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콘라드 빌헬름 뢰헤

Johann Konrad Wilhelm Löhe
요한 콘라드 빌헬름 뢰헤
Wilhelm Loehe.jpg
사진: 빌헬름 로에헤
태어난(1808-02-21)1808년 2월 21일
죽은1872년 1월 2일(1872-01-02) (63세)
국적독일어
교육에를랑겐 대학교
종교루터교
서수드1831

요한 콘라드 빌헬름 뢰헤(Johann Konrad Wilhelm Löhe, 1808년 2월 21일 ~ 1872년 1월 2일) (흔히 'Loehe'로 칭함)는 루터교회의 목사, 교파 루터교에서 권사 운동의 창시자, 루터교-미스토리 시노드(LMS)의 창립 후원자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노엔데텔사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북아메리카, 호주, 뉴기니, 브라질, 우크라이나에 목회자를 보냈다. 바이에른 교회 내에서 분명한 고백적 근거를 위한 그의 작업은 때때로 교회주의적 관료주의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한 교구가 성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찾고, 그 근원으로부터 전도와 사회부처가 흐를 것이라는 것이었다. 미시간, 오하이오, 아이오와에 있는 많은 루터교도 집단은 뢰헤가 보낸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는 1월 2일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와 복음주의 루터교회의 달력에 의해 기념된다.

출생과 조생

뢰헤는 1808년 2월 21일 현재의 미들 프랑코니아퓌르트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게 주인의 아들인 그의 아버지는 1816년에 돌아가셨고 그는 매우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았다. 뉘른베르크에 있는 C. L. Roth 체육관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고 1826년 에를랑겐 대학에서 신학 연구에 합격했다. 그는 신학 크리스천 크래프트토마스켐펜리폼드 교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결국 그는 루터교 신앙에 입문하여 데이비드 홀라즈의 가르침을 받아 루터교 신자가 되었다. 1828년 그는 교수들의 강의에 이끌리지 않고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에도 이끌려 베를린 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냈다. 뢰헤는 1830년 에를랑겐을 졸업했으나 1831년까지 기다렸다가 어퍼프랑코니아(동북 바바리아)에 있는 키르첸라미츠에게 목회 과제를 받았다.

목회

요한 콘라드 빌헬름 뢰헤

뢰헤의 퓌르트에서의 일은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의 열렬한 복음주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교회당국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비슷한 경험이 귄베르크에서도 이어졌다. 귄베르크에서는 성(聖)의 조교로 있었다. 에기디엔 (성) 자일스) 그는 설교와 반피에티즘적 성향으로 자주 비판을 받았다. 그는 도시 환경에서 임무를 얻는 데 실패한 후 1837년 퓌르트에서 약 30km(19mi) 떨어진 바이에른주 노옌데텔사우 마을에 정착하기 전에 일련의 파리를 통해 전학했다. 그는 같은 해에 결혼했다.

뢰헤는 대부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잘 교류하는 이상적인 목사였다. 그는 신학 연구를 루터교 신앙고백에 집중시켰고, 회중생활의 중심으로서 성찬식을 축하하는 데 상당한 생각을 기울였다. 뢰헤는 특히 옛 루터교 소송에 관심이 많았다. 뢰헤는 또한 C.F.W.발터에 반대하는 자신을 발견했던 어떤 지위에 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서품을 통한 직접적 약속으로서 집합적 부름과는 별개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목회 사무소에 대한 존재론적 시각으로도 주목받았다.[1] 그는 이 모든 생각들을 사회 재건에 대한 중압적인 주장과 결합시켰다. 뢰헤는 1848년부터 1852년까지 기간 동안 교회에 대한 분명한 고백성적 지위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 지역 당국과의 긴장된 관계를 견뎌냈다. 한때는 교회 탈퇴까지 고려했지만 결국 자신과 교회 지도부의 이견을 해소할 수 있었다.

전도 사업

결코 떠나지 않는 외딴 마을의 목초지에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뢰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특히 독일 이민자들의 북아메리카에 대한 상태에 대해 우려했다. 그는 1841년부터 시작된 이민 인구의 정신적 상태를 강화하는 것을 돕기 위해 다양한 출처를 통해 자금을 요청했다.

1843년, F.C.D.에 대응. 노르다메리카의 위네켄의 디 노르트도이첸 루터너(영어: 뢰헤와 요한 프리드리히 우체르 목사는 미국 내 독일 루터 이민자들의 요구를 대변해 지지를 높이기 위해 키르클리히 미테일룽겐(Kirchliche Mittheilungen aus und über Nord-Amerika(영어: Churchitution News on North America)를 설립했다.

뢰헤는 또한 북아메리카에 목회자들을 보내 정착민들을 돕고 북미 원주민 인구의 전환을 돕도록 격려했다. 이를 위해 선교사 양성을 위해 두 개의 학교를 건설했고, 그 중 한 곳은 아이오와주 웨이벌리의 바르트부르크대학이 되었고, 다른 한 곳은 현재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의 콩코드아신학교가 되었다. 뢰헤가 보낸 개인들은 오하이오주의 복음주의 루터교 공동시노드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뢰헤는 1845년 교리적 차이점에 대한 그의 지지를 철회했다.

뢰헤의 특사단은 1846년 LCMS 설립자 중 한 명이었다. 1853년 뢰헤 지지자들은 아이오와 주의 복음주의 루터교 신조를 설립했다. 뢰헤는 미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장려한 것으로 가장 잘 기억되고 있는 반면, 그의 외국선교협회(독일어: 게셀샤프트 퓌르 이네르와 에우셰르 미션 신네에반게리쉬-루테리스첸 키르체).

권사 공동체

뢰헤는 외국의 문제에 대해 걱정하는 것 외에도 국내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우려를 유지했다. 여기서 그는 많은 미혼의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의 나쁜 상황을 보았다. 농촌 사회에서 그들은 매우 소외된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교육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정신으로 그는 1849년 초대 권사 마더하우스를 세웠다. 그 집은 학교, 병원, 그리고 다른 사회 기관들을 유치하면서 사회와 교육 활동의 장소가 되었다. 권사님들은 독신생활과 영경제적 공동체에서 살았다.

레거시

뢰헤는 1872년 1월 2일 노엔데텔사우에서 6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5대륙의 루터교회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아이오와주 두부크에 있는 바르트부르크신학대학원예배당과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콩코드아신학대학원의 한 학술빌딩이 그의 기억을 위해 헌화하고 있다. 그는 루터교와 관련된 임무, 고백성, 소송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루테라니즘과 관련된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참고 항목

참조

  1. ^ Frey, I.P. (1998). Concerning the Doctrine of the Church and of its Ministry,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Synod and its Discipline in Our Great Heritage, Volume 3. Milwaukee: Northwestern Publishing House. p. 334. ISBN 0810003791.

추가 읽기

  • 가이거, 에리카. 빌헬름 로에의 인생, 일, 영향: 1808–1872. 울프 디트리히 크나페가 번역했다. 세인트루이스: 2010년 콩코드리아 출판사

외부 링크