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티아 전쟁
Galatian War갈라티아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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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티아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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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갈라디아인 | 로마 공화국, 페르가뭄 | ||||||
지휘관과 지도자 | |||||||
에피소그나투스 오르기아곤 지오마라 | 그나에우스 만리우스 불소 아탈루스 | ||||||
힘 | |||||||
50,000명 이상의 남자들 | 알려지지 않은 수의 로마인, 2800명의 페르가메스군 |
갈라디아 전쟁은 기원전 189년 동맹국인 페르가뭄에 의해 지원된 갈라티아 가울과 로마 공화국 사이의 전쟁이었다. 전쟁은 중앙아시아 마이너스의 갈라티아에서 오늘날 터키에서 벌어졌다.
로마인들은 방금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시드를 물리쳤고, 그로 인해 그들에게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하도록 강요했다. 최근 시리아에서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한 후, 로마인들은 이후 군사작전이 있기 거의 100년 전에 아시아 마이너로 이민을 간 갈라티아의 갈리아 부족에게 관심을 돌렸다. 집정관 그나에우스 만리우스 벌소는 전쟁 중 갈라티아인들이 셀레우키드족에 군대를 공급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침략을 용서했다. 벌소는 로마 원로원의 허가 없이 이 캠페인에 착수했다. 페르가뭄과 함께 로마인들은 내륙으로 진군하여 갈라티아인들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갈라티아군을 격파하고 앙카라 근방의 더 큰 군대를 격파하여 승리를 좇았다.
이러한 패배로 갈라티아인들은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고 로마인들은 아시아 마이너 해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만리우스 불소는 로마로 돌아왔을 때 셀레우시드와 로마 사이의 평화를 위협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결백하여 원로원으로부터 승리를 얻었다.
서곡
기원전 191년 아시아 셀레우시드 제국의 황제 안티오코스 대왕이 그리스를 침공하였다.[1] 로마인들은 개입하기로 결정했고 그들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셀레우키드족을 격파했다.[2] 로마에 의한 패배로 셀레우치드족은 아시아 마이너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3] 로마인들은 그들을 따라 에게해를 건너고 동맹국인 페르가뭄과 함께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키드족을 결사적으로 격파했다.[4]
셀레우치드 족은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하고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화해하기 시작했다.[5] 봄에는 새로운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벌소가 도착하여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로부터 군대를 장악하였다.[6][7] 그는 스키피오가 주선하고 있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6]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전쟁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연설하고 그들의 승리를 축하한 다음, 아시아 소령의 갈라디아 고을에 대항하여 새로운 전쟁을 제안했다.[7] 그가 침략에 사용한 구실은 갈라티아군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시드 군에 군사를 공급했다는 것이었다.[6][7][8] 침략의 주된 이유는 이웃을 약탈하여 부자가 된 갈라트족의 부를 빼앗고, 스스로 영광을 얻고자 하는 만리우스의 욕망 때문이었다.[8]
이 전쟁은 로마의 장군이 원로원이나 인민의 허가 없이 전쟁을 일으킨 최초의 사건이었다.[6] 이것은 위험한 선례였고 이것은 미래의 본보기가 되었다.[6]
만리우스는 페르가메스를 불러 도움을 주는 것으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7] 그러나 유메네스 2세의 페르가뭄 왕은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섭정을 하던 아우 아탈루스가 페르가메스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7] 며칠 뒤 보병 1000명과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로마군에 입대했다.[7]
내륙으로 행진하다
로마와 페르가메스의 연합군은 에페소스에서 진격을 시작했다.[9] 그들은 마에안데르를 타고 마그네시아를 지나 알라반다 영토로 진격해 그곳에서 아탈루스의 동생이 이끄는 보병 1000명과 300명의 기병대가 만났다.[10] 그 후 안티오키아로 진군하여 안티오코스의 아들 셀레우쿠스를 만나게 되었는데, 셀레우쿠스는 이 조약의 일부로 옥수수를 제공하였다.[10]
그들은 큰 반대 없이 마에안데르 계곡 위와 팜필리아를 거쳐 내륙으로 행진했다.[9] 그러나 그 후 그들은 잔인하기로 유명한 폭군 모아게테스가 통치하는 시브랴 영토로 진격했다.[11] 로마 사절단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폭군은 로마의 동맹국이라 영토를 황폐화시키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고 그들에게 15명의 재능을 주겠다고 약속했다.[11] 사절단은 모아게테스에게 불소의 진영으로 사절단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벌소는 그들이 진영으로 다가갈 때 그들을 만났고 폴리비우스가 쓴 대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모아게테스는 아시아에 있는 모든 왕자들 중 로마에서 가장 단호한 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제국을 전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우정보다는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다."[11]
사절들은 그의 성난 반응에 겁에 질려 집정관에게 폭군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불소는 이에 동의했다.[11] 다음날 폭군은 성에서 나와 벌소에게 열 다섯 달란트를 받아 달라고 간청했다. 벌소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백 달란트를 내지 않고, 그렇게 허락받은 것을 감사하게 여기면 나라를 약탈하지 않고, 성읍을 습격하여 자르리라."[11]
그러나 폭군은 벌소를 설득하여 가격을 100마디로 낮출 수 있었고 밀 1000메디미니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11] 그래서 모아게테스는 그의 도시를 구하는데 성공했다.[11] 집정관이 콜로바투스 강을 건널 때 피시디아의 신다 마을에서 온 대사들을 만났다.[12] 대사들은 의사당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점령한 테르메수스에 대해 지원을 요청했다.[12]
영사는 그 제의에 동의했다. 그는 테르메스 영토에 들어가, 50명의 재능과 신디안 영토에서의 철수를 위해 그의 동맹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12] 불소는 피시디아의 키르마사 시를 점령하고 그것으로 큰 부츠를 점령했다.[13] 그 후 그는 리시노에 성을 점령하고 사갈라수스 시로부터 50명의 재능과 2만 메드니 보리와 밀의 조공을 받았다.[13]
영사는 로트린 스프링스에 닿았고 그는 다시 한번 셀레우쿠스에게 만났다. 셀레우쿠스는 부상당하고 아픈 로마인들을 데리고 아파메아로 갔고 로마인들에게 약간의 안내서를 제공했다.[14] 그들은 샘에서 출발한 후 사흘 동안 행군했고, 사흘째 되는 날 갈라디아 3개 부족 가운데 하나인 토리스토보기족과 국경 지대에 도착했다.[15] 그 영사는 집회를 열고 다가오는 전쟁에 대해 병사들에게 연설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페르가뭄과 친분이 있는 유일한 족장 테케토사기의 족장 에포소게나투스에게 사절을 보냈다.[15] 사절들은 돌아와서, 테르토사기의 족장이 로마인들에게 자신의 영토를 침범하지 말라고 간청했다고 대답했다. 또 다른 족장들의 제출을 강제 시도하겠다고 주장했다.[15]
육군은 내륙 깊숙이 진군하여 큐발룸이라 불리는 갈라시아의 거점 근처에 진을 쳤다.[15] 그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 갈라디아 기병대는 군대의 선발대를 공격하여 상당한 사상자를 냈고, 로마 기병대가 반격하여 갈라디아군을 큰 손실로 몰아붙였다.[15] 영사는 적의 손에 닿는 것을 알고 더욱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15]
올림푸스 산 전투
로마인과 페르가메네스는 고르디움 시에 도착했고, 그 도시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15] 그들이 거기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에포소게아투스가 보낸 전령 한 사람을 만났다. 전령사는 에포소그나투스가 갈라티아인들에게 공격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들이 산 근처에서 머스트링을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15]
톨로스토보기이는 올림푸스 산을 점령했고, 텍토사기와 트로크미는 다른 산으로 갔다.[16] 올림푸스 산에서 갈라티아인들은 도랑과 다른 방어적인 작업으로 스스로를 요새화했다.[17] 처음 이틀 동안 로마인들은 산을 정찰했다. 사흘째 되는 날, 로마인들은 교전꾼들로 갈라디아군의 진지를 공격했다.[18] 로마의 보조 궁수, 슬링거, 창살꾼들은 장갑이 허술한 갈라티아인들에게 큰 손실을 입혔고, 근접전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로마 벨리테스의 우수한 무기와 무기에 의해 극복되었다.[18] 이 전투는 마침내 로마 군단이 그들의 진영을 습격했을 때 갈라디아인들의 학살로 바뀌었다.[19] 갈라디아인들은 그 여파 동안 약 1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약 4만 명을 생포했다.[20]
안시라 전투
올림푸스 산에서 로마가 승리한 후, 텍토사기는 그들에게 공격하지 말라고 간청하고, 그들의 진영과 안시라 중간쯤의 회의를 위해 그를 만나자고 했다.[21] 콘퍼런스의 주된 목적은 테르토사기가 로마군의 공격을 지연시켜 여자와 아이들이 할리스 강을 건너 후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21] 그들의 또 다른 목적은 만리우스가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그를 암살하는 것이었다.[21] 그들이 회의에 가는 동안 로마인들은 갈라디아 기병대가 그들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보았다.[21] 갈라디아군이 뒤따르는 교전에서는 수적 때문에 만리우스의 소규모 기병 호위병을 제압했지만, 로마군 포병대와 동행하던 기병대가 도착하여 갈라디아군을 퇴각시키자 쫓겨났다.[21]
로마인들은 그 다음 이틀을 주변 지역을 정찰하며 보냈고, 사흘째 되는 날 5만 명으로 구성된 갈라디아 군대를 만났다.[22] 로마인들은 그들의 척후병들과 함께 공격함으로써 전투를 시작했다. 다시 갈라디안 사람들은 미사일의 우박에 맞아 죽었고, 그래서 갈라디안 중심부는 군단의 첫 번째 돌격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그들의 진영 방향으로 도망쳤다.[22] 측면은 더 오랫동안 그들의 근거지를 지켰지만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22] 로마인들은 그들을 뒤쫓아 갈라디아 진영을 약탈했다. 살아남은 갈라디아인들은 여자와 아이들, 트로크미족과 합류하기 위해 강을 건너 도망쳤다.[9][23]
여파
이 두 번의 참패는 갈라디아인들이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6][23] 이 캠페인은 갈라디아인들이 아시아 마이너에서의 많은 정복을 통해 많은 부를 모았기 때문에 벌소와 그의 군단을 크게 풍요롭게 했다.[6][23] 갈라디안 사람들은 불소에 사절을 보내어 평화를 청하였으나, 당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에페소스로 급히 돌아가고 있던 불소는 에페소스로 돌아오라고 빌었다.[23]
벌소는 아시아 마이너에서 1년 더 머물렀다.[6] 그 기간 동안 그는 안티오쿠스와[24] 아파메아 조약을 체결하고 아시아 소해안의 땅을 페르가뭄과 로도스로 나누었다.[6][25] 갈라디아 사절이 오자 벌소는 페르가뭄의 에우메네스 2세가 로마에서 돌아오면 그들에게 평화의 조건을 주겠다고 말했다.[26]
불소는 기원전 188년에 로마로의 귀환 여행을 시작했고 기원전 187년에 도착했다.[6]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갈라디아에 대한 무단 전쟁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27] 그러나 그는 결국 논쟁을 이겨내고 원로원으로부터 승리를 얻었다.[28]
인용구
- ^ 리비 35.43 웨이백 기계에 2007-09-29 보관
- ^ 리비 36.19 웨이백 기계에 2008-05-17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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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일차 출처
- 헨리 베티슨이 번역한 리비(1976년). 로마와 지중해. 런던: 펭귄 클래식. ISBN0-14-044318-5.
- Frank W. Walbank가 번역한 Polybius (1979년) 로마 제국의 부흥. 뉴욕: 펭귄 클래식. ISBN 0-14-044362-2
온라인 소스
- Mommsen, Theodor (2004-05-01). "A History of Rome. Vol III". Project Gutenberg. Retrieved 2007-07-16.
- Pennell, Robert (2004-11-01). "Ancient Rome : from the earliest times down to 476 A. D." Project Gutenberg. Retrieved 2007-07-16.
- Smith, William (2006-11-01). "A Smaller History of Rome". Project Gutenberg. Retrieved 2007-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