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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티아 전쟁

Galatian War
갈라티아 전쟁
Asia Minor 188 BCE.jpg
갈라티아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날짜기원전 189년
위치
결과 로마 연합국의 승리
호전성
갈라디아인 로마 공화국,
페르가뭄
지휘관과 지도자
에피소그나투스
오르기아곤
지오마라
그나에우스 만리우스 불소
아탈루스
50,000명 이상의 남자들 알려지지 않은 수의 로마인,
2800명의 페르가메스군

갈라디아 전쟁은 기원전 189년 동맹국인 페르가뭄에 의해 지원된 갈라티아 가울로마 공화국 사이의 전쟁이었다. 전쟁은 중앙아시아 마이너스의 갈라티아에서 오늘날 터키에서 벌어졌다.

로마인들은 방금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시드를 물리쳤고, 그로 인해 그들에게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하도록 강요했다. 최근 시리아에서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한 후, 로마인들은 이후 군사작전이 있기 거의 100년 전에 아시아 마이너로 이민을 간 갈라티아의 갈리아 부족에게 관심을 돌렸다. 집정관 그나에우스 만리우스 벌소는 전쟁 중 갈라티아인들이 셀레우키드족에 군대를 공급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침략을 용서했다. 벌소는 로마 원로원의 허가 없이 이 캠페인에 착수했다. 페르가뭄과 함께 로마인들은 내륙으로 진군하여 갈라티아인들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갈라티아군을 격파하고 앙카라 근방의 더 큰 군대를 격파하여 승리를 좇았다.

이러한 패배로 갈라티아인들은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고 로마인들은 아시아 마이너 해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만리우스 불소는 로마로 돌아왔을 때 셀레우시드와 로마 사이의 평화를 위협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결백하여 원로원으로부터 승리를 얻었다.

서곡

기원전 191년 아시아 셀레우시드 제국의 황제 안티오코스 대왕이 그리스를 침공하였다.[1] 로마인들은 개입하기로 결정했고 그들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셀레우키드족을 격파했다.[2] 로마에 의한 패배로 셀레우치드족은 아시아 마이너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3] 로마인들은 그들을 따라 에게해를 건너고 동맹국인 페르가뭄과 함께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키드족을 결사적으로 격파했다.[4]

셀레우치드 족은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하고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화해하기 시작했다.[5] 봄에는 새로운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벌소가 도착하여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로부터 군대를 장악하였다.[6][7] 그는 스키피오가 주선하고 있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6]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전쟁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연설하고 그들의 승리를 축하한 다음, 아시아 소령갈라디아 고을에 대항하여 새로운 전쟁을 제안했다.[7] 그가 침략에 사용한 구실은 갈라티아군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시드 군에 군사를 공급했다는 것이었다.[6][7][8] 침략의 주된 이유는 이웃을 약탈하여 부자가 된 갈라트족의 부를 빼앗고, 스스로 영광을 얻고자 하는 만리우스의 욕망 때문이었다.[8]

이 전쟁은 로마의 장군이 원로원이나 인민의 허가 없이 전쟁을 일으킨 최초의 사건이었다.[6] 이것은 위험한 선례였고 이것은 미래의 본보기가 되었다.[6]

만리우스는 페르가메스를 불러 도움을 주는 것으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7] 그러나 유메네스 2세의 페르가뭄 왕은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섭정을 하던 아우 아탈루스가 페르가메스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7] 며칠 뒤 보병 1000명과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로마군에 입대했다.[7]

내륙으로 행진하다

로마와 페르가메스의 연합군은 에페소스에서 진격을 시작했다.[9] 그들은 마에안데르를 타고 마그네시아를 지나 알라반다 영토로 진격해 그곳에서 아탈루스의 동생이 이끄는 보병 1000명과 300명의 기병대가 만났다.[10] 그 후 안티오키아로 진군하여 안티오코스의 아들 셀레우쿠스를 만나게 되었는데, 셀레우쿠스는 이 조약의 일부로 옥수수를 제공하였다.[10]

그들은 큰 반대 없이 마에안데르 계곡 와 팜필리아를 거쳐 내륙으로 행진했다.[9] 그러나 그 후 그들은 잔인하기로 유명한 폭군 모아게테스가 통치하는 시브랴 영토로 진격했다.[11] 로마 사절단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폭군은 로마의 동맹국이라 영토를 황폐화시키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고 그들에게 15명의 재능을 주겠다고 약속했다.[11] 사절단은 모아게테스에게 불소의 진영으로 사절단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벌소는 그들이 진영으로 다가갈 때 그들을 만났고 폴리비우스가 쓴 대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모아게테스는 아시아에 있는 모든 왕자들 중 로마에서 가장 단호한 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제국을 전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우정보다는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다."[11]

아시아의 마이너 지역들을 보여주는 오래된 지도.

사절들은 그의 성난 반응에 겁에 질려 집정관에게 폭군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불소는 이에 동의했다.[11] 다음날 폭군은 성에서 나와 벌소에게 열 다섯 달란트를 받아 달라고 간청했다. 벌소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백 달란트를 내지 않고, 그렇게 허락받은 것을 감사하게 여기면 나라를 약탈하지 않고, 성읍을 습격하여 자르리라."[11]

그러나 폭군은 벌소를 설득하여 가격을 100마디로 낮출 수 있었고 밀 1000메디미니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11] 그래서 모아게테스는 그의 도시를 구하는데 성공했다.[11] 집정관이 콜로바투스 강을 건널 때 피시디아신다 마을에서 온 대사들을 만났다.[12] 대사들은 의사당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점령한 테르메수스에 대해 지원을 요청했다.[12]

영사는 그 제의에 동의했다. 그는 테르메스 영토에 들어가, 50명의 재능과 신디안 영토에서의 철수를 위해 그의 동맹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12] 불소는 피시디아의 키르마사 시를 점령하고 그것으로 큰 부츠를 점령했다.[13] 그 후 그는 리시노에 성을 점령하고 사갈라수스 시로부터 50명의 재능과 2만 메드니 보리와 밀의 조공을 받았다.[13]

영사는 로트린 스프링스에 닿았고 그는 다시 한번 셀레우쿠스에게 만났다. 셀레우쿠스는 부상당하고 아픈 로마인들을 데리고 아파메아로 갔고 로마인들에게 약간의 안내서를 제공했다.[14] 그들은 샘에서 출발한 후 사흘 동안 행군했고, 사흘째 되는 날 갈라디아 3개 부족 가운데 하나인 토리스토보기족과 국경 지대에 도착했다.[15] 그 영사는 집회를 열고 다가오는 전쟁에 대해 병사들에게 연설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페르가뭄과 친분이 있는 유일한 족장 테케토사기족장 에포소게나투스에게 사절을 보냈다.[15] 사절들은 돌아와서, 테르토사기의 족장이 로마인들에게 자신의 영토를 침범하지 말라고 간청했다고 대답했다. 또 다른 족장들의 제출을 강제 시도하겠다고 주장했다.[15]

육군은 내륙 깊숙이 진군하여 큐발룸이라 불리는 갈라시아의 거점 근처에 진을 쳤다.[15] 그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 갈라디아 기병대는 군대의 선발대를 공격하여 상당한 사상자를 냈고, 로마 기병대가 반격하여 갈라디아군을 큰 손실로 몰아붙였다.[15] 영사는 적의 손에 닿는 것을 알고 더욱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15]

올림푸스 산 전투

로마인과 페르가메네스는 고르디움 시에 도착했고, 그 도시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15] 그들이 거기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에포소게아투스가 보낸 전령 한 사람을 만났다. 전령사는 에포소그나투스가 갈라티아인들에게 공격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들이 산 근처에서 머스트링을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15]

톨로스토보기이는 올림푸스 산을 점령했고, 텍토사기와 트로크미는 다른 산으로 갔다.[16] 올림푸스 산에서 갈라티아인들은 도랑과 다른 방어적인 작업으로 스스로를 요새화했다.[17] 처음 이틀 동안 로마인들은 산을 정찰했다. 사흘째 되는 날, 로마인들은 교전꾼들로 갈라디아군의 진지를 공격했다.[18] 로마의 보조 궁수, 슬링거, 창살꾼들은 장갑이 허술한 갈라티아인들에게 큰 손실을 입혔고, 근접전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로마 벨리테스의 우수한 무기와 무기에 의해 극복되었다.[18] 이 전투는 마침내 로마 군단이 그들의 진영을 습격했을 때 갈라디아인들의 학살로 바뀌었다.[19] 갈라디아인들은 그 여파 동안 약 1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약 4만 명을 생포했다.[20]

안시라 전투

올림푸스 산에서 로마가 승리한 후, 텍토사기는 그들에게 공격하지 말라고 간청하고, 그들의 진영과 안시라 중간쯤의 회의를 위해 그를 만나자고 했다.[21] 콘퍼런스의 주된 목적은 테르토사기가 로마군의 공격을 지연시켜 여자와 아이들이 할리스 강을 건너 후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21] 그들의 또 다른 목적은 만리우스가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그를 암살하는 것이었다.[21] 그들이 회의에 가는 동안 로마인들은 갈라디아 기병대가 그들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보았다.[21] 갈라디아군이 뒤따르는 교전에서는 수적 때문에 만리우스의 소규모 기병 호위병을 제압했지만, 로마군 포병대와 동행하던 기병대가 도착하여 갈라디아군을 퇴각시키자 쫓겨났다.[21]

로마인들은 그 다음 이틀을 주변 지역을 정찰하며 보냈고, 사흘째 되는 날 5만 명으로 구성된 갈라디아 군대를 만났다.[22] 로마인들은 그들의 척후병들과 함께 공격함으로써 전투를 시작했다. 다시 갈라디안 사람들은 미사일의 우박에 맞아 죽었고, 그래서 갈라디안 중심부는 군단의 첫 번째 돌격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그들의 진영 방향으로 도망쳤다.[22] 측면은 더 오랫동안 그들의 근거지를 지켰지만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22] 로마인들은 그들을 뒤쫓아 갈라디아 진영을 약탈했다. 살아남은 갈라디아인들은 여자와 아이들, 트로크미족과 합류하기 위해 강을 건너 도망쳤다.[9][23]

여파

이 두 번의 참패는 갈라디아인들이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6][23] 이 캠페인은 갈라디아인들이 아시아 마이너에서의 많은 정복을 통해 많은 부를 모았기 때문에 벌소와 그의 군단을 크게 풍요롭게 했다.[6][23] 갈라디안 사람들은 불소에 사절을 보내어 평화를 청하였으나, 당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에페소스로 급히 돌아가고 있던 불소는 에페소스로 돌아오라고 빌었다.[23]

벌소는 아시아 마이너에서 1년 더 머물렀다.[6] 그 기간 동안 그는 안티오쿠스와[24] 아파메아 조약을 체결하고 아시아 소해안의 땅을 페르가뭄과 로도스로 나누었다.[6][25] 갈라디아 사절이 오자 벌소는 페르가뭄의 에우메네스 2세가 로마에서 돌아오면 그들에게 평화의 조건을 주겠다고 말했다.[26]

불소는 기원전 188년에 로마로의 귀환 여행을 시작했고 기원전 187년에 도착했다.[6]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갈라디아에 대한 무단 전쟁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27] 그러나 그는 결국 논쟁을 이겨내고 원로원으로부터 승리를 얻었다.[28]

인용구

참조

일차 출처

  • 헨리 베티슨이 번역한 리비(1976년). 로마와 지중해. 런던: 펭귄 클래식. ISBN0-14-044318-5.
  • Frank W. Walbank가 번역한 Polybius (1979년) 로마 제국의 부흥. 뉴욕: 펭귄 클래식. ISBN 0-14-044362-2

온라인 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