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틴 전쟁
Jugurthine War주거틴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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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라의 주구르타 포획을 기념하는 동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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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로마 공화국 | 누미디아 | ||||||||
지휘관과 지도자 | |||||||||
루시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오울루스 포스미우스 알비누스 Q.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시우스 코넬리우스 술라 | 누미디아 주구르타 보밀카 보쿠스 |
알제리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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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구르틴 전쟁(라틴어: Bellum Iugurthinum; 기원전 112–106년)은 로마 공화국과 현대 알제리에 근접한 북아프리카 연안의 왕국인 누미디아의 주구르타 왕 사이의 무력 충돌이었다. 주구르타는 누미디아 왕 미립사의 조카로, 그가 암살, 전쟁, 뇌물 수수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양자였다.
전쟁은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정복하고 제국이 부상하는 데 중요한 국면을 이루었으나 누미디아는 기원전 46년이 되어서야 로마의 주가 되었다.[1]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충실한 동맹국인 [2]누미디아의 왕좌를 주구르타가 빼앗은 후, 로마는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3]
주구르타와 누미디아
누미디아는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와 인접한 북아프리카(현대의 알제리 북부에 상당 부분 해당)에 위치한 왕국이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확고한 동맹이었던 마시니사 왕은 149년 사망하였고, 기원전 149~118년을 통치한 아들 미립사가 뒤를 이었다. 미킵사는 사망 당시 세 명의 잠재적인 후계자가 있었는데, 그의 두 아들 아더발과 히엠살 1세와 사생 조카 주구르타가 있었다. 주구르타는 누만티아의 포위전에서 스키피오 에이밀리아누스 휘하에서 싸웠는데, 그곳에서 로마 귀족들과의 친분을 통해 로마의 예의와 군사 전술에 대해 친분을 쌓았다. 미립사는 주구르타가 죽었을 때 자신의 다소 능력이 부족한 아들들로부터 왕국을 빼앗을 것을 염려하여, 그를 입양하고, 왕권을 그의 두 아들과 주구르타에게 공동으로 물려주었다.[4] 왕 Micipsa의 돌아가신 후 그들은 세명의 왕,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 간의 3개의 왕국으로 그들의 유산 나누기로 합의했다; 하지만[5]을 내리자, 그들은 분단의 조건에 대해 합의를 보고, 유구르타 그의 사촌들에 대한 개전을 선언했다;Hiempsal한 형제의 더 젊고 있는 것이 아니에 의해 암살당했다 못 했다. 광주구르타의 대리인들, 그리고 아더발은 자신을 방어하지 못한 채 패배하여 로마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그는 로마 원로원에 중재를 호소했다.[6]
비록 원로원은 미킵사의 의지에 대한 유가증권이었지만, 그들은 이제 주구르타로부터 뇌물을 받아 그의 범죄를 묵인하도록 허용하고, 전 콘술 루치우스 오피미우스가 이끄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누미디아를 나머지 경쟁자들(BC 116년) 사이에 공평하게 나누었다. 그러나 주구르타는 로마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누미디아의 더 좋고, 더 비옥하고 인구가 많은 서부 반을 할당하게 했고, 아더발은 동쪽을 받았다.[7] 로마의 부패에 대해 무력한 아더발은 받아들였고 평화가 이루어졌다. 그 직후인 기원전 113년 주구르타는 다시 사촌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그를 격파하여 아더발의 수도인 서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7] 아더발은 상업적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정착한 많은 로마 에크족들의 도움을 받아 몇 달 동안 버텼다. 아더발은 포위선 안쪽에서 다시 로마에 호소했고, 원로원은 주구르타에게 디스리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후작은 그 요구를 무시했고, 원로원은 이번에는 귀족의 존경받는 일원인 마르쿠스 스카우르스를 단장으로 하는 2차 위원회를 보내 누미디아 왕을 굴복시키도록 위협했다. 왕은 토론에 개방적인 척하며, 시르타가 식량이 부족하고 구제의 희망이 있을 만큼 오랫동안 스카우루스와의 협상을 지연시켰다. 스카우루스가 주구르타에게 약속을 강요하지 않고 떠나자 아더발은 항복했다. 주구르타는 서타 방위에 가담했던 로마인들과 함께 즉시 그를 처형시켰다.[8] 그러나 로마 시민의 죽음은 국내의 평민들 사이에 즉각적인 분노를 일으켰고, 인기 있는 호민관 가이우스 메미우스의 위협을 받은 원로원은 마지못해 기원전 111년 마침내 주구르타에 전쟁을 선포했다.[9][10]

베스티아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 영사는 아프리카에서 주구르타에 대항하여 로마군을 지휘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그는 스카우루스 등 경험 많은 장교들과 동행하였고, 마우레타니아의 왕 보쿠스로부터 동맹 제의를 받았다. 자신의 장인 보쿠스의 망명으로 주구르타에 경종을 울렸고, 그는 로마 집정관에 항복하라고 보냈다.[11] 이에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그를 더 이상 위협으로 보지 않고 뇌물을 받아 극히 관대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하도록 허락했다. 누미디아는 온전한 상태로 주구르타에 복권되었고, 약간의 벌금과 그의 전쟁용 마약(이후 그가 부패한 장교들로부터 할인된 가격으로 되 사들인 것)의 송금만이 그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가였다.그의 죄값을 치르겠다고 [12]양보하다 사실, 주구르타의 항복조건이 너무나 호의적이어서 로마에 대한 민중의 항의를 다시 불러일으켰고, 호민관 메미우스의 요구로 조약의 진행에 대한 조사가 착수되었다.[12] 주구르타는 안전한 지휘를 약속하고 로마로 소환되어 증인으로 나왔지만, 종교재판을 따르기는커녕 로마 트리뷴 두 개에게 뇌물을 주어 재판 거부를 막고 증언하는 것을 막았다. 뒤이은 격분 속에서 사촌을 두려워하여 로마로 도망친 주구르타의 사촌 마시바는 누미디아 왕좌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일 기회를 잡았다. 주구르타는 그를 암살했고, 상원은 처음에는 그가 응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뇌물 수수를 다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지만,[13] 결국 그의 무례함과 그를 도시에서 추방하고 최근의 평화를 취소하려는 폭도들의 분노에 의해 강요당했다.[14]
오울루스 포스무미우스 스푸리우스
집정관 Spurius Postumius Albinus는 아프리카에서 로마군을 지휘했지만, 무능과 군대의 기강 해이, 그리고 주구르타에 의한 뇌물이라는 주장으로 인해 활발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 해 말 알비누스는 형인 오울루스 포스미우스 알비누스에게 지휘를 맡기고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후작은 형보다 더 활동적이긴 하지만 과감한 일격을 결심하여, 한겨울에 누미디아 국고가 보관되어 있는 수툴 마을을 포위하려고 행군했으나, 그 마을은 강력한 수비대와 뛰어난 요새를 갖추고 있어서 포획할 수 없었다. 포스투미우스는 적에게 일격을 가하지 않고 후퇴하지 않았을까 불안해하면서 주구르타를 사하라의 황량한 야산으로 유인하도록 허락했는데, 그곳에서 로마 장교들에게 뇌물을 주어 공격을 용이하게 한 것으로 알려진 교활한 누미디아 왕은 로마인들을 불리하게 잡을 수 있었다. 로마군의 절반은 전사했고, 생존자들은 항복이라는 수치스러운 상징성 속에 멍에를 지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15] 패배한 포스투미우스는 누미디아를 주구르타에 사직하고 베스티아, 스코우루스 등과 체결한 평화로 귀환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이 항복 소식을 듣고 조건 예찬을 거부하고 전쟁을 계속하였다.[16]
메텔루스
포스투미우스의 패배 후, 원로원은 마침내 무기력함에서 몸을 떨면서, 청렴함과 용기로 명성을 떨친 평민 귀족 퀸투스 메텔루스를 아프리카에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메텔루스는 전 호민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아르피눔 출신의 평민주의자)와 저명한 규율주의자이자 군사 이론가인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Publius Rutilius Rufus)[17][clarification needed]로서 계급보다는 능력을 갖춘 선거운동원들을 위한 장교로 선발함으로써 판단의 건전성을 입증했다. 기원전 109년 메텔루스가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는 먼저 군대를 재훈련하고 어떤 형태의 훈육을 실시해야 했다.[18][19] 109년 봄, 메텔루스는 재편성된 군대를 이끌고 누미디아로 들어갔고, 주구르타는 경각심을 갖고 협상을 시도했으나 메텔루스는 전권을 행사했으며, 주구르타의 조건을 허락하지 않고 주구르타의 사절들과 공모하여 주구르타를 사로잡아 로마인들에게 인도하였다. 교활한 주구르타는 메텔루스의 의도를 짐작하고 협상을 결렬시키고 후퇴하여 누미디아 산맥 너머 남쪽으로 철수하고 뒤쪽의 평야에 자리를 잡았다.[20] 메텔로스는 뒤따라 산을 넘어 사막으로 들어가 무툴 강으로 진격했다. 주구르타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었는데, 그 중 하나는 (기병대와 보병의 최정예) 남쪽에 나란히 18마일 남쪽에 있는 무툴 강으로 진군하고 있던 로마인들의 오른쪽 측면에 있는 산 남쪽, 두 번째는 남쪽으로 더 떨어져서 강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보병들).[20] 메텔루스는 루푸스 휘하의 강으로 바로 남쪽으로 1개 병력을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처리했고, 메텔루스와 마리우스 휘하의 나머지 병력은 자신의 위치에서 주구르타를 몰아내고 강으로 향하는 첫 번째 육신의 진격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진군했다. 그러나 주구르타는 뛰어난 장군정신을 발휘하여 로마인들이 평야로 내려오자마자 보병 기둥을 파견하여 산길을 잡아서 퇴각선을 끊었다. 그의 기병대는 메텔루스가 평야를 따라 보병 떼를 지어 보병을 배치하는 것을 보고 로마인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신크라고 비난했다.e 기병 자체가 없었다.[20] 한편 루푸스는 강으로 진격했으나 주구르타의 남부군의 공격을 받았으므로 두 로마군은 서로 구원하러 올 수 없었다. 그러나 메텔루스의 군대는 이제 적은 병력과 열등한 장군 지위로 사막에 함정에 빠졌지만, 로마인들은 여전히 양쪽 전선에서 동시에 우세했다. 루푸스는 전방으로 남부의 분대를 제압하여 적의 코끼리와 보병을 사막을 가로질러 날려보냈으며, 메텔루스와 마리우스는 군단 부대를 규합하여 평원의 단 하나의 언덕을 점령하고 상황을 지휘했다. 주구르타의 열등한 누미디아 병사들은 로마 보병의 진격 전에는 무력하여 심한 손실을 입고 사막으로 흩어졌다. 메텔루스는 무툴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누미디아 왕이 전쟁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끝은 멀었다.[21]
이 패배 후에 주구르타와 로마군 사령관 사이에 새로운 협상이 이어졌다. 비록 주구르타는 무거운 양보를 제의했지만, 메텔루스는 포로 생활을 거부하는 주구르타를 붙잡는 것으로만 전쟁이 끝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22] 주구르타는 로마인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게릴라 전술에 의한 전쟁을 유지하기 위해 보병과 경 기병대의 가장 활동적인 병력만을 유지한 채 질이 낮은 신병 대부분을 해임했다.[21] 메텔루스는 다시 한 번 진격하여 시내를 따라잡았으나 적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누미디아 도시 자마를 포위하여 주구르타에게 투혼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왕은 자신을 노략질하는 것을 거부하고 변칙적인 전술을 계속하였다.[23] 기원전 108년 메텔루스는 주구르타의 군대의 위치를 알아내고 누미디아인을 따라잡으며 왕에게 심각한 패배를 가했다.[24] 주구르타는 가족, 보물상자와 함께 사막 요새 탈라로 도망쳤는데, 물이 없는 사막을 3일 동안 강행군하는 것 외에는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메텔루스는 그의 군인들에게 수상 수송을 위한 가죽을 공급하고, 40일 후에 함락된 요새를 포위하기 위해 뒤따랐다. 그러나 주구르타는 불타는 잔해 속에서 간신히 탈출해 메텔루스의 모든 노력을 되돌렸다.[25]
이 때 주구르타는 장인의 궁정으로 물러났고, 이전에는 로마인을 위해 우정을 공언했지만 지금은 (로마에서) 긍정적인 선전포고 없이 주구르타 1세를 관대하게 맞아들였고, 수도인 시르타까지 그의 군대를 이끌고 누미디아로 진격했다.[25] 선거운동 종료 후 이 지역에 겨울 숙소를 차지했던 메텔루스는 보쿠스와 주구르타 인수를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합의에 이르기도 전에 메텔루스는 로마 부족 총회에 의해 그의 지휘에서 물러나고 그의 부관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교체되었다.[26] 메텔루스와 마리우스 사이의 로마 진영 내적 투쟁은 이러한 지휘권의 변화를 이끌었다. 메텔루스는 마리우스가 로마 정치에 대해 알고 있는 야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로마로 항해하여 집정관에 서도록 허락하는 것을 며칠 동안 거부했다. 결국 메텔루스는 마리우스의 로마 복귀를 허용했고 마리우스는 107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메텔루스는 마리우스가 누미디아에서 자신의 지휘를 원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누미디아는 로마 원로원에 의해 집정관에 배속되도록 지정된 지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포퓰러들은 107년 마리우스에게 주구르타에 대항하는 명령을 내렸던 부족의회에서 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의회가 이 문제에 대한 상원의 권리와 권한을 침해하고 상원이 양보했기 때문에 의미심장했다.[27]
메텔로스는 이러한 모든 발전에 격분하여 마리우스 휘하에서 복무할 자신의 군단을 거부함으로써 마리우스의 지휘를 훨씬 더 어렵게 만들기로 결심했다.[28] 그는 [메텔루스]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내 다른 집정관 루치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군대에 합류하게 했는데, 그는 게르만족의 가울 침공에 맞서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하려던 참이었다.[28]
마리우스
마리우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인력 비축량이 고갈되었음을 알았다. 불평등이 증가함에 따라, 군대에서 복무하기 위한 재산 요건을 충족하는 군 연령대의 남성들이 줄어들었다.[29] 그러나 수천 명의 가난한 이탈리아인들, 즉 카피테 검열단이나 헤드카운트는 로마에 빈둥빈둥 앉아 봉사할 자격이 없었다. 그것들을 사용하려 했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이었던 실존적 위기 동안 재산 요건을 포기한 전례와 함께 마리우스는 그 요건에서 면제되었다.[30] 이러한 사건들은 마리우스가 로마군을 개혁하도록 고무시킬 것이다.[31]
기원전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집정관으로 누미디아에 도착하자 그는 즉시 협상을 중단하고 전쟁을 재개했다. 마리우스는 누미디아 시골을 약탈하며 서쪽으로 진군하여 주구르타를 도발하여 세트피스 전투로 만들려는 소수 누미디아 성읍과 요새를 점령하였으나 누미디아 왕은 교전을 거부했다. 마리우스의 전략은 메텔루스의 전략과 비슷했고, 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는 누미디아 성읍의 점령을 계속했고, 몇몇 전략적인 위치를 강화했다. 기원전 107년 말 마리우스는 남쪽 먼 곳에 있는 캡사까지 위험한 사막 행군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마을이 항복한 후, 그는 생존자 모두를 처형했다.[32] 다음으로 그는 서쪽으로 멀리 진격하여 주구르타가 자신의 보물의 상당 부분을 옮긴 뮬루차 강 근처의 요새를 점령했다. 한편 주구르타의 충신들은 서타를 탈환했다.[33] 멀리 서쪽으로 진군함으로써 마리우스는 로마군을 보쿠스 왕의 지배권에 매우 가까이까지 끌어들였고, 세리프 서쪽의 사막에서 마리우스는 두 적왕의 지휘를 받는 누미디아인과 마우레타니아인의 대규모 군대에 의해 기습당했다.[33] 일단 마리우스는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난투극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방어적인 서클을 형성하는 것뿐이었다.[33] 그 공격은 개툴리안과 마우레타니안 카발레스에 의해 압박되었고, 마리우스와 그의 주력 부대는 언덕에 포위된 자신을 발견했고 마리우스의 퀘스터 루치우스 코넬리우스 술라와 그의 부하들은 근처의 또 다른 언덕에서 수세에 몰렸다.[33] 그러나 로마인들은 가까스로 저녁까지 적을 저지했고 아프리카인들은 다음날 아침 그 일을 끝낼 자신이 있다고 확신하며 물러났다. 로마인들은 다음날 새벽 아프리카인들의 불충분한 경비가 허술한 진영을 놀라게 하고 아프리카 군대를 완전히 격파했다.[33] 그리고 그들은 다시 서타를 데리고 그곳의 겨울 숙소로 가기 위해 동쪽으로 행군했다. 아프리카 왕들은 경 기병대와 함께 동쪽으로 진군을 하였으나 마리우스가 후위병과 기병대를 지휘한 술라에게 반격을 당했다. 아프리카 연합군은 마리우스를 물리치려 했으나 술라가 추격에서 돌아오자 로마군은 주구르타와 보쿠스의 군대를 모두 격파했다. 마리우스는 제2차 서타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제 그의 군대를 겨울 숙소로 보낼 수 있었다.[34] 이리하여 마리우스의 군대는 시르타에서 한 해의 안전유세를 마쳤으나, 로마가 전쟁을 통해 주구르타의 게릴라 전술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은 지금쯤 분명했다. 그러므로 겨울 동안 마리우스는 보쿠스와 협상을 재개하였는데, 보쿠스는 비록 싸움에 가담하였지만 아직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결국 마리우스는 보쿠스의 궁중 회원들과 친분이 있던 술라가 보쿠스의 진영으로 들어가 주구르타를 인질로 받기로 하는 보쿠스와 계약을 맺었다. 마우리타니아인의 배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술라는 동의했다; 주구르타의 남은 추종자들은 배반적으로 학살되었고, 그 자신도 보쿠스에 의해 술라에게 쇠사슬로 넘겨졌다.[35] 그 여파로 보쿠스는 주구르타 왕국의 서부를 합병하여 로마인의 친구가 되었다. 주구르타는 로마의 지하 감옥(툴리아누스)에 던져졌고, 기원전 104년 마리우스의 승리를 갈고 닦은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36]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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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구르틴 전쟁은 당시 공화국의 문제점을, 그리고 앞으로 닥칠 문제를 분명히 드러냈다.[37] 주구르타와 같은 사람이 로마의 군사와 문관들을 매수함으로써 권좌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은 로마의 도덕적, 윤리적 쇠퇴를 반영했다. 로마인들은 이제 종종 국가의 희생으로 개인의 권력을 추구했다. 이것은 마리우스가 로마의 전통을 무시하고 권력을 잡은 데서 잘 보여졌다. 이러한 사건들은 마리우스의 수구자인 루치우스 코넬리우스 술라에게도 관찰되었는데, 그는 후에 후기 공화국의 위대한 내전 초기에 마리우스의 라이벌로 오게 되었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이 경쟁의 시작은 술라가 주구르타의 협상과 궁극적인 포획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술라는 마리우스가 승리를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포획을 묘사하는 반지를 끼게 되었다.
로마의 역사학자 살루스트는 주구르틴 전쟁에 관한 모노그래프인 벨럼 주구르티눔을 저술하여 이러한 로마 윤리의 저하를 강조하여 카틸린 음모에 관한 그의 저작과 함께 카르타고 멸망에서 시작되어 로마 공화국의 몰락 자체로 끝난 로마의 타락 연대표에 배치하였다. 살루스트는 술라와 마리우스의 플루타르크의 전기와 함께 전쟁에 관한 가장 귀중한 자료 중 하나이다.
참조
- ^ https://study.com/academy/lesson/the-jugurthine-wars-facts-causes.html
- ^ 살루스트, 주거틴 전쟁, XII
- ^ 마티작, 로마의 적들 64페이지
- ^ J. A. Frode, Caesar- A Sketch, (A. L. Burt Company, New York, 1903), Ch. IV, 페이지 33, 34
- ^ T. 맘센, 로마의 역사 (The Colonistic Press, Massachusetts, 1958), ch. III, 페이지 94
- ^ 모멘센, 페이지 95
- ^ a b 맘센, 96페이지
- ^ 맘센, 페이지 97
- ^ 맘센, 페이지 98
- ^ 세계사 백과사전, (Houghton Mifflin Company, 1952년 보스턴, Houghton Mifflin Company), Ch. II, 페이지 92
- ^ 맘센, 아이비드
- ^ a b 맘센, 페이지 99
- ^ 프라우데, 페이지 35
- ^ 맘센, 페이지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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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맘센, 이비드
- ^ 맘센, 페이지 102
- ^ 마크 하이든, 가이우스 마리우스, 페이지 46; 에우트로피우스, 로마 역사의 대명사 4.27.
- ^ 맘센, 아이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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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b 맘센, 페이지 104
- ^ 맘센, 페이지 105
- ^ 마크 하이든, 가이우스 마리우스 52-54 페이지
- ^ 마크 하이든, 가이우스 마리우스, 페이지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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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던컨 2017, 페이지 113. CATEREFDu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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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b c d e 린다 텔포드, 술라 독재자 재고, 페이지 32
- ^ 맘센, 페이지 109; 린다 텔포드, 술라, 독재자 재고, 페이지 33
- ^ 맘센, 페이지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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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jugurthin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