령관(ispahsalar)[12]이 되었다.

칼리프 제국의 지도자

바리디스는 와시트에 대한 반역을 시작하며 투준에게 사절을 보내 바그다드로 진군할 것을 촉구하고 와시트에서 세금 농사를 지을 권리를 요구했다.투쥔은 애매한 대답을 했지만, 그의 스파이들은 곧 카즈카지가 바리디스 강으로 탈영할 계획이라고 그에게 알렸다.5월 20일 투쥔은 그의 신하들과 함께 침대에서 카즈카지를 놀라게 하고 그를 [13]붙잡아 눈을 멀게 했다.투쥔은 와싯을 지키기 위해 카이할라흐 휘하에 300명의 병사들을 남겨두고 바그다드로 행진했다.그곳에서 Sayf al-Dawla는 칼리프에게 저항할 것을 약속했지만, 터키군이 다가오자 함다니드와 그의 부하들은 북쪽으로 도망쳤고, 6월 3일, 투쥔은 수도로 들어가 [14]칼리프에 의해 아미르 알-우마라로 명명되었다.

투쥔의 첫 번째 행동은 와싯에 맞서 남쪽으로 진군하는 것이었는데, 카이할라는 바리디의 우위에 부딪혀 포기해야만 했다.남쪽으로 가는 길에 그는 바리디스 가문의 망명자 무함마드 이븐 쉬르자드를 만났고, 그는 그를 개인 비서로 임명했다.[15] 투쥔은 바리디스인들과 평화를 추구했고, 바리디스는 이제 오만의 통치자 유수프 이븐 와지로부터 바스라에 대한 예기치 않은 공격에 직면해야 했다.이 계약은 투준과 아부 압달라 알 바리디의 [16][17]딸 사이의 결혼 동맹으로 체결되었다.그러나 바그다드에서 투준과 바리디스 사이의 평화 소식은 환영받지 못했다. 즉, 재력가인 아부 후세인 이븐 무클라는 투준과 특히 이븐 시르자드를 불신했다.터키인들의 재정적인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자신의 지위를 걱정한 그는 함다니드인들과 접촉했다.나시르 알-다울라의 사촌 아부 압달라 알-후사인이 이끄는 함다니드 군대가 바그다드 하버 게이트 앞에 나타났고, 비저와 칼리프 모두 그에게로 건너가 북쪽으로 모술로 호송되었다.이 사건들을 들은 투쥔은 재빨리 알 바리디에게 와싯의 세금 농사를 허가하고 그의 [18]군대와 함께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투쥔은 함다니드를 따라 북쪽으로 갔고 티크리트 근처에서 벌어진 두 번의 전투에서 세이프 알-다울라를 격파하고 모술을 점령했다.함다니드 형제와 칼리프는 모술을 버리고 니시비스로 향했고, 그곳에서 칼리프와 그의 수행원들은 세이프 알-다울라와 함께 락카로 갔다.944년 5월 26일 투준과 함다니드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고, 나시르 알-다울라는 이라크 중부에 있는 칼리프국의 핵심 영토에 대한 그의 주장을 포기하고, 자지라 왕국과 시리아에 대한 그의 주장을 인정받았다.함다니드는 또한 연간 360만 [19][20]디르함을 바쳐야 했다.한편, 다양한 군벌들의 지배에 분개하고 그의 직책의 독립과 권위를 회복하려고 했던 칼리프 알 무타키는 이집트의 강력하고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 무함마드 이븐 투히드 알-이크시드와 접촉했다.이에 대해 Ikhshid는 시리아 전역에서 캠페인을 시작했고 944년 8월 Raqa에서 칼리프를 만나 이집트로 이동하도록 알 무타키를 설득했다.알 무타키는 이를 거부하고 투준의 약속을 믿고 바그다드로 돌아갔다.그러나 칼리프가 수도에 접근하자 투쥔은 그를 만나 눈이 멀게 하고 알 무스타크를 위해 [21][22]물러나게 했다.

945년 8월 그가 사망할 때까지 투쥔은 바그다드에서 지배권을 유지했지만, 그의 지위는 새로운 권력, 특히 아흐마드 이븐 부야의 야망에 의해 점점 더 위협받고 있었다.944년 바그다드에 대한 첫 번째 부이드의 공격은 격퇴되었지만, 투준의 죽음 이후, 무함마드 이븐 시르자드는 그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946년 1월 17일 아마드는 새로운 아미르 알 우마라이자 칼리프 왕국의 [23]지배자로서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레퍼런스

  1. ^ a b 2003년 도노휴, 9페이지
  2. ^ 케네디 2004, 195페이지
  3. ^ 케네디 2004, 195쪽, 204쪽
  4. ^ 케네디 2004, 195-196페이지.
  5. ^ Amedroz & Margoliouth 1921, 9페이지
  6. ^ Amedroz & Margoliouth 1921, 9-18페이지.
  7. ^ Amedroz & Margoliouth 1921, 페이지 20-24.
  8. ^ Amedroz & Margoliouth 1921, 페이지 25-26.
  9. ^ Amedroz & Margoliouth 1921, 27-28페이지.
  10. ^ Amedroz & Margoliouth 1921, 28-30페이지.
  11. ^ Amedroz & Margoliouth 1921, 페이지 31-32.
  12. ^ Amedroz & Margoliouth 1921, 페이지 43-46.
  13. ^ Amedroz & Margoliouth 1921, 페이지 46-47.
  14. ^ Amedroz & Margoliouth 1921, 페이지 47-49.
  15. ^ Amedroz & Margoliouth 1921, 페이지 49-50.
  16. ^ 보웬 1928, 382-383페이지
  17. ^ Amedroz & Margoliouth 1921, 페이지 49, 51-52.
  18. ^ Amedroz & Margoliouth 1921, 페이지 52-54.
  19. ^ 케네디 2004, 페이지 270
  20. ^ Amedroz & Margoliouth 1921, 페이지 54-55.
  21. ^ 케네디 2004, 페이지 196, 312
  22. ^ 바차라크 2006, 페이지 55-56
  23. ^ 2004년 케네디, 페이지 196, 214~215

참고 문헌

선행 압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아미르 알우마라
943년 5월 31일~945년 8월
에 의해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