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S 셀프리지(DD-357)
USS Selfridge (DD-357)USS 셀프리지(DD-357)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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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
빌더 | 뉴욕조선공사 |
눕다 | 1933년 12월 18일 |
시작됨 | 1936년 4월 18일 |
커미셔닝됨 | 1936년 11월 25일 |
해체됨 | 1945년 10월 15일 |
스트리킨 | 1945년 11월 1일 |
운명 | 1946년 12월 20일 매각, 폐기 |
일반적 특성 | |
클래스 및 유형 | 포터급 구축함 |
변위 | 1,597톤 가득 |
길이 | 381 ft(평방미터 m) |
빔 | 36피트 2인치(11.02m) |
드라우트 | 10피트 5인치(3.18m) |
추진 | 50,000 shp(37,285 kW), 게이터 터빈, 나사 2개 |
속도 | 35노트(65km/h) |
범위 | 6,500nm @ 12노트 (12,000km @ 22km/h) |
보완 | 194 |
무장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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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USS Selfridge(DD-357)는 미국 해군의 포터급 구축함이었다.그녀는 토마스 오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셀리지(1804–1902)와 그의 아들 토마스 O. 셀프리지 주니어(1836–1924).
셀프리지(Selfridge)는 1933년 12월 18일 뉴저지 캠던에 뉴욕조선공사에 의해 함락되었고, 1936년 4월 18일 발사되어 1936년 11월 25일 필라델피아에서 지휘관 H. D. Clarke가 지휘를 맡았다.
셰이크다운
셀프리지호는 1937년 1월과 2월 지중해에서 셰이크다운 유람선을 타고월 카리브해를거쳐 동해안으로 돌아왔다.그녀는 4월부터 8월까지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셰이크다운 후 정비를 받았고 훈련을 실시했다.9월에 대통령 경호 업무는 그녀를 뉴욕의 포킵시에 데려갔고, 10월에 그녀는 파나마 운하 구역과 태평양 전투부대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되면서 버지니아의 노퍽으로 갔다.11월 초 대통령 경호 임무를 위해 노퍽으로 돌아온 그녀는 1937년 12월 9일 서해안으로 다시 출발했다.
진주만
셀프리지호는 파나마 운하를 갈아타고 1937년 12월 13일 디스트로이드 4중대(Des-Ron)의 기함으로 전투부대에 합류한 뒤 22일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도착했다.함대 문제와 훈련을 제외하면 그녀는 이후 2년 동안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머물렀다.1940년, 그녀는 진주만으로 재배치되었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공격 이후까지 작전을 수행했다.그날, 팔미라 섬에서 막 에스코트 주행을 마친 셀프리지호는 X-9 정박지에 계류되었다.[citation needed]폭격 시작 5분도 안 돼 셀프리지의 포성이 일본 항공기에 발포되고 있었다.[citation needed]1300년까지 여러 배의 혼혈 선원에 의해 유인되었고, 그녀는 곧 다른 배들과 합류하여 오아후 해역을 순찰했다.
그 달의 남은 기간 동안 셀프리지가 하와이 지역을 순찰했고 사라토가를 선별하여 웨이크 아일랜드 보강 시도에 참여했다.1942년 1월, 그녀는 그 항공모함이 11일 오아후 남서쪽 약 500마일 지점에 어뢰로 격침될 때까지 사라토가 그룹에서 작전을 계속했다.셀리지가 그 캐리어를 다시 진주만으로 검열했다.하와이 지역의 훈련과 순찰은 1월 20일 광둥섬에서 상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27일 캔턴에 도착한 그녀는 상선이 하역 작업을 마칠 때까지 섬에서 순찰을 돌다가 다시 하와이로 돌아갔다.30일 이동 중 셀프리지 수심이 충전돼 적 잠수함을 파손했을 가능성이 있다.
과달카날
셀프리지호는 1942년 2월 6일 진주만으로 복귀한 뒤 9일 사라토가 영구 수리를 위해 워싱턴 브레머튼으로 호송하기 위해 다시 진행 중이었다.3월 중순, 그녀는 호송차 화면을 통해 하와이로 돌아왔고, 이달 말까지 캔튼으로 더 많은 보급품을 호송했다.4월에는 해병대 인력과 우편물을 싣고 팔미라와 크리스마스 섬으로 이동한 뒤 소사이어티 제도에 있는 보라보라로 이동해 사모안과 통가 단체로 증원군을 실은 호송대와 랑데부하고 호위했다.1942년 5월 21일, 그녀는 후자 그룹을 떠나 뉴헤브리데스와 호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월말까지 해안 에스코트 작업을 시작했다.TF 44로 구성된 그녀는 7월까지 호주 해역에 머물렀다. 그 후 다른 군대와 함께 피지 제도로 가서 감시탑 작전, 과달카날과 툴라기 점령에 대한 예행연습을 했다.
1942년 8월 7일 0120을 얼마 지나지 않아, TF 44는 현재 TG 62.6을 지정해, 과달카날 지역에 도착했다.0620년 셀프리지호는 툴라기 항구로 들어가는 소형 가솔린 운반선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몇 시간 후, 교통수단은 해변 쪽으로 이동했다.1320년 일본군은 고공폭격을 가했다.그 직후, 그들은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을 뒤따랐다.지난 8일에는 셀프리지가 수송기를 계속 검문하고 정오 폭격 후 일본 공군 2명을 태웠다.9일 오전 사보섬 해전 생존자들을 돕고 엘레트와 함께 피해가 심한 호주 순양함 캔버라호와 교전을 벌인 뒤 저녁 무렵에 누메아로 가는 수송선을 호송하기 위해 이 지역을 떠났다.
이 달의 남은 기간 동안, 호주 그룹 (TF 44)은 항공 지원 그룹의 운송업자들을 심사했다.1942년 8월 31일, 이 배들은 브리즈번으로 되돌아갔고, 이후 9개월 동안 셀프리지호는 일본의 모레스비항 상륙을 막고 파푸안 반도로 가는 연합군 선박을 커버하기 위해 코랄해에서 그 힘을 가지고 계속 작전을 수행했다.
벨라 라벨라 전투
1943년 5월 셀프리지호는 3함대에 재배치되었다.12일 누메아에 도착했다.그녀는 여름 내내 TF 36 이후 TF 37 순양함과 함께 활동했고, TF 38, 39, 34의 순양함과 함께 훈련에 참여했다.지난 9월 말 3d함대 수륙양용부대 소속으로 LST 호송차를 타고 벨라 라벨라까지 간 뒤 솔로몬 제도에서 야간 순찰을 시작해 일본 선박을 가로챘다.[citation needed]
1943년 10월 6일 밤, 셀리지, 오바논, 체발리에가 마르콰나 만에서 약 12마일 떨어진 곳에서 육군의 대피를 시도하면서 구축함 6척, 구축함 수송함 3척, 소형 무장함 등의 적군을 요격했다.이어진 벨라 라벨라 전투에서 체발리에는 어뢰를 맞고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됐다.그녀는 지난 7일 미국 어뢰에 의해 침몰했다.셀리지와 오배넌은 둘 다 심하게 손상되었다; 적 어뢰에 의한 셀리지, 적의 행동에 의한 오배논은 체발리어가 물 속에서 죽은 직후에 충돌하여 합쳐졌다.셀리지호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는 13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으며 36명이 실종됐다.
1944
셀프리지의 임시 수리는 푸르비스 베이와 누메아에서 이루어졌다.마레아일랜드 해군 조선소에서 활을 새로 설치하고 총기를 완전히 새로 장전하는 등 영구적인 수리가 이뤄졌으며 샌디에이고에서 재교육한 뒤 1944년 5월 10일 진주만으로 돌아와 마리아나스 제도 침공을 위한 군대와 합류했다.당초 TG 50.11에 배정된 그는 6월 초 마주로에서 고속항공모함 TF 58에 합류했고, 지난 11일에는 괌 상공에서 싹쓸이가 진행되면서 벙커힐을 점검했다.지난 13일 사이판 해안포격에 참여해 목표 섬에서 지뢰제거 작업을 벌인 뒤 야간 사격으로 전환했다.14일에는 소방지원대에 합류했고, 15일에는 돌격대가 사이판에 상륙하면서 수송지역을 선별했다.그때부터 17일까지 주간 심사 활동과 야간 괴롭힘 업무를 번갈아 했다.후일 필리핀에서 일본군이 이동한다는 소식이 돌격대에 도달했고, 셀프리지가 TF 58에 합류해 TG 58.7과 58.3의 연결선으로 자리를 잡았다.지난 19일 필리핀 해전이 격돌했지만 적의 항공기는 한 대도 셀프리지의 총 사정권에 들어오지 않았다.20일과 21일에는 일본군이 서쪽으로 진격했다.셀프리지 측은 지난 24일 사이판 앞바다의 수송 스크린에 다시 합류했고, 26일에는 화재지원 업무를 재개했다.[citation needed]
셀레리지사는 1944년 7월 11일 사이판을 출발했고, 교통편을 선별해 15일 에니웨톡에 도착했다.사흘 뒤 그녀는 다시 괌 공격 지원군을 이끌고 마리아나로 돌아가기 위해 진행 중이었다.그녀는 초동폭행 다음날인 22일 아가트 앞바다에 도착해 이후 3주 동안 검문과 화재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항모와 바지선 순찰을 실시했다.8월 10일, 그녀는 에니웨톡을 향해 항해를 했고, 결국 진주만으로 돌아왔다.8월 21일, 그녀는 대서양으로의 명령을 받았다.
1945
1944년 9월 7일 파나마 운하를 횡단한 셀프리지호는 뉴욕으로건너가 TF65에 합류했고, 이후 동해와 튀니지 사이를 오가는 호송차 대서양 횡단 호위 임무를 시작했다.1945년 4월 23일, 그녀는 USS 이글 56호가 폭발했을 때 메인주 카스코 베이에 있었다.생존자 구조를 도운 후, 그녀는 의심스러운 U보트에 9개의 심층 고소를 취하했다.[1]법원은 당초 이글 56호의 상실을 보일러 폭발로 추정했으나 2001년 U-853에서 어뢰로 수정했다.[2]1945년 5월 독일 함락 이후까지 호위 임무를 계속한 그녀는 6월 7일 뉴욕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마쳤다.카리브해와 메인 해안에서 8월까지 유지와 훈련을 했고, 9월 15일, 그녀는 불활성화에 대비하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다.
1945년 10월 15일, 셀프리지호는 해체를 당했고, 1945년 11월 1일 해군 명단에서 제외되었다가 1947년 10월 폐기되었다.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네 개의 전투 별을 얻었다.
참조
- ^ Helgason, Guðmundur. "The Type IXC/40 boat U-853". German U-boats of WWII - uboat.net. Retrieved 8 January 2017.
- ^ Green, Jack A. (25 April 2003). "Navy Senior Archivist Helps Solve 57 Year Old USS Eagle 56 Mystery". navy.mil. Retrieved 2017-01-08.
이 글에는 공용 도메인에서 온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다.미국 해군 전투함 사전이 항목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