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쇼더

Hans Schauder

한스 쇼더 박사(Hans Schauder, 1911년 11월 22일, 비엔나 – 2001년 7월 10일 에든버러)는 영국의 의료 고문 및 상담자로, 캠프힐 커뮤니티의 공동 설립자, 가르발드 스쿨 & 트레이닝 센터 설립자.

유년기와 청년

한스 슈더는 동화된 유대인 부모, 폴란드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기 가족이 고용한 가정부로부터 주기도를 배운 기억이 났다. 올드 시티의 스코틀랜드 학교에서 그를 위해 시작된 학교 생활은 쇼더를 음악, 예술, 문학의 기쁨을 소개했다. 그는 비엔나가 제공해야 할 예술, 음악, 문학의 모든 기쁨을 받아들였다. 예술과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지식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 그의 일생 동안 남아 있었다. 그는 또한 인간, 그들의 고민과 어려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소년 시절에 사람들은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거나, 동정심과 이해심을 가지고 경청하는 능력 때문에 조언을 구하곤 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산에 오르거나, 함께 연극을 읽고, 노래하고, 음악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렸을 때 그는 수도사가 되고 싶었다. 이후 와사-기름 체육관에서 그는 그의 친구 루디 리사우, 에디 와이스버그, 브론자 힉트너를 만났고, 그를 통해 비엔나 유대인 동료인 리슬 슈왈브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을 통해 인류학과는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수도승 생활을 바라지 않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영적인 지식과 이해의 길을 열었다. 스무 살에 비엔나 대학에 입학했고, 스물두 살에 아르레스하임에서 칼 쾨니그 박사를 만났는데, 쾨니그가 비엔나로 이주하기 전 의대생들을 위한 학회에서였다. 그가 그렇게 했을 때, 한스는 그의 대부분의 친구들을 포함하고 그들의 대부분의 삶을 통해 연락을 유지하며 그들 사이에 많은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2]

영국으로의 이민

비록 그가 이때까지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1938년 슈워더의 유대인 배경은 나치에 의해 합병된 후 오스트리아를 탈출하도록 강요했다. 몇 주 전, 리슬 역시 애버딘 근처에서 퀘이커 부부와 함께 성역을 찾아 떠났었다. 슈더는 가난 속에서 살고 만성적인 흉부 질환을 앓으며 학위를 마치기 위해 애썼다.[3]

비록 그의 가족과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고, 그 자신도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고통을 겪으며 여생을 그의 건강과 씨름하고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서 최고의 것을 찾고 키워주는 신뢰와 개방적인 본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이 되기 위해서는 선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도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기도와 명상을 통해 내면을 강하게 하는 사람은 전쟁을 치르거나 다른 나라를 미워하지 않는다.

캠프힐과 가발드

슈워더와 그의 약혼자가 칼 코에니그 박사가 이끄는 젊고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의 모임에 합류했을 때, 그들의 꿈은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찾는 것이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에서 현실이 되었다. 여기서, 바슬에서 의학 공부를 마친 후, 슈워더와 그의 젊은 아내는 전세계 조직의 핵이 되고 공동체 생활의 모델이 되는 애버딘 근처의 캠프힐 커뮤니티의 설립자 그룹에 가입했다.[4] 캠프힐에 있는 동안 그들의 쌍둥이 딸들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딸들이 태어났다.

1944년 슈워더는 캠프힐을 떠나 캠프힐 그룹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웨스트 린튼 근처에 있는 새로운 인류학 공동체 가발드 학교와 훈련 센터를 시작함으로써 빈 저택을 활기찬 공동체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가르발드의 의사였지만, 쇼더는 청소와 요리부터 노래 레슨과 성경 공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했다. 그 후 5년 후인 1949년, 슈워더와 그의 가족은 근처 에든버러에 정착하기 위해 떠났다. 그는 결핵 진단을 받았고 한동안 리슬은 회복하는 동안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 후, 그는 또 다른 인류학 단체인 에든버러 루돌프 스타이너 학교의 의학 고문이 되었다. 그것은 공동체의 소란스러움과는 반대로 자기 자신의 집의 평화로운 환경 안에서 환영받는 숨쉬는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쇼더는 개인과 자신의 더 깊은 문제에 초점을 맞춘 능력을 개발했다.

이미 가발드에서는 신경증적 또는 정신이상적 특성을 가진 젊은이나 위기 상황에 처한 젊은이들에 대한 슈더의 진단 능력과 평가를 사람들이 인정하고 중시했었다. 의료계의 동료들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질병의 이미지와 그것이 제시하는 도전에 영감을 받아 그의 창의적이고 특이한 작업 방식에 감탄했다.

상담업무

50년대 후반, 슈워더는 에든버러 소그튼 교도소의 죄수들을 상담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사마리아인 직원들에게 문제 사건에 대해 조언하고, 부모들의 자녀 문제에 대해 상담하고, 성인 상담으로 나아가는 등 자신의 일을 더 넓은 사회 문제로 확대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상담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접근법을 개발했다. 즉, 고객과 완전히 동일시하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가능한 한 완전한 그림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수년간의 경험 후에, 그는 도미니카 수도인 마르쿠스 레페부레를 만났고, 그는 또한 대학에서 상담교사로 일했다. 두 사람은 슈워더의 치료적 접근의 구조를 분석하면서 인터뷰 과정에서 점차 원형적 요소를 정확히 짚어냈다. 이것들은 1982년에 출판된 그들의 책 "대화"와 "상담"에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영국에서 큰 찬사를 받았고 후에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대화들은 상담을 현대 영성의 한 형태로 제시하며, 상담은 정신적인 경험을 촉진하고 정신분석적, 심리치료학적 개념을 영적인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번 대화에서는 상담과 영성 둘 다에서 주관성의 허가에 대한 비판도 제시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폴 힐라스와 린다 우드헤드의 영적 혁명 논문에 대한 후일의 비판을 예상하고 상세히 기술한다."[5] 책의 등장 이후, 사람들은 미국까지 슈워더를 방문하여 상담의 측면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한스 쇼더 연구소는 독일에서 80년대 후반에 설립되었다.

유럽에서 꾸준히 방문객들이 이어졌다: 슈워더와 그들의 문제를 의논하거나 정신적, 도덕적인 질문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어하거나, 또는 단지 매우 교양 있고 현명한 인간과 접촉할 기회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쇼더는 사람들에게 기도와 명상을 통해 내면을 함양하고 내면의 삶을 발전시켜 우리의 현대적인 정신없는 생활방식에 관여하는 것의 위험성에 맞도록 반복해서 경고할 것이다.

한스 쇼더는 자신의 사생활과 직업 모두에서 완전히 청렴하고 진실한 만남인 인간의 순수한 만남을 통해 생겨나는 치료법의 선구자였다. 그에게 '공감'이란 말은 그가 온전히 살아온 현실이었다. 독일 등지에서 전기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카를스루에 한스 슈워더 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인류학적으로 지향하는 여러 기관과 실무자들이 전기 작품 b를 그의 통찰력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그의 시를 독일어로 쓴 두 권의 책이 출판되었는데, 마지막은 인간적으로 노후에, 그리고 노화와 이별, 질병, 생사의 시련 등을 다루고 있다. 어려운 많은 것들은 형식과 정복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도전을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 역경을 극복하는 힘이 탄생한다. 그들의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는 쇼더의 연구는 우리 각자에게 놓여 있는 잠재력을 일깨웠고 그는 그의 환자 개개인이 그것을 펼 수 있도록 도왔다.[6]

게시된 작업

  • 한스 슈워더와 마르쿠스 르페부르 베르라그 암 괴테아누메누스의 레벤스베라퉁 (1987년 1월 1일 ~ ) ISBN978-3723504284
  • 상담에 대한 대화: Marcus Lefébure Bloomsbury T&T Clark의 의사와 사제 사이; 3판 (2000년 11월 14일) ISBN 978-0567291646
  • Wege zu hellen Wassern: Gedichte Stuttgart : 우라흐하우스, 1984 ISBN 978387838384038
  • 한스 슈더 비엔나 – 마이 홈 Horst Werner Franke Edinburgh Agathe Dawson 2001이 삽화로 회상, 수집 및 기록. 번역하다. 크리스티안 폰 아르님
  • Rine Flamme, aus dem Dunkel steigend. 수잔 케르코비우스가 편집한 게디히테, 1993년

추가 읽기

참조

특수 니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