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도너
프란체스카 도너
Franziska Donn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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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2·3대 영부인 | |
임기 |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 |
전임 | (없음) |
후임 | 공덕귀 |
대통령 | 이승만 |
이름 | |
별명 | 이금순, 이부란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00년 6월 15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빈 |
거주지 | 오스트리아 빈(1900~1933)→미국 워싱턴 D.C(1933~1945)→대한민국 서울특별시(1945~1960)→미국 하와이(1960~1965)→오스트리아 빈(1965~1969)→대한민국 서울특별시(1970~1992) |
사망일 | 1992년 3월 19일 | (91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오스트리아 → 대한민국 |
성별 | 여성 |
부모 | 루돌프 도너(부),프란치스카 게를하를틀(모) |
배우자 | 헬무트 뵈룅(1920 - 1923, 이혼) 이승만(1934 - 1965) |
자녀 | 양자 이강석(사망), 양자 이인수,양자 이봉수(사망) |
종교 | 개신교(감리교) |
프란체스카 도너(독일어: Franziska Donner 프란치스카 도너[*], 영어: Francesca Donner Rhee, 1900년 6월 15일~1992년 3월 19일)는 대한민국의 제1, 2, 3대 대통령 이승만의 두 번째 부인으로 한국명 이금순 또는 이부란이었다. 이승만과 결혼 전 이혼했고, 1931년 빈 회의에 참석차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이승만과 만났다가 그와 재혼하였다.
1960년 이승만의 사임 이후 함께 하와이에 가서 생활하다 이승만 사후에는 모국인 오스트리아에 있다가 1970년 대한민국 정부의 허가로 귀국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귀화인으로 대한민국의 1번째 대통령 배우자이었다. 한국어 이름은 이부란(李富蘭) 여사이다.
생애
[편집]생애 초반
[편집]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교 가문의[1]의 오스트리아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3명의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들이 없었던 여사의 부친은 영리한 막내딸이 가업을 잇기를 원했고, 부친의 뜻에 따라 영국으로 영어공부를 위한 유학을 떠나 유창한 영어실력을 갖추게 된다. 이 후에 그녀는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하였으나 3년만에 이혼하였다.
이승만과의 결혼
[편집]1934년, 제네바에서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차 방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이승만(李承晩)을 처음 만났고, 모친의 반대에도 재혼을 강행하여 같은 해 10월 8일, 미국 뉴욕시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결혼했다.
이승만에게 프란체스카는 미모와 세련된 매너, 뛰어난 외국어 실력 등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 이승만의 태평양 전쟁을 예고한 명저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는 프란체스카여사의 손끝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때 ‘호주댁(濠洲宅)’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인 교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이 그를 여사라 부르지 않고 ‘호주댁’이라 부른 데에서 비롯한다. 참고로 ‘호주댁’은 그의 출신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이름이 유사한 나라인 오스트레일리아로 와전돼서 붙은 이름이다. 한때는 미국 출신이라는 설도 돌기도 했다.[출처 필요] 이승만은 그에게 직접 이금순, 이부란이라는 한국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한국 입국
[편집]19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돈암장과 이화장에서 거주하다가 이승만은 1948년 5월 30일에는 국회의장에, 8월에는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따라 경무대로 이주하여 살았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을 따라 회의에 참관하였다.
이후 남편 이승만이 제헌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자 대통령 배우자 자격으로 이화장에서 경무대에 입주하였다. 그러나 경무대 입주 직후 남편 이승만을 만나는 방문객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여 보좌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는 해방 직후 남편 이승만을 찾아오던 정치인들 중 안재홍을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대접했다. 결국 안재홍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는 이승만에게 동참했지만, 등을 돌려 1950년 제2대 총선에는 독자적으로 출마하게 된다.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의 비서를 지냈던 최기일에 의하면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찾아온 손님들 중 송필만, 고희동을 무시하였다.
제1공화국 시절
[편집]남편 이승만이 임영신과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자 마자 이유 없이 임영신을 해고하였고, 그 뒤 윤치호의 딸 윤노라가 그녀의 시중을 들다가 이승만의 비서인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와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가 프란체스카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러나 양반 출신의 고고한 이미지의 이은혜를 부담스러워한 반면 가난한 집안 출신이며 평소에 싹싹한 박마리아를 편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박마리아와 그녀의 남편 이기붕이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발탁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박마리아는 그녀의 총애를 자신의 남편 이기붕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이용한다.
청와대의 방문객과 접대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면서 이승만의 보좌관이었던 박용만과 외무장관 장택상 등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장택상은 프란체스카에게 밉보였던 박용만을 특별히 배려하여 그녀의 시선과 멀어지도록 자신의 주변으로 발령시켰다.
1955년 11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2]
생애 후반
[편집]1960년 쇠약해진 이승만을 대신해 여러 정책 문제를 자신이 스스로 처결했다. 얼마 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자진 사임한 후 하와이로 휴양차 출국하자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서거하고 그 뒤로도 하와이에서 거주하다가 외무부 장관이 발급한 특별 여권을 소지하고 오스트리아로 갔다. 이후 친정 동생, 친정 언니의 집을 전전하였다.
1970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정부의 배려로 귀국하였다.[3] 이후 청와대가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되었다. 이후 양자 이인수 내외와 이화장에서 함께 살았다. 만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의 중단에 안장된 남편 이승만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1987년 이승만의 전직 비서였던 윤치영의 구순 기념 논문 봉정식에 참석하였다. 1990년 소피텔 엠배서더 호텔에서 90회 생일 축하연을 했다. 이 때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던 소수 친지들의 방문을 받았다. 1992년 3월 19일 0시경 서울특별시 이화장에서 향년 92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며느리인 조혜자 여사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4][5]
“ | 어머님[6]은 유언으로 세 가지를 부탁했어요. "틀니를 끼워주고 태극기로 나를 덮어달라. 그리고 성경책을 무덤에 꼭 넣어달라."[5] | ” |
사후
[편집]3월 23일 서울 정동제일 감리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의 남편 이승만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가족 관계
[편집]- 아버지 : 루돌프 도너(1863년~1922년)
- 어머니 : 프란치스카 게를하를틀(1869년~1933년 이후)
- 언니 : 2명
- 배우자
- 시아버지 : 이경선(1839년~1912년)
- 시어머니 : 김해김씨 김말란(1833~1896)
저서
[편집]-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 (이승만 연구총서 1)》 (촛불, 2006)
- 《6.25와 이승만 :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학위
[편집]평가
[편집]이승만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정치인 윤치영의 공보비서로 돈암장을 출입했던 최기일은 그를 상당히 인색하고 냉정하다고 평가했다.
최기일에 의하면 그는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이 박사의 생신날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집오리고기, 닭고기, 쇠고기 등 온갖 종류의 귀한 식품들을 가져왔다.[7]' 그러나 '그녀는 남은 음식을 돈암장 직원들과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일부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결국 1주일 후에 음식들이 상했기 때문에 그 전부를 내버려야 했다.[7]'는 것이다.
그는 남북협상, 좌우합작론을 주장하다가 전향하여 이승만을 찾아온 안재홍을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대했다. 이를 본 최기일은 '안재홍 씨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푸대접을 받고 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7]'고 증언한 바 있다. 윤치영과 임영신은 "이박사님이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한국 여성과 산다면 좋을 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한탄하였다 한다.[7]
반면 1947년 이화장 뒷집에 살았던 인연으로 이승만 대통령 일가와 14년간 생활했던 방재옥 씨는 이승만 대통령을 매우 자상한 분, 프란체스카 여사는 매우 알뜰한 여사라고 기억했다.[8]
대중 매체
[편집]갤러리
[편집]-
프란체스카 도너 리의 여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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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프란체스카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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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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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을 하고 있는 프란체스카 여사. 프 여사는 이 대통령은 물론 손자들 옷가지까지 일일이 꿰매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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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프란체스카의 장례식.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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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편집]- ↑ 도너(Donner)는 동유럽 아슈케나지 유대인(Ashkenazic Jew)의 성씨 중의 하나로 밀레트(Millett)
- ↑ "중대서 학위 수여 대통령부인등 육명", 경향신문 1955년 11월 7일자 3면, 정치면
- ↑ 월간조선 2001년 3월호
- ↑ SYNGMAN RHEE라는 금박의 이름이 박힌 영어 성경책이 발견되었을 때, 조혜자 여사가 프란체스카의 유언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 ↑ 가 나 김한수 (2023년 3월 22일). “[김한수의 오마이갓]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이승만 성경’ 속 책갈피 꽂힌 구절”.
- ↑ 프란체스카 여사
- ↑ 가 나 다 라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나무, 2002) 92페이지
- ↑ 李承晩 대통령 내외와 14년간 생활한 方在玉씨 인터뷰
- ↑ 사진 : 마이런 데이비스(Myron Davis)
참고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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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편집]-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 역대 대통령 약력
- 건국회 홈페이지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왕정은 왜 왕따당했나[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겨레21, 2002년06월12일 제413호.
- 대한민국 사랑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